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나는 그대의 경호관 (완)2016.11.10.
“안 추워?”
“밖은 좀 쌀쌀한데 물속은 따듯해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온 두 사람은 조금 전 수영복으로 갈아입었고, 지금은 야외에 있는 풀 안에 들어와 있었다.
테라스에 달린 널찍한 풀은 수온을 따듯하게 맞출 수 있게 되어 있었기에 아직 이른 봄인데도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민준이 등 뒤에서 설의 어깨를 감싸자 그녀는 뒤돌아 빙긋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주 보며 웃는 사이사이 두 사람은 입을 맞추었다.
“혹시 사람이 너무 좋아도 죽을 수 있나?”
민준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하며 물었다.
“그렇다고 죽으면 안 돼요. 나랑 같이 오래오래 살아야 해.”
“그러려면 나보다 먼저 야옹이 체력 좀 키우자. 내가 꼭 당신을 괴롭히는 것 같잖아.”
“하지만 그건…… 괴로운 거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요?”
“달라? 어떻게 다른데?”
민준은 낮게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젖은 뺨을 닦아냈다.
야옹이는 어젯밤 늦게까지 야옹거리느라 몹시 고단해 했고,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난밤을 떠올리며 눈을 흘기는 설에게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답 안 해주네.”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테라스에서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푸른 바다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출렁거렸다. 그리고 그의 눈앞엔 물기를 머금은 풀잎처럼 싱그러운 그녀가 있었다.
하늘도 파랬고 바다도 짙은 푸른빛이었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온통 분홍빛이었다.
짧게 반복되던 두 사람의 입맞춤은 곧 깊숙한 키스로 이어졌다.
그의 기세에 밀린 그녀의 상체가 뒤로 점점 기울어지자, 그는 설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물 위로 가볍게 들어올렸다.
허공에 붕 뜬 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빙긋 웃고 있는 민준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내 거 보고 있어.”
“내가 왜 당신 거예요? 난 내 거라고요.”
“혼인신고도 했으니까 절반은 이제 내 거야. 공동 명의 알지? 그러니까 앞으로 당신은 내 동의 없이 다치거나 아프면 안 돼.”
“그럼 이제 당신 절반도 내 거예요?”
“난 그냥 당신이 다 가져.”
그의 입술 끝이 둥그렇게 말려 올라갔다. 그의 양어깨에 손을 짚고 내려다보던 설은 한 손으로 민준의 머리카락과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는 뺨에 닿는 그녀의 손길이 좋아 눈을 감았다.
민준의 뺨을 간질이던 손길이 콧등을 지나 입술에 머물렀다.
“……당신은 나를 만나고 언제가 가장 좋았어요?”
설의 물음에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언제가 가장 좋았을까.
예전에 민준이 그녀에게 언제 자신이 제일 좋았냐고 물었을 때, 설은 그가 돌아왔을 때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걸 기억하고 묻는 것 같진 않았다.
“지금. 난 당신이 내일 물어도 지금이 제일 좋고, 십 년 후에도 지금이 제일 좋다고 대답할 거야.”
민준은 지금처럼 눈앞에서 설이 웃고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했다. 언제 물어도 그의 대답은 변함없었다.
내일도 모레도 또 그 어느 날에도, 그는 설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녀가 그 자신의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 줘서 고맙다고 말할 거였다.
“난…… 당신이랑 결혼해서 정말 좋아요.”
설이 민준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지그시 누르며 웃었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햇빛을 담아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 안엔 아무런 걱정도, 어떤 의구심도 담겨 있지 않았기에 설은 민준의 얼굴이 마치 소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아득하게 깊었지만 투명하게 맑았다.
“추운데 우리 그만 안으로 들어갈까?”
“난 괜찮아요.”
“나는 안 괜찮아.”
민준은 설을 안은 채로 물 밖으로 나왔다. 수온이 따듯하긴 했지만, 오랫동안 밖에 있기엔 아직 쌀쌀한 날씨였다.
하지만 날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신혼여행을 왔다는 사실이었다.
민준은 빌라 밖의 사정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그에겐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만으로도 충분했다.
“밖에 나가고 싶어?”
민준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타월로 닦아주며 물었다. 설이 아까부터 조그맣게 하품을 하고 있었기에 그걸 원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녀가 외출을 원한다면 바닷가를 산책할 생각이었다.
“아니, 조금만 있다 나갈래. 나 졸려서 지금은 좀 잘래요.”
그녀의 사심 없는 대답에 사심 가득한 민준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하였다. 그가 침대에 눕고 싶다는 그녀와 일심이 되었으니 이제 동체만 되면 될 일이었다.
“……응?”
갑자기 설의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곧바로 그녀의 등 뒤에서 시트의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설이 가물거리던 정신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보니 민준이 어느새 그녀를 두 팔로 가둔 채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설이 빨개진 얼굴로 웃으며 그의 눈을 양손으로 가렸다. 순식간에 잠기운이 싹 달아난 그녀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설은 자신의 심장이 그의 눈빛에 익숙해지려면 앞으로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어떻게 쳐다보는데.”
그녀의 손 아래로, 그의 입술이 양쪽으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당장 설의 손을 옆으로 치울 것 같던 민준은 의외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꼭 사냥꾼 같잖아요. 난 당신의 사냥감이 아니야.”
“난 사냥꾼은 아니지만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지.”
그는 눈이 가려진 채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민준의 숨결이 느껴지자 설은 눈을 가렸던 손을 그의 뺨에 얹고, 그의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포개었다.
눈빛으로 흘러나온 그의 사랑이 그녀의 입술로 전해졌다.
**
세 번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민준은 여전히 이따금씩 해외로 출장을 떠났고 설은 이제 울지 않고 담담하게 그녀의 일상을 보내며 그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설은 오전부터 연구실에 내내 틀어박혀 있었다.
그녀는 논문 쓰는 데에 열중하느라 연구실 문이 조용히 열리는 줄도 몰랐다. 어차피 그녀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크게 걱정할 일은 없기도 했다.
누군가 설의 연구실을 들어오려면 그녀의 집 대문을 먼저 통과해야 했고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그녀의 아버지가 집 근처로 이사를 오면서 안 그래도 철저했던 보안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경호와 더불어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집이 전직 대통령의 집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설의 부모님이 그녀의 옆집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었다.
경호관들이 언제나 집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기에 그녀가 대문을 열어놓고 다녀도 그 문을 마음대로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설과 민준의 양가 부모님들과…….
“손들어.”
이렇게, 예고 없이 불쑥 그녀의 등 뒤로 나타나는 한 남자를 제외하곤 말이다.
“이따 들게요. 내가 지금 일하는 중이라 손을 위로 올릴 수가 없어요.”
의자에 앉아 있던 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민준은 설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아 당기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다녀왔어.”
“고생 많았어요. 어디 다친 덴 없죠? 괜찮은 거죠?”
“보다시피 멀쩡해, 당신 거에 흠집 내지 않았으니 안심하라고.”
설은 근심스런 얼굴로 민준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녀가 며칠 만에 보는 민준이었다. 다행히 그는 건강해 보였고 그의 밝은 미소도 그대로였다.
“이건 마당에서 주워온 거야. 흙을 먹고 있길래 내가 데려왔어.”
그제야 설의 시선이 민준의 품에 안긴 아이를 향했다.
민준의 다른 팔에 안겨 있던 민준 주니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헤벌쭉 웃으며 안아달라는 듯 팔을 버둥거렸다. 얼마 뒤면 두 돌이 될,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인 민족이었다.
조금 전, 마당에 철퍼덕 주저앉아 흙을 입가로 가져가던 민족은 아빠를 발견하자 안아달라는 듯 두 팔을 위로 번쩍 올렸다.
민준은 깔끔한 걸 좋아했지만 민족은 아니었다. 그는 흙투성이인 민족의 뺨에 뽀뽀를 하고 그를 안아 들고 들어온 거였다.
김민족, 이게 이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아이의 이름이었다.
얼굴만 봐서는 김 다비드라는 이름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아이였지만, 조국이란 이름을 가진 엄마를 둔 덕에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김민족이 되었다.
이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설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김민준의 ‘민’과 강조국에서 ‘족’이라는 글자를 만든 거라고 말했지만, 설은 아버지의 사탕발림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에게 만약 동생이 있었더라면, 아버지는 성별에 상관없이 민족이란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을 거라는 걸 자라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은 남들과 다른 특이한 이름은 이제 절대 사절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의외로 흔쾌히 민족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
“김민족, 엄마가 흙은 먹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설이 나무라는 목소리로 민족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녀는 나름 꽤 엄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민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뻗었다.
“엄마. 엄마.”
그녀에게 팔을 내밀던 민족이 설의 손이 닿기 전에 갑자기 쑥 위로 올라가 민준의 목 위에 안착했다.
갑자기 높은 곳에 올라가 놀란 민족이 재빨리 민준의 머리카락을 앙증맞은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민준의 어깨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한 본능적 행동이었다.
“아야, 머리카락 말고 손. 이 녀석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게 날 닮았나 봐.”
민준이 그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쥔 민족의 두 손을 옮겨 잡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쪼그만 게 그래도 살겠다고 민첩하게 움켜잡는 게 너무 귀여웠던 것이다.
그가 집을 비운 며칠 사이 민족은 또 훌쩍 자라 있었고, 그 놓쳐 버린 며칠이 아쉬운 민준은 민족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민족은 또래 아이들보다 늦게 걸었고 말도 빠르지 않았다. 이런 경우 보통 다른 부모들은 아이가 또래에 뒤처진 것 같다며 실망한다는데 설과 민준은 오히려 기뻐했다.
행동 발달 속도에 비해 민족의 키와 몸무게, 발육 상태는 아주 훌륭하다는 건 또 그것대로 흐뭇했다.
두 사람은 민족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당신 닮은 게 맞아요, 난 적어도 흙을 먹진 않았다고요. 그래도 하루 종일 노는 걸 보면 신기해, 체력은 정말 당신을 닮았나 봐.”
민족은 마당에서 노는 걸 좋아했고 그녀가 연구실로 데려오면 장난감을 가지고 얌전히 노는 게 아니라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래서 민족은 깨끗이 씻겨 놓아도 언제 깨끗했냐는 듯 금방 이렇게 먼지투성이가 되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셨대. 나 씻고 나면 같이 건너가자.”
“지금 오셨다고요? 하지만 엄마는 나한테 별말씀 없으셨는데요?”
“우리랑 상관없이 가끔 들르시잖아. 아버지께서 오늘 장인어른하고 약주 드시기로 하셨나 봐.”
김 국장 내외는 민족이 태어난 이후 종종 초대를 받고 평창동을 방문하곤 했다. 하지만 목적지는 설과 민준의 집이 아니라 옆집, 대통령 사저였다.
불편한 사돈 관계였던 대통령과 김 국장은 대통령이 퇴임한 이후, 그리고 민족이 태어난 이후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민족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면 두 사람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민족이 양가에 태어난 첫 손주이니만큼 그 마음이 각별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엄마! 아빠! 맘마.”
“응? 이 녀석 배고픈가 보네.”
민족이 어깨 위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몸을 들썩이자 민준은 아이를 어깨 위에서 내려 앞으로 안아 들었다.
“김민족, 배고파?”
“아빠! 맘마.”
“이 녀석은 언제 커서 아빠랑 짜장면 먹으러 가나?”
그는 민족의 영롱한 눈을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민족이 민준의 얼굴에 고사리 같은 손을 올리고 함박웃음을 짓자 그는 아이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민준은 살짝 깨물었는데도 아팠는지 민족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또 사랑스러워 그는 아이를 품에 안고 어르며 등을 토닥였다.
“민족이 이리 줘요, 당신 피곤하잖아.”
“하나도 안 피곤해. 나는 민족이랑 같이 씻고 나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오늘은 애랑 욕실에서 놀지 말고 금방 나와야 돼요, 알았죠?”
민준이 민족을 데리고 한번 욕실에 들어갔다 하면 늘 함흥차사였다. 그가 얼마나 신나게 놀아주는지, 민족은 욕실에서 나오기만 하면 금방 잠에 곯아떨어지곤 했다.
“노는 게 아니라 운동하는 거야. 이 녀석 날 닮아서 운동에 소질 있어. 크면 운동선수 시킬까 봐.”
민준은 민족을 안은 채 설의 손을 잡고 연구실 문을 나섰다.
서쪽으로 해가 기울어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따듯한 봄바람에 실려 온 풀 향기는 싱그러웠다. 고개를 돌려 보면 설이 있었고 품 안엔 민족이 있었다.
모든 행복이 그의 손안에 완전체로 머물러 있었다.
“나 당신한테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궁금해하지 마요.”
“그럼 물어보는 건 괜찮지?”
“물어보지도 말고요.”
설이 현관문을 열며 민준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그녀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할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민족이 나한테 진지하게 부탁했어.”
“엄마, 아빠, 맘마라는 말 밖에 모르는 애가 당신한테 부탁을 했다고요?”
“응, 정말이야. 당장 여동생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우유를 끊고 단식투쟁을 하겠대.”
민준은 줄곧 설을 닮은 딸을 갖고 싶어 했다. 그녀도 그런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민족이 어려 지금까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민족이 우유 끊은 지 오래됐어요.”
“……그랬던가?”
“밥을 어른처럼 먹잖아요. 식성은 확실히 당신 닮았나 봐, 애가 못 먹는 것도 없이 어쩜 그렇게 입에 들어가는 건 다 먹는 건지.”
“…….”
설은 시무룩한 민준을 보며 피식 웃더니 마지못해 말을 덧붙였다.
“민족이 말문이라도 제대로 트이면 그때 생각해 볼게요.”
민족이 제대로 말을 하려면 앞으로 최소한 몇 개월은 더 지나야 했다. 적어도 그때까진 그가 그녀를 조르지 않을 테니 얼마만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김민족, 오늘부터 아빠랑 말하기 연습하자. 네가 말을 잘해야 엄마가 동생을 만들어준대. 아주 예쁜 동생일 거야, 너도 보면 깜짝 놀랄걸?”
민준은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민족이 아빠를 따라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면 정말 두 사람이 대화라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빠가 옷 가져올 테니까 여기 잠깐 있어, 알았지?”
민준은 아이를 잠깐 바닥에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설마저 주방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민족은 잠깐 혼자가 되었다.
“……동생? 아주, 예쁜, 동생.”
민족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을 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
**
두 사람이 옆집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다시 돌아온 시간은 제법 늦은 밤이었다.
목욕을 한 뒤 밥을 먹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던 민족은 마침내 고개를 툭 떨구며 잠이 들었고, 그제야 민준과 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민준의 부모님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계셨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민족을 아기 침대에 눕혀 재운 뒤, 두 사람은 맥주를 들고 2층으로 올라왔다.
2층 테라스에는 두 사람이 넉넉하게 앉고도 남는 길쭉한 그네가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민준이 설치해 놓은 그네였다.
“하아, 피곤해. 앗 차거!”
설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민준이 그녀의 뺨에 차가운 맥주 캔을 갖다 댔다. 그는 눈을 흘기는 그녀에게 캔 꼭지를 딴 맥주를 건네며 웃었다.
이 시간은 하루 중 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좋다.”
민준은 그녀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우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깜깜한 밤하늘엔 별이 반짝이고 있었고 설에게선 그가 좋아하는 그녀만의 향기가 났다.
민준이 그녀와 결혼을 하고 난 뒤 서로에게 익숙한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갔지만, 그는 설과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매 순간 감사했다.
“당신은 언제가 가장 좋아요?”
“지금.”
민준은 여전히 ‘지금’이 제일 행복하고 좋았다.
그녀는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 이렇게 그에게 같은 질문을 했고, 늘 똑같은 대답을 들으며 싱그럽게 웃곤 했다.
“민족이 안 깨겠죠? 진짜 이름이 민족이 뭐야. 나중에 개명해 달라고 하면 난 걔의 의사를 존중해 줄 거예요.”
“난 민족이란 이름이 좋은데 왜 그래? 한복이 아주 잘 어울릴 이름이야.”
“당신은 특이한 이름으로 안 살아봐서 그래. 그게 얼마나 놀리기 쉬운 이름인 줄 알아요?”
두 사람은 흔들거리는 그네 위에서 아옹다옹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 어렸을 때 배웠던 국기에 대한 맹세 있잖아. 지금은 바뀌었지만 난 아직도 그게 더 익숙하거든. 그래서 난 민족이란 이름이 좋더라고.”
“응? 국기에 대한 맹세요?”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혹시 당신은 모르나?”
민준이 설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밤하늘의 달처럼 환한 미소로 주변의 어둠을 밝히고 있는 것 같았다.
“……알아요.”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민준은 그의 입술에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는 걸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는 언제나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행복’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태극기 앞에 맹세합니다.’
민준은 그녀의, 영원한 경호관이었다.
-본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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