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91화 (에필로그 1) (91/94)

[에필로그 1] 휘-홀릭(holic)2016.11.15.

“휘야, 넌 언제 나랑 놀 거야?”

민족은 아기 침대 난간에 매달려, 새근새근 잠든 동생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름다울 휘.’

김 휘, 민족의 여동생 이름은 외자인 휘였다.

아빠는 민족이 오빠기 때문에 이름이 두 글자이고 휘는 동생이기 때문에 한 글자라고 말했지만, 민족은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엄마를 만나러 간 병원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휘의 이름을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몇 번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동생의 이름을 결정한 건 민족의 아빠였다.

민족이 아빠의 팔에 안겨 유리벽 너머 동생의 얼굴을 처음 보던 날, 아빠의 입술이 놀라움으로 살짝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표정은 아빠가 가끔 며칠 동안 출장을 다녀온 뒤에 엄마를 바라보는 표정과 같았다.

아빠는 무언가에 홀린 듯했고, 그날부터 바로 동생을 ‘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김민족.”

“아빠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민족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요즘 많이 바빴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오늘따라 하필 멀리 외출을 하셨다.

민족은 엄마의 연구실에서 놀고 싶었지만, 그가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걸 엄마한테 들킨 이후부터 그곳은 민족 출입 금지였다.

“아빠!”

민족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민준의 품에 덥석 안겼고, 그는 민족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활짝 웃었다.

그가 퇴근을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민족은 그저 아빠가 일찍 왔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하고 있었다.

“잘 놀고 있었어? 휘는, 자?”

“휘는 계속 잠만 자요, 아빠.”

“그랬어? 민족이 혼자 많이 심심했겠구나?”

민준은 웃으며 민족을 한쪽 팔로 받쳐 안고 휘의 방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후 진압 작전에 들어가야 했고, 그전에 잠깐 집을 들른 거였다.

방문을 조용히 열어보니 방 안은 고요했고 휘의 작은 숨소리만이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아기 침대에 잠든 휘를 바라보며 민준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그가 처음 휘를 보았을 때, 머릿속에 ‘아름답다’라는 단어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은 아직도 휘를 볼 때마다 이렇게 작고 예쁜 생명체가 어디에서 왔을까 싶어 신기하기만 했다.

“……안녕?”

잠이 깬 휘가 짙은 속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크고 새카만 눈동자가 민준을 응시하자 그가 빙긋 웃었다.

민준은 민족을 잠시 내려놓고 휘를 침대에서 꺼내 가슴에 안았다.

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이 아래로 휘어졌다.

“김민족, 우리 엄마 마중 나갈까?”

민준은 휘를 안은 채로 민족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조금 있다가 바로 출발해야 했다. 몇 분이라도 더 설을 보기 위해, 민준은 민족과 휘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왔다.

“아빠, 밤에 또 회사 가요?”

눈치 빠른 민족이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아빠가 평소보다 일찍 온 날은 조금 있다 다시 나가기 위함이었다.

민족은 아빠가 일찍 왔다는 것만 좋아하다 그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응, 아빤 회사 갔다가 내일 올 거야.”

“힝, 싫은데.”

“대신 내일 아빠랑 어디 놀러 갈까?”

“그럼 내일 중국집 가요, 나 왕할머니 짜장면 먹고 싶어요.”

“……그래, 그러자. 엄마랑 휘도 같이.”

민준은 벤치에 앉아 민족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고, 그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휘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나랑 휘도 같이 뭘 하려는 건데요?”

“엄마!”

때마침 설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민준의 옆에 앉아 있던 민족이 총알처럼 빠르게 뛰쳐나갔다.

“아빠가 내일 엄마랑 휘랑 같이 왕할머니 짜장면 먹으러 간다고 했어요.”

“그랬어? 민족인 정말 좋겠네.”

“당신 못 보고 가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다행히 시간이 맞았네.”

“어차피 내일이면 볼 건데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하며 민족의 손을 잡고 민준 옆에 앉았다.

설은 민준이 집에 일찍 온 걸 보고 그가 곧 어려운 작전에 투입될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자신을 두고 어디 가지 말라고 눈물 흘리던 설은 이제 울지 않았다.

그를 걱정하는 마음은 예전과 같았지만, 그녀는 이제 자신의 감정보다 가족을 두고 가는 사람의 마음을 더 많이 헤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내일 점심때 어쩌면 좀 늦을 수도 있는데 아예 거기에서 만날까?”

“아니요, 당신 오면 같이 갈래요. 안 그래도 할머니께서 민족이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잘됐네요, 나도 할머니 뵙고 싶고요.”

“아직도 요리를 하시다니, 그 연세에 정말 정정하시단 말이야.”

“할머니는 왠지 100살까지 사실 것 같지 않아요?”

“그때에도 요리하고 계실 것 같긴 해.”

민준은 설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웃었다.

“휘 조금 전에 깼어.”

“알았어요.”

갈 시간이 다 된 민준이 벤치에서 일어나 설에게 휘를 건네주었다.

그는 그녀의 품에 폭 안긴 휘의 뺨을 가볍게 꼬집은 후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민족과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 보았다.

“아빠 일 잘하고 내일 올게.”

“응.”

민족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늦게까지 놀지 말고 일찍 자야 돼, 알았지?”

“응!”

“좋아.”

민준은 흡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에너지를 받으니 충전이 100% 완료되었다.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와요.”

그녀와의 짧은 입맞춤을 마지막으로 그는 대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 오늘은 그전과 달리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수십 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친아버지를 잃은 것이 꼭 지금 민족의 나이만 했을 때였다.

그때 아버지는 민준에게 미안한 듯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그는 오늘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자신은 아버지와 다르게 내일 돌아와 민족과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

다음 날이 되었다. 오전은 훌쩍 지나서, 어느새 정오를 한참 넘긴 시각이었다.

민족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대문을 들락날락거렸다.

대문을 열고 나가면 집을 지키고 서 있는 아저씨들과 눈이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민족은 실망하는 얼굴로 아저씨들에게 배꼽 인사를 한 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아빠한테 전화 왔어요?”

“아빠 일이 늦게 끝나나 봐. 안 되겠다, 민족인 먼저 밥 먹자.”

“왕할머니 짜장면은요?”

시무룩한 민족이 울먹거렸다.

아빠가 오면 엄마랑 휘랑 네 명이서 왕할머니한테 간다고 했는데, 엄마가 밥을 먹자고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거긴 다음에 가도 돼, 손 씻고 식탁으로 올래?”

설은 주방으로 들어가 민족이 먹을 점심을 차리기 시작했다.

냉장고 문을 여는 그녀의 손길이 아래로 힘없이 미끄러졌다. 민준에게 안 좋은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꾸만 기운이 빠졌다.

“배 안 고파요. 아빠 오면 같이 먹을래요.”

“민족이가 밥도 안 먹고 기다린 걸 알게 되면 아빠가 속상해할 텐데?”

“그래도 기다릴 거예요. 엄마, 나 외할아버지 집에 놀러 가도 돼요?”

“그래, 대신 조금만 있다 와야 돼.”

“네!”

민족은 씩씩하게 대답을 한 뒤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엄마한텐 외할아버지 집에 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대문 앞에서 아빠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민족아, 여기에서 뭐하는 거야?”

집 앞에 서 있던 아저씨 두 명이 대문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선 민족에게 알은체를 해왔다.

“아빠 기다리는 거예요.”

“집에 들어가서 기다리지그래? 밖에 오래 서 있으면 다리 아파요.”

“괜찮아요, 다리 하나도 안 아파요.”

민족은 짙은 회색 담벼락에 뒷짐을 지고 서서, 벽에 등을 통통 부딪치며 대답했다.

“예쁜 동생은 지금 자고 있어?”

“휘 말이에요?”

“그래 휘, 예쁜 공주님 말이야. 민족이 글씨 쓸 줄 알아? 동생 이름도 쓸 수 있어?”

“네, 쓸 수 있어요.”

민족은 고개를 크게 끄덕인 후 곧바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주변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손에 들고 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휘, 아름다울 휘예요.”

한글이 아닌 한자를 말이다.

“우와, 민족이 한자도 쓸 줄 알아?”

경호관들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옛날에 한 번, 아빠가 종이에 쓰는 걸 봤어요.”

“옛날에 한 번?”

“네, 휘가 태어났을 때요.”

민족의 대답에 경호관들은 역시 그럴 리가 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아이의 과장된 말을 잠시 믿었던 자신들이 우스웠다.

“그럼 다른 글자도 쓸 수 있어?”

“네, 쓸 수도 있고 읽을 수도 있어요.”

“와, 민족이 되게 똑똑하구나. 한자도 읽을 수 있고 말이야.”

“엄마 글자 빼고는 다 읽을 수 있어요.”

“엄마 글자?”

“네, 엄마 글자요. 근데 그것도 조금만 더 보면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엄마가 못 보게 해요.”

경호관들이 하하하 소리 내 웃었다.

어차피 그들에겐 다섯 살짜리 꼬마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그저 민족이 어린아이답게 귀여운 말을 한다고 생각을 할 뿐이었다.

민족이 말하는 엄마 글자라는 것이, 설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라는 걸 그들이 알 리 없었다.

“민족이 점심 먹었어? 밥 먹고 나온 거야?”

“아니요? 아빠 오면 같이 짜장면 먹으러 갈 거예요, 엄마랑 휘도 같이 갈 거예요.”

민족의 말에 경호관 한 명이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제 와 점심을 먹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배가 꽤 고플 것 같은데, 민족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그런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 내가 그림 그려줄까요?”

“그림? 그래, 무슨 그림을 그려줄 건데?”

“우리 동네 그림이요.”

민족은 그들의 물음에 대답을 하면서도 간간히 고개를 들어 골목 어귀를 쳐다보았다.

“여기가 우리 집이고요, 이건 할아버지 집이에요. 그리고 오른쪽에는 집이 두 개, 왼쪽에는 집이 세 개 있어요. 여기로 가면 아파트가 열두 개 있고요, 이쪽으로 가면 학교가 두 개 있어요. 그리고 이쪽으로 가면…….”

재잘거리는 민족의 말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누군가 민족의 말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쭈그리고 앉아서 아스팔트 위에 서울 시내 지도를 다 그렸을지도 몰랐다.

“김민족, 거기서 뭐 해.”

“아빠!”

민족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더니 돌멩이를 미련 없이 멀리 던져 버리고 아빠에게로 달려갔다.

민준이 자동차에서 내려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걸음에 달려간 민족은 곧바로 그의 다리에 매달리며 어리광을 부렸다.

“히잉. 아빠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미안, 많이 기다렸어?”

“응! 아까 아까부터 기다렸어요.”

조금 전까지 눈을 반짝이며 지도를 그리던 민족은 어느새 다섯 살짜리 아이로 돌아가 있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민준은 경호관들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후 민족을 안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하필 오늘따라 핸드폰도 말썽이어서, 민준은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마음이 조급했다.

설이 그를 걱정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민준은 오랜만에 도로 위에서 자동차 레이싱을 했다. 그녀가 알게 되면 그를 무척 혼낼 테지만 말이다.

“엄마! 엄마! 아빠 왔어요!”

현관문을 열자마자 민족의 목소리가 온 집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를 들은 설이 휘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그녀는 민준과 눈을 마주치자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민준은 민족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민족이 혼자 옷 입을 수 있지? 가서 옷 갈아입고 나올까?”

“네!”

민족은 아빠의 품에서 내려와 2층으로 신나게 달려 올라갔다.

“강조국 씨는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민준이 웃으며 두 팔을 벌리자 설은 피식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가 혼자일 땐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족이 태어나고, 휘가 태어나자 많은 게 달라졌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의 사랑과 기쁨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슬픔, 그리움, 기다림의 감정 같은 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그래요. 민족이 쟤는 왕할머니한테 간다고 아직 점심도 안 먹었다고요.”

“핸드폰이 고장 나서 전화를 못 했어, 미안해.”

민준은 설을 안고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그를 생각하며 매일매일 울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면서 눈물짓던 설은 결혼과 동시에 자취를 감추었다.

감춘다고 그 마음이 사라지진 않았을 텐데.

그녀는 엄마가 된 이후 더 이상 민준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랬군요, 어쩐지 연락이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많이 걱정했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강조국.”

그가 설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젠 내가 당신을 두고 멀리 출장 갈 일은 없을 거야.”

“응? 그게 정말이에요? 왜요?”

조금 전까지 근심 가득했던 설의 얼굴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내가 사방팔방 뛰어다니기엔 이제 연식이 좀 됐잖아. 곧 하는 일이 바뀔 거야.”

민준의 승진과 함께 그의 직무가 변경될 예정이었다.

사실 결혼과 동시에 부서를 옮기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그때 민준은 자신이 단지 대통령의 사위가 되었다는 이유로 직무를 변경할 순 없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가 아니어도 든든한 후배들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오랫동안 현장에 있었기에 작전을 짜고 현장을 지휘하는 데에 누구보다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내가…… 좋아해도 되는 일인 거죠?”

“물론이야.”

설은 기쁜 마음에 민준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나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해서 미안하지만…… 당신의 결정이 나 때문이라고 해도 난 그냥 좋아할래요.”

“당신 때문이 아니야, 내가 원한 일이지.”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진압 요원으로 좀 더 있겠다고 말을 할까 망설이는 마음도 없진 않았다.

민준은 현장에서 뛰는 걸 좋아했고 또 자신이 대통령의 사위이기 때문에 힘든 일을 피한다는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어제 문득 자신은 ‘지금’이 행복하지만 과연 설도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설은 민준을 만나고 난 후 그가 돌아왔을 때가 가장 좋았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 지금도 그녀의 마음이 그때와 같다면, 민준은 조국과 민족의 행복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을 해놓고도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결심에 마침표를 찍은 건 민족이었다.

조금 전 그를 기다리며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민족을 보는 순간 민준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민족의 마음이 어땠을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민족이 통통통통 계단을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나 혼자서 옷 다 입었어요!”

민준이 자랑스럽게 양팔을 벌리고 선 민족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온 민족의 셔츠 단추가 한 칸씩 아래로 밀려 있었다.

“아주 잘했어, 꽤…… 독특한 패션이긴 하지만.”

그는 웃으며 민족의 단추를 다시 바르게 잠가주었다.

“휘는 자?”

“응, 조금 전에 잠들었어요.”

“미인은 잠꾸러기라더니, 애가 아주 FM이야.”

픽 웃으며 담담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민준은 속으로 휘가 너무 보고 싶었다.

고작 하루 못 봤을 뿐인데 그는 그 시간이 마치 수십 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자, 다 됐다. 그럼 이제 휘를 깨우러 가볼까? 깨워서 왕할머니한테 가야지.”

“아빠, 휘도 짜장면 먹을 수 있어요?”

“아직 못 먹기도 하지만, 아빠 생각엔 휘와 짜장면은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그가 생각하기에 휘는 짜장면이 아니라 하얀 크림치즈나 생크림 케이크가 더 어울렸다.

눈처럼 하얀 얼굴에 앵두처럼 빨간 입술, 이 세상에 만약 투명한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휘가 분명할 터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휘가 먼 훗날 ‘내 짜장면에 손대기만 해 봐, 저승을 경험하게 해줄 테니까.’라는 말을 거침없이 입에 담게 되리라는 걸 지금의 민준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외할머니가 휘는 원래 천사였는데 날개를 깜빡 잊고 하늘에 두고 왔다고 했어요.”

“맞아, 안 그래도 아빠가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그동안 워낙 바빠서 못 갔어.”

딸깍, 소리와 함께 휘의 방문이 열렸다. 그는 민족의 손을 잡고 휘의 침대에 다가갔다.

“휘.”

민준이 휘의 이름을 부르며 잠든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잠이 깬 휘가 인상을 찡그리자 그는 그녀를 어깨에 기대게 한 채 능숙하게 등을 토닥였다.

휘를 안으면 세상에 있는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방금 전 그가 민족에게 한 말은 농담이었지만, 민준은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천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휘는 엄마처럼 자라서…….”

휘는 분명 조국처럼 자랄 터였다. 그걸 상상하자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휘가 자라 조국처럼 된다는 생각에 뿌듯했던 마음도 잠시, 이렇게 예쁜 휘 옆에 어떤 시커먼 놈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자 민준은 기분이 급속히 나빠졌다.

“엄마처럼 자라서…… 그냥 엄마하고 아빠하고만 살자.”

민준은 협상 따윈 없다는 듯 냉담하게 딱 잘라 말했다.

일명 휘 홀릭, 이때가 바로 설이 그를 휘-홀릭(holic)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시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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