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4] 사랑은 늘 현재진행형2016.11.24.
하늘에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맑은 날이었다.
민준은 아침 일찍 일어나 침실 창문 커튼을 옆으로 젖히고 창을 통해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이 침실 깊숙한 곳까지 비추자 눈이 부셨던 설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가 일어나는 기척을 느낀 그는 뒤돌아 설에게 다가왔다.
“깼어?”
“응. 그렇지만 일어나진 않을래.”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다시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민준은 픽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아 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젯밤, 아침에 일찍 깨워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에게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민준은 설을 깨우기 위해 그녀의 보드라운 어깨를 엄지로 쓸었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했잖아. 나한테 깨워 달라고 해놓고 잊어버린 거야?”
“……난 잊지 않았어요, 그런데 내 몸은 잊었나 봐.”
“그럼 내가 깨워줘야겠네, 난 야옹이를 깨우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
그는 시트를 옆으로 젖힌 후 설의 등과 무릎에 팔을 받쳐 안아 올렸다.
민준이 그녀를 이렇게 안아 들면 설은 눈을 감은 채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피식 웃었다.
민준은 그의 가슴을 간질이는 그 웃음이 좋아 가끔 이렇게 그녀를 안아 욕실로 데려가곤 했다.
결혼을 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민준과 설은 항상 서로를 염려했고, 둘의 사랑은 여전히 견고했다.
서로 사랑하고 걱정하고 고마워하고 행복하기에도 모자란 시간들에, 다른 감정이 끼어들 틈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민족이랑 휘는?”
“민족인 정원에서 달리기 연습 중이고 휘는 아직 자, 오늘도 여전히 예쁘고.”
“조국은요?”
“내 조국은 오늘도 안녕하지. 아직 잠이 덜 깬 것만 빼곤 말이야.”
“치, 일어났잖아.”
그녀가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며 입술을 삐죽거리자 낮게 웃음 짓는 민준의 입술이 설의 입술에 가볍게 와 닿았다.
“잠꾸러기 야옹이.”
“아니야.”
두 사람의 사랑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었다.
**
운동장 위의 하늘을 길게 가로질러 걸린 만국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오늘은 여덟 살이 된 민족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민족이 오늘 아침 일찍부터 경호관 삼촌들과 함께 달리기 연습을 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너무 열심히 하진 말아요, 내 말 무슨 소린지 알죠?”
“시합인데 그런 게 어디 있어?”
트레이닝복을 입은 민준은 운동장 한쪽에서 몸을 풀었고, 설은 그런 그를 못마땅해하며 인상을 썼다.
아이의 초등학교 운동회일 뿐인데 민준은 마치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처럼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민족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운동회니만큼 운동회에 대한 관심은 그들 부부로 그치지 않았다.
운동장 한쪽에 마련된 학부모 대기석엔 김 국장 내외와 전 대통령 내외가 들뜬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분위기를 고려해 사복 차림을 한 경호관들은 그들 뒤에 빙 두르듯 서서 민족에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민준은 선 채로 발목 스트레칭을 했다. 조금 뒤 열릴, 아빠들의 장애물 달리기 경기 때문이었다.
설은 그에게 너무 튀지 않게 살살 하라고 당부했지만, 민준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민족이 생각도 좀 해줘요. 안 그래도 지금 우리 부모님 때문에 사람들 쳐다보는 거 안 보여요?”
그녀는 고갯짓으로 학부모 대기석 쪽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주변의 시선은 온통 설의 부모님이 있는 방향을 향해 몰려 있었다.
강현석 전 대통령과 이미연 전 영부인의, 외손자 운동회 참석 때문이었다.
대통령 뒤로 반원을 그리며 서 있는 경호관들 역시 시선을 끄는 데 한몫했다.
그들은 나름 동네 이모나 삼촌들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긴 했지만 행동과 표정을 보면 누가 봐도 경호관이었다.
운동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며 서로 귓속말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준이 만약 경기에 최선을 다하기라도 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설은 불을 보듯 훤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잖아.”
“피할 수 있는데 왜 즐겨야 해요?”
“내가 즐거우니까 그렇지. 그리고 당신은 나 뛰는 거 한 번도 못 봤잖아. 당신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1등 선물이 액자래요. 뭐, 가족사진 끼워놓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타다 줄게, 기다려.”
“그래도 살살 해요, 너무 열심히 하진 말고요.”
“알았어!”
민준은 활짝 웃으며 발걸음도 상쾌하게 멀어져 갔다.
설은 피식 웃으며 대기석으로 돌아가 그녀의 부모님 옆에 앉았다.
전 영부인은 안사돈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김 국장은 바깥사돈의 무릎에 앉아 있는 휘에게 이리 오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인형 같은 손녀를 안아 보려는, 간절함이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며 설은 빙긋 웃었다.
잠시 후 출발선에 아빠들이 일렬로 섰다. 민준은 남자들 중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단연 눈에 띄었다.
그는 아이 아빠가 아니라 젊고 잘생긴 운동선수 같았다.
“아빠 대신 삼촌이 뛰어도 괜찮나? 저기 저 사람은 아무리 봐도 삼촌 같은데?”
“누가 뛰면 어때? 잘생기면 그만이지. 덕분에 우린 눈 호강하고 좋잖아, 호호호.”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민준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소곤거렸다.
그들은 그가 누군가의 아빠이거나 남편이라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들리자 출발선에 서 있던 남자들은 일제히 앞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맨 앞에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여유 있게 달리는 민준의 얼굴이 보이자 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는 그녀의 가슴이 새삼 두근거릴 정도로 멋있었다.
“어머!”
“어머머!”
설은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탄성을 지르는 걸 보며 발그레해진 얼굴을 가라앉혔다.
민준은 물 흐르듯 매끄럽게 달리며 여러 개의 장애물을 빠르게 통과했고, 다른 사람들은 절반도 통과하지 못했을 때 이미 결승선에 도착해 달려 나온 민족을 팔에 안고 웃고 있었다.
“아빠, 아빠가 일등이에요!”
“아빠 오늘 천천히 뛴 거야, 너무 빨리 달리면 민족이가 아빠 안 보일까 봐.”
그는 자신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는 민족을 바라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대기석의 설과 눈을 마주치고 손을 크게 흔들며 웃었다.
손등에 1이라고 적힌 숫자 도장까지 받은 민준은 민족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낸 후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왔다.
“넌 양심도 없냐?”
김 국장은 민준을 힐끗 쳐다보며 비난조로 말했다.
그는 의욕이 사라진 얼굴로 대기석에 돌아오는 남자들을 보니 왠지 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재밌잖아요. 그리고 아빠 경기인데 당연히 제가 나가야죠.”
“아빠 말고도 가족 아무나 참가해도 된다는데, 그럼 다음 경기는 내가 나가도 되나?”
“30대랑 같이 뛰시게요?”
“뭐 어때, 이기기만 하면 되지.”
“아버진 양심도 없고 자비도 없으십니다, 그럼 같이 뛴 사람들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족이면 고모부도 됩니까?”
민준과 김 국장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건우가 아이의 손을 잡고, 서연과 함께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어이구, 우리 태민이 왔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 국장이 황급히 손자에게 달려갔다. 그는 태민이를 허공에 붕 띄우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서연이 김 국장의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어서 그런지, 서연의 아들 태민이는 유난히 그들 내외를 잘 따랐다.
민족과 휘가 옆집에 사는 전 대통령 내외를 더 잘 따르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우리 태민이 유치원도 안 보내고 말이야.”
“할아버지 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어요.”
“어이구, 우리 태민이가 그랬어요?”
서연은 김 국장을 향해 못 말린다는 듯 눈을 흘기며 웃었다.
서연은 태민이를 끔찍하게 여기는 그녀의 아버지가 아직도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서연 씨가 민족이 운동회 하는 거 보고 싶다고 해서, 겸사겸사해서 왔어요. 그런데 아버님, 저거 가족이면 누구나 나갈 수 있는 겁니까?”
건우는 운동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운동장 곳곳에 설치된 장애물을 보자 몸이 근질거렸던 것이다.
서연에게 다른 의미로도 건강한 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하지 말아요, 괜히 나섰다가 건우 씨 다치면 어쩌려고요.”
“그럼 하지 말까요, 서연 씨?”
“힝. 외삼촌은 달리기 잘하는데 아빠는 달리기 못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태민아! 아빠는 외삼촌보다 훨씬 더 잘해!”
불타오르는 건우의 의지에 태민이가 기름을 통째로 쏟아부었다.
그는 태민이의 시무룩한 얼굴에 바로 재킷을 벗어 서연에게 건넸다.
회사에 출근했다 오는 바람에 옷을 갈아입고 나올 시간이 없어서 양복 차림이었지만, 이 정도는 상관없었다.
“건우 씨, 양복 입고 뛰게요?”
“괜찮아요. 이 정도 핸디캡은 있어야죠.”
“건우 씨가 왜 핸디캡을 가져야 하는데요?”
“난 양심 있는 사람이거든요.”
건우는 민준과 김 국장을 슬쩍 쳐다보며 웃었다. 이런 설렘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는 그의 눈빛이 마치 먹잇감을 코앞에 둔 맹수의 눈빛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이어지는 경기에 민족의 고모부 자격으로 참가한 건우는 몸에 꼭 맞는 양복을 입고도 결승선을 1등으로 통과했다.
심지어 그는 결승선에 와서 숨이 차 나동그라지는 다른 출전자들과 달리, 호흡이 조금도 거칠어지지 않았다.
“태민아, 아빠도 1등!”
“우리 아빠 최고!”
그는 아들 앞에 달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등에 적힌 숫자 1을 보여주며 웃었다.
그러자 김 국장의 무릎에 앉은 태민은 온몸을 들썩이며 기뻐했다.
“실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일반인들 이긴 게 그렇게 좋냐?”
“형님은 아니지만 저는 일반인입니다, 아버님.”
건우는 민준이 건네준 스포츠음료 뚜껑을 따며 그의 옆에 앉았다.
나이는 자신이 두 살 더 많았지만, 민준이 서연의 오빠기 때문에 그는 민준을 형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결혼 전엔 종종 말을 짧게 하던 민준이 건우가 결혼을 하자 오히려 그에게 존대를 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나는 그냥 설렁설렁 뛰었는데 매제는 전력 질주하데요?”
“무슨 소리, 난 달린 게 아니라 걸은 겁니다. 그나저나 휘는 어디에 있습니까?”
건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두리번거리며 휘를 찾았다.
그러자 민준이 뿌듯한 얼굴로 휘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장인어른 무릎에 앉아 있습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보니 휘는 전 대통령의 무릎에 앉아 할아버지의 귀에 끊임없이 뭐라 속삭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니 손녀인 휘가 원하기만 한다면 마치 나라라도 사줄 기세였다.
“나도 곧 딸을 낳을 겁니다.”
건우는 부러운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도 휘 같은 딸을 낳고 싶었지만, 현실은 사내아이 두 명이었다.
아쉬운 얼굴로 시선을 돌리던 건우는 서연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잠든 둘째 아들을 바라보며 금세 흐뭇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휘가 예쁘다고 해도 자신의 분신인 두 아들보다 귀하고 예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 휘 같은 딸을 낳는다는 게 쉽진 않을 텐데요, 셋째가 또 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말이 너무 심하네요.”
두 사람은 퉁명스럽게 말을 주고받았지만,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으며 음료수를 마셨다.
“참, 박 국장님과 함께 이번 파티에 참석한다고 들었는데요.”
“참석은 무슨, 그냥 일하러 가는 거지요. 그나저나 Pakin 정보력도 대단합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겨우 이 정도에 무슨 정보력씩이나요, 그냥 국장님께 술 한 잔 사드린 것뿐인데요.”
“국장님은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드시는 건지, 쯧.”
다음 달 서울에선 남북회담이 열릴 예정이었다.
남한에 항상 삐딱하게 나오던 북한이 언제부턴가 남한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게 된 이유가 있었지만, 양측 누구도 그 이유를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 비밀을 유지하는 데에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갔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는 쪽을 택했다.
“지금은 아니어도 언젠간 역사로 기록이 되겠죠? 그럼 위인전이 나올 수도 있겠네요, 안 그렇습니까?”
건우의 질문은 주어는 빠졌지만 설의 이야기였다.
이인호 박사의 연구는 그녀가 결혼을 할 무렵 완성되었고, 이 세상에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땐 Pakin그룹에서 권장 도서로 많이 사주십시오.”
민준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장 장인어른에게 다가가 휘를 건네받은 후 딸을 안고 설의 옆에 가 앉았다.
손녀를 뺏긴 그는 아쉬운 얼굴이었으나, 민준은 휘에 관해서는 조금의 양보도 없었다.
“건우 씨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어요?”
“책 이야기.”
그는 휘의 뺨에 입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휘를 의자 위에 앉히고, 자신은 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놀란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응? 왜요?”
“당신 신발 끈이 풀렸잖아.”
“진짜네? 몰랐어요.”
설은 부드럽게 웃으며 민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추운 겨울날 그녀의 목에 목도리를 단단히 여미어주던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술에 취한 설을 등에 업고 거리를 걷고,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서 그녀에게 사과를 던져주며 웃던 그때처럼…….
“공원 근처에 민들레가 많이 피었던데, 이따 오후에 애들 데리고 산책 가자.”
그리고, 민준은 지금도 설에 관한 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설에 관한 것만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이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민들레는 왜요?”
“당신이 좋아하니까.”
설은 민준의 대답을 알면서도 질문을 했다. 이렇게 담백하게 진심을 말하는 그가 참 좋기 때문이었다.
이런 민준을 볼 때마다 그녀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다.
행복이 깨어질까 봐 두렵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있죠, 난 지금이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그럼 이제 나랑 똑같아진 거야?”
“응, 똑같아요.”
설의 속삭임에 기분이 좋아진 민준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에게도 하루하루가 휘만큼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
자전거 바퀴에 걸린 체인이 좌르르 돌았다. 열심히 페달을 밟던 민족은 골목길을 빠르게 돌아 집 앞에 멈췄다.
그는 대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며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휘!”
고등학교 1학년인 휘는 여름방학을 맞아 조금 전 집에 도착했다.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던 민족은 손목시계의 빨간 점이 평창동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고 서둘러 밖으로 나온 거였다.
휘는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민족은 평소엔 주말에야 겨우 그녀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개학까지 매일 동생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보, 늦었어!”
2층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가던 민족이 고개를 들어 2층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휘.”
“잘 지냈어, 오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렸다. 휘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민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웃고 있는 그녀의 청초한 모습은 꼭 천사 같았다.
그는 아버지가 아직까지 동생의 날개를 찾아오지 못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 오빠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지금? 어디?”
“퓰리처상 사진전. 하지만 가려면 지금 가야 해, 시간이 별로 없거든.”
“그럼 거기서 날아서 내려올래? 오빠가 여기서 받아줄게.”
민족은 싱긋 웃으며 휘를 향해 두 팔을 높이 올렸다.
친구 녀석들은 그를 가리켜 시스터 콤플렉스라고 했지만, 민족은 자신을 뭐라 칭하든 상관없었다.
민족이 뭘 하든, 아버지가 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오후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전시회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미 이 사진전에 두 번이나 왔었다는 휘의 오빠는 그녀에게 전시회장 출구 앞에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보고 나오라고 말했다.
사람들 무리에 휩쓸려 다니던 휘는 인상을 찡그리며 결국 사람들 대열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녀는 작품을 이렇게 등 떠밀리듯이 다니며 보고 싶지 않았다.
대열에서 나와 멀리서 바라보니 오히려 작품을 찬찬히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가까이에서 인기척을 느낀 휘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그녀와 비슷한 나이의 남학생이 서 있었다. 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꽤 유명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휘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넌 방학을 하자마자 혼자 사진전에 온 거야?”
남학생은 정면의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그도 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너야말로 항상 같이 다니는 쌍둥이 여동생과 사촌은 어디에 두고 혼자야?”
그녀의 말이 의외였는지, 남학생은 고개를 돌려 휘를 힐끗 쳐다보았다.
“너 7반 한도빈, 아니야?”
“맞아. 의외네. 네가 내 이름을 다 기억하고.”
“한도린 한도빈 한도준. 너네 학교에서 유명하잖아.”
“그래도 너만큼은 아니야.”
휘는 학교에서 꽤 유명인사였다.
그가 사진전에서 그녀를 만났다는 걸 알면 자신의 사촌인 도준은 같이 오지 않은 걸 땅을 치고 후회할 게 분명했다.
그는 입학식 날 휘를 보고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너 사진 좋아해?”
“셋째 작은아버지께서 사진작가야. 한도준 안다고 했지?”
“아, 그럼 셋째 작은아버지가 혹시 한도준의 아버지야?”
“응.”
더위 탓인지 휘의 뺨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녀가 가족 이외의 남자와 이렇게 긴 대화를 한 건 처음이었다.
휘는 오빠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방학이 너무 짧은 것 같아.”
“…….”
그녀의 한숨 같은 말에 도빈이 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솔직히 네가 이렇게 말이 많은 줄 몰랐거든.”
“그렇다고 내가 아무나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건 아니야.”
“칭찬이었어.”
“…….”
휘도 한도빈 한도준 사촌 형제에 대한 얘기는 주변에서 들어 알고 있었다.
서글서글하고 붙임성이 좋은 도준에 비해 도빈은 말도 별로 없고 무덤덤한 성격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여기서 만난 사람이 만약 도빈이 아니라 도준이었다면…… 휘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얘기를 하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 사진이 그렇게 좋아?”
“응?”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그의 질문에 정신이 들었다.
“아까부터 계속 그 사진만 보고 있잖아.”
“아…….”
사실 휘는 도빈과 얘기를 나누는 게 좋아서 멈춰 서 있던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그렇다고 말을 할 순 없었다.
“어, 좋아해. 내가 정말 보고 싶었던 사진이었거든.”
“……날씨가 덥네.”
“……응. 더워.”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움직이고 싶진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민족이 휘를 찾으러 올 때까지,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멈춰 서 있었다.
“휘! 여기에서 뭐해? 가자.”
“……응. 오빠.”
‘친구가 되자고 할걸 그랬나?’
휘가 민족과 함께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도빈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휘는 도빈의 눈동자가 바다 같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