88화. 둘이 하나가 되는 (1)2016.11.03.
따르르르-
잠결에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설은 감고 있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방 안이 환한 걸 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귀에 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났어?
“응. 그런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예요? 집인 것 같진 않은데요.”
설이 빙긋 웃으며 창문을 옆으로 활짝 젖혔다. 밤새 눈이 많이 내렸는지 2층 창문에서 내려다본 바깥은 온통 하얀 빛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와 닿자 정신이 일순 상쾌해지는 걸 느끼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찬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서서히 뱉었다.
피부에 와 닿는 찬 기운에 금세 설의 몸이 차가워졌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포근하고 따듯하기만 했다.
-나 잠깐 사무실 들어왔어. 여기 있다가 이따 오후에 아버지와 같이 출발할 거야.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오는 거지?
“난 엄마가 집으로 오시기로 했어요, 아빠는 거기로 시간 맞춰 오신다고 하셨고요. 참, 서연 씨도 오늘 오는 거예요? 그러려면 회사에서 중간에 나와야 할 텐데 번거롭겠어요.”
-이따 어머니랑 같이 그쪽으로 온다고 했어.
오늘은 양쪽 집안이 만나 상견례를 하기로 했다.
대통령 내외의 경우 아무래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서는 움직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처음에 대통령은 김 국장 내외를 청와대로 초대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사돈 부부가 불편할 거라는 영부인의 의견에 그는 마음을 바꿔 먹고 철저한 보안 속에 상견례 장소를 물색하여 인적이 드물고 한적한 곳을 정했다.
봄이 오기 전에 결혼을 하고 싶다는 설의 바람을 이루어주려면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우리 정말 결혼하나 봐요.”
설은 핸드폰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결혼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앞두게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고도 하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고 하던데 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별 탈 없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결혼도 하고 다시 일도 하게 됐지.
“정말요? 당신 다시 업무에 복귀하는 거예요?”
-응, 그렇게 됐어. 그동안 꽤 편하고 즐거웠는데 아쉽네.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별로 아쉬워하는 것 같지 않은데요?”
-그래?
민준의 낮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제자리를 찾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다행이긴 했지만, 가슴 한쪽에선 그녀가 잊고 있던 불안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이제 원래 하던 일을…… 계속하는 거죠?”
-요즘 취업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내가 일하는 분야엔 아직도 인력난이 심각하거든.
설은 민준의 복귀가 단순히 아버지의 입김 때문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김 국장은 공사 구분이 엄격한 사람이었으니, 민준의 복귀를 결정 내린 이유가 요즘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무관하진 않을 터였다.
“이따 늦으면 안 돼요, 나 당신 기다리는 거 싫어요.”
-안 늦어, 그러니 기다리지 않아도 돼.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두근거리던 그녀의 가슴이 신기하게도 차츰 잠잠해졌다. 설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
민준은 통화가 끝난 후에도 핸드폰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좋기만 해도 되는 건지 불안한 마음이 들 만큼 행복했던 그는 핸드폰을 공중에 던졌다 잡으며 피식거렸다.
“민…… 민준아, 너 결혼해? 그 왜, 그때 그 제수……님이랑?”
박 단장의 목소리에 그제야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달은 민준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민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덜덜 떨고 있었고 얼굴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에게 더 이상의 충격을 주면 안 될 것 같기도 했지만 민준은 그냥 충격을 더 주는 쪽을 택했다.
이왕 받을 충격이면 나눠받지 않고 깔끔하게 한 번에 받아야 한다는 게 그가 갖고 있는 생각 중 하나였다.
민준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네.”
“크헉!”
놀란 박 단장은 소파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듯, 가슴을 부여잡고 덜덜 떨며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깜빡거리고 머리를 좌우로 세게 흔들어도 그가 방금 전 들은 말의 충격이 줄어들지 않았다.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민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그에게 내밀었다.
“물 드세요.”
“으, 응!”
그에게서 잔을 받아든 박 단장은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았다. 찬물을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 전에 그가 듣고 본 것을 요약하자면 민준이 영애와 곧 결혼을 한다는 거였다.
재벌도 아니고, 유명한 정치가 집안 자제도 아니고 그냥 잘 뛰어다니고 잘 먹는 민준이 대통령의 사위가 되는 거였다.
박 단장은 민준이 대통령의 사위가 된다고 생각하니 새삼 그가 달라 보였다.
물컵을 건네주는 몸짓과 그를 바라보는 눈빛,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뭔가 심오한 의미가 깃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럼 넌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됩니까? 내일부터 다시 출근하라면서요.”
“너 그럼 이제 각하를 장…… 장인어른이라고 부르는…… 크흡!”
“물 더 드려요?”
“아니, 결혼 반대 안 해? 네가 영애랑 사귀는 걸로도 모자라 자그마치 결혼을 하겠다고 하는데도 각하께서 순순히 그냥 그러래?”
박 단장은 그가 영애와 별 어려움 없이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물론 두 사람이 옆에서 가까이 지내다가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연애를 한다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결혼이라니, 현실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오늘 저희 상견례합니다, 단장님.”
민준의 말에 박 단장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다가 고개를 들어 확신 어린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에 혈기 왕성한 남녀가 결혼을 서두르는 데에는 분명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바로 1+1이 2가 아니라 3이 된 것 말이다.
“혹시 우리 조카도 부모님 결혼식에 참석하는 거니?”
“그럴 일 없습니다.”
“그럴 일이 아예 없다는 거야, 아니면 방어율이 엄청 뛰어나다는 거야?”
“제가 그걸 대답해야 합니까?”
“아니. 생각해 보니까 별로 안 궁금한 것 같아.”
더 물었다가는 민준이 계급장을 떼고 자신을 한 대 때릴 것 같아, 박 단장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을 이렇게 만만하게 보는 민준이 대통령의 사위가 되면 얼마나 더 만만하게 볼지 잠깐 걱정이 됐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박 단장 자신은 이제부터 대통령의 사위와 막역한 사이인 것이었다. 그의 얼굴이 급 환해졌다.
“참, 너 요즘 백건우 소식 못 들었지? 걔 얼마 전에 안기영한테 다녀왔다고 하던데 혹시 알고 있어?”
“안기영한테요?”
“어. 기영이가 계속 면회를 거절해서 건우가 며칠 동안 끈질기게 기다렸다고 하더라고. 걔네가 그 사건 이후로 아마 지금이 서로 처음 얼굴 본 거지 아마?”
“안기영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괜찮게 지내고 있지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기영이가 건우의 면회를 받아들였다는 건 걔도 마음의 정리를 좀 했다는 게 아니겠어? 솔직히 건우도 기영이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였을 텐데 잘된 일이지 뭐.”
“…….”
백건우가 부득불 기영을 만나려고 했던 건 아마도 동생 서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그는 서연에게 오기 전에 아마 안기영과 매듭을 깨끗이 짓고 싶었을 거였다.
민준도 막연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건우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서연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건우도 이제 결혼해야지. 그 녀석이 언젠가 우리 집에 밤늦게 찾아온 적이 있었거든? 그때 눈치가 누굴 만나는 것 같았는데…… 잘 안 되고 있는지 영 표정이 안 좋더라고.”
“벌써 결혼은 무슨 결혼입니까? 이제 몇 살이나 됐다고요.”
박 단장의 말에 현실로 정신이 돌아온 민준이 탐탁지 않다는 얼굴을 했다. 두 사람이 아무리 서로 좋아한다고 해도 일단 서연이 아직 어렸고 건우와 서로 알고 만난 기간도 너무 짧았다.
“건우가 너보다 두 살 많다는 건 알고 하는 소리지?”
“……복잡하네요.”
“복잡할 게 뭐가 있어?”
“그런 게 있습니다.”
민준이 인상을 작게 구겼다. 만에 하나 백건우가 그의 가족의 범주 안에 들어오게 될 경우, 자신과 그의 관계는 무척 애매해질 게 분명했다.
‘하긴,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버지의 장벽을 넘어야 가능한 일이지.’
그가 그 장벽을 넘는다는 건 만만하지 않을 터였다. 민준은 괜한 걱정을 사서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느긋해 졌다.
“그나저나 너 결혼하고 나면 나 심심해서 어떻게 하냐?”
“제가 결혼을 하는데 단장님이 왜 심심합니까?”
“너 결혼하면 여기 안 있을 거 아니야. 네 장인……어른께서 널 여기에 그냥 놔두시겠어?”
“생각이 너무 고루합니다, 단장님도 나이 드십니까?”
박 단장이 하는 말의 의미를 눈치챈 민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비교적 가깝다고 생각했던 그마저 이런 말을 하다니,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었다.
“그럼,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그마치 영애하고 결혼을 하는 건데 설마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겠어?”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단장님 말씀대로 저는 이제 홀몸이 아니니 술친구는 자주 못 해 드리겠어요. 그러니 앞으로 술 드시고 싶으면 백건우 불러서 같이 드세요.”
민준이 픽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렇게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달라진다고 해도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민준은 설이 그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만 변하지 않는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기승전 ‘야옹이’였다.
“망할 자식, 행복하냐?”
박 단장이 그에게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말은 거칠었지만 민준은 그 투박한 말투에서 자신이 행복하길 바라는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민준은 문득 행복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면 내 행복은 과연 어느 만큼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감정이 끼어들 틈 없이 꽉 찬 그의 마음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랑이든 행복이든 간에 그에겐 완벽한 그 무엇이었다.
“그럼요.”
그는 슬쩍 웃으며 박 단장을 내려다보았다.
**
삼월이 오기까지 채 일주일도 남지 않은, 겨울의 끝자락에 걸린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설의 집 대문 앞에는 커다란 포장이사 트럭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오늘은 바로 그녀가 살고 있는 집으로 민준의 짐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설은 아까부터 민준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그가 책장에 꽂힌 책을 정리하는 모습을 상기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두 사람은 부부가 될 것이고 매일 아침 함께 눈을 뜨고 함께 잠들 터였다. 설은 이제 이 집에서 민준과 함께 살아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만큼 설레지 않는지, 줄곧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설은 실망스런 마음을 감추며 민준의 뒤에서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내가 뭐 도와줄까요?”
“마음은 고맙지만, 책은 내가 직접 정리를 해야 돼. 밖에 나가 있어, 내가 다 되면 부를 테니까.”
그가 고갯짓으로 서재 밖을 가리켰다. 그녀가 서재 겸 연구실로 쓰고 있는 공간은 바깥에 따로 있기 때문에, 침실과 바로 옆에 붙어있는 서재는 앞으로 민준이 사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설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좋아하던 서재를 그가 사용하게 되어 무척 기뻤다.
“그럼 나는 옆방에 뭐 정리할 거 있는지 더 찾아볼까요?”
“옆방? 우리 침실 말이야?”
민준이 웃으며 흘끔 설을 바라보았다. 서재 옆방은 앞으로 두 사람이 함께 사용하게 될 침실이기 때문이었다.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더니 그래도 침실 얘기는 좋은가 봐요?”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이 사용할 침대와 가구가 침실에 새로 들어갔지만 설은 아직 그 방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민준과 함께 쓸 공간이기 때문에 혼자 사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침실 문을 열어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요즘은 이렇게 온통 설이 두근거릴 일투성이였는데, 오늘 민준의 덤덤한 얼굴은 그녀의 두근거림에 찬물을 끼얹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당신이 침실에만 관심을 보이니까 그렇죠.”
“우리가 같이 사용할 방은 어때, 자보니 좋았어?”
“아직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어요. 당신이랑 같이 쓸 방인데 나 혼자 먼저 쓰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말을 하고 보니 대화의 주제가 건전하지 않았다.
“흐음. 무슨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그렇게 빨개지는 거야?”
“나는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내가 옆에 있는데 아무 생각도 안하다니 서운하군.”
민준이 들고 있던 책을 마저 책장에 꽂은 후 설의 손을 붙잡아 그의 왼쪽 가슴에 갖다 댔다.
“얘는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 말이야.”
쿵쿵-
설의 손바닥에, 힘차게 뛰는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요즘 매일 이렇게 내 몸속에서 달리기를 해, 아주 힘들어.”
“매일 이래도 괜찮아요? 너무…… 빨리 뛰는 거 아니에요?”
“그땐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지. 난 강조국을 아주 조금만 사랑한다, 이렇게. 그런데 또 그렇게 생각하면 얘가 아파. 그래서 그냥 이대로 살기로 했어.”
민준이 책상에 기대서서 설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 안에 그가 비쳐 보였다.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당신은 내 사람이 되는 건가.”
“아니요, 당신이 내 사람이 되는 거예요.”
“강조국. 난 당신한테 좋은 남편이 되고 싶어. 나도 결혼이 처음이라 좋은 남편이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나를 생각할 때마다 늘 여기가 든든했으면 좋겠어.”
민준은 왼쪽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그가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처럼, 민준은 설에게 언제나 믿음직하고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다.
“당신을 생각하면 든든하긴 하지만 그래도 난 행복한 게 더 좋아요. 나도 결혼이 처음이라 좋은 아내가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나를 생각할 때마다 늘 여기가 따듯했으면 좋겠어요.”
설이 그의 손등 위로 살며시 손을 겹쳐 얹었다. 그러자 민준이 눈꼬리를 아래로 휘어 내리며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따듯해. 뜨겁기도 하고.”
설은 민준을 처음 봤을 때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짓던 눈웃음 사이로 비치던 쓸쓸함을 기억해 내곤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희미하게 웃을 때마다 시리게 느껴지던 쓸쓸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설이 빙긋 웃음 짓자 민준의 미소가 짙어졌다.
“시간도 남는데 우리 이제 뭐 할까요?”
“뭐가 하고 싶은데? 오늘은 강조국이랑 늦게까지 숨바꼭질도 해줄 수 있어.”
“그럼 나랑 잠깐 어디 나갔다 올래요?”
“어디 가고 싶어?”
“응.”
“어디를?”
“구청이요.”
“응? 구청?”
민준이 눈을 크게 뜨고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설은 잠깐 망설이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이제 결혼하니까.”
“결혼하니까.”
“혼인신고도 할 거잖아요.”
“…….”
“결혼하고 따로 시간 내려면 바쁘니까 아무래도 시간 날 때 해두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잠시 멍한 얼굴로 설을 바라보던 민준이 고개를 젖히며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난 진지한데 왜 웃어요?”
약이 오른 그녀가 씩씩거리며 홱 돌아섰다.
혼자만 발을 동동거리며 기뻐하는 것 같아 서운했던 마음이 마침내 폭발한 거였다.
“너무 좋은데, 아직 실감이 안 나서 그래.”
민준이 설의 등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그는 마음을 아무리 침착하게 먹어도 발이 땅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민준은 며칠 후면 자신이 설과 같은 침대에서 눈을 감고, 그녀의 옆에서 눈을 뜬다는 게 아직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럼 얼른 실감해요. 안 그럼 난 화가 날 것 같으니까요.”
“혼인신고하려면 증인 필요하지 않아?”
“몰라요.”
그는 설을 돌려세워 여전히 뾰로통해 있는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화내지 마. 난 당신이 화내면 무섭다고 했잖아.”
“……증인이 2명 필요한데 아마 우리 엄마아빠는 안 될 거예요. 이름이 너무 유명하잖아요.”
민준을 흘끔 쳐다보며 설이 불퉁한 목소리를 내자 그가 피식 웃었다.
“옷 따듯하게 입고 나와, 얼른 가자.”
그가 아랫입술을 삐죽 앞으로 내민 설의 입술에 입을 맞추자 그녀가 민준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마침내 법적인 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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