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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7화 (7/124)

?제7화. 3장. 안 해! (3)

그녀가 물을 끼얹었을 때 나는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이 있었다. 물이 공중에서 넘치는 것과 동시에 헤레이스가 내 앞으로 팔을 뻗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의 물방울도 튀지 않았다.

“어째서 헤레이스가 젖었…아니, 괜찮나요.”

왜 내가 아니라 헤레이스가 젖었냐고 따지려던 이사벨이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당황한 모습을 완전히 지워 내지도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니 피식, 하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래도…….”

헤레이스가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내며 답했다. 그 모습을 보는 이사벨이 초조해 보였다. 자신이 끼얹은 물에 젖은 꼴을 보니 그렇겠지.

대수롭지 않게 하녀가 가져온 수건으로 젖은 팔을 닦던 헤레이스가 이사벨을 걱정하며 권했다.

“제가 봐도 어머니께서 몸이 별로 안 좋아 보입니다. 오늘은 들어가서 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아드님께서 그리 말하시면 그래야죠.”

이사벨이 억지로 대답하는 것이 보였다. 내게 기선제압을 하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언짢은 것 같았다.

과거로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이사벨은 어쩜 이토록 한결같을까. 특히, 나를 싫어하고 무시한다는 점에서.

“먼저 일어나죠.”

이사벨이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을 잡고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우당탕탕-.

그녀가 일어나던 중 갑자기 어지러운 듯 머리를 짚더니 그대로 휘청거렸다. 그대로 이사벨이 잡고 있던 테이블도 함께 흔들리면서 테이블보가 당겨졌다. 그 위에 있던 식기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며 그릇이 깨지고 음식이 쏟아지는 진창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이사벨이 머리를 짚는 동시에 나 역시 몸을 뒤로 물러섰지만, 늦었다. 드레스가 엉망이 됐다.

이사벨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순간 어지러워서…미안해서 어쩌지.”

아픈 사람이 휘청하다가 그런 건데 어쩌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승리의 미소를 살짝 짓는 것 역시.

“몸이 정말 안 좋으신가 보네요. 이제라도 푹 쉬세요.”

이사벨이 머리를 다시 짚으며 힘겹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네요.”

그녀의 대답에 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당분간 식사 자리도 하녀들에게 말해 식사 때마다 방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아무리 작은 병이라도 쉽게 보셔서는 안 되지요. 그러니 다 나을 때까지 푹 쉬세요.”

헤레이스까지 나서서 말을 보탰다.

“부인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이사벨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서일까.

‘그나저나 드레스는 어쩌지?’

나는 이사벨이 더럽힌 드레스 상태를 살펴보았다. 드레스에 선명하게 얼룩이 생겼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드레스가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드레스가 더러워진 것 정도는 그냥 넘어가는 게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여전히 분함에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확인시켜 주는 게 좋겠지.’

이사벨이 나에게서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서 한 별거 아닌 것 같은 행동들을, 내가 물고 늘어지려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려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드레스 치맛자락을 살짝 펴며 속상한 듯 말을 꺼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이건 폐하께서 선물로 주신 건데. 알게 되면 꽤나 속상해하시겠네요.”

과거, 이사벨은 내 물건을 함부로 망가트렸다. 마치 악취미를 즐기는 것처럼. 실수인 척 내 물건을 망가트리고, 심지어 시녀들에게 마음대로 선물로 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사벨에게 알려 줘야 한다. 내게 있는 물건의 대부분은 루이스에게 선물 받은 것이고, 상당한 양이 황가의 물건이라는 것을. 황제가 하사한 물건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됐다. 특히 그것이 고의일 경우에는 처벌을 면하지 못했다. 그러니 과거처럼 내 것을 함부로 하려 한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줄 필요가 있겠지.

루이스를 언급하자 이사벨이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사실 루이스가 정기적으로 황궁 디자이너에게 시켜 선물하는 것일 뿐, 전혀 특별한 것 없는 드레스이지만. 이사벨에게 겁을 주는 데엔 가장 잘 먹혀들었다.

“폐, 폐하라니…….”

이사벨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에일린, 이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실수로…….”

“그게 폐하께 통할지는…사정을 봐주시는 법이 없어서…….”

“그, 그게…….”

루이스를 언급하자 이사벨이 두려워하며 당황했다.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찾는 것이 눈에 보였다. 결국, 헤레이스가 나서서 이사벨을 달랬다.

“어머니. 이만 들어가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어요.”

이사벨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사색이 된 채 비틀거리며 돌아갔다.

이사벨은 남들의 시선을 굉장히 의식하는 편이었다. 그것은 시녀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그러니 이사벨은 그녀들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당분간은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할 것이다.

헤레이스가 내 모습을 살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러게요. 이 드레스를 어쩌면 좋을지…….”

나는 괜히 다시 한번 별 것 아닌 드레스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앞으로 내 물건, 내 몸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해서.

“괜찮으….”

헤레이스가 손을 뻗어오며 괜찮으냐고 물어오려 했지만,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내게 뻗어오던 헤레이스의 손이 허공에 머물렀다가 곧 그의 무릎 위로 돌아갔다.

나는 그 모습을 모두 봤지만, 못 본 척 무시했다. 그리고 헤레이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식사는 이만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러면서 식당에서 나가며 에밀에게 말했다. 헤레이스 역시 들을 수 있도록.

“에밀. 찝찝해서 목욕해야겠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사벨의 무례를 사람 좋은 척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과거의 내가 그랬었으니까.

그가 내 드레스에 뭔가를 쏟아도. 얼굴에 음료를 쏟아부어도. 나는 그저 속없는 것처럼 웃었다. 그 결과 얻게 된 것은 시어머니의 애정이 아닌 무시와 멸시였다.

“그럼 남은 식사라도 맛있게 하세요.”

나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먼저 식당에서 나왔다. 그리곤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곧 준비가 되니 바로 가시면 됩니다.”

어느새 다른 시녀에게 얘기하고 왔는지, 에밀은 곧바로 나를 욕실로 데려갔다.

“에밀이면 충분해. 나머지는 물러나 있어.”

나는 모두를 물리친 채 에밀의 시중만을 받으면서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갔다.

정신없이 지나간 하루였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과거로 돌아와 있었고, 내 손에 흘렀던 피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데 지금은 루이스가 살아 있다. 그리고 과거의 모습으로 만난 이사벨과 헤레이스까지. 모든 것이 정신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천천히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 보면 그런 일들이 한두 번씩 쌓일 때마다 공작가의 고용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렇게 점점 나의 입지는 좁아지고 어느 순간, 나는 제국의 황녀이자 공작 부인이 아닌 거들떠도 보지 않는 남편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호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는 호구 따위는 안 해. 절대로.’

나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헤레이스에게 애정 따위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무시하고 신경 쓰지도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그를 쫓지 않는 이상 마주칠 일도 없을 테니까. 이대로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는 평행상태인 채로 유지되겠지.

* * *

그런데 어째서인지 헤레이스와 공작가에서 유난히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았다. 과거에는 내가 그와 한 번이라도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해도 보기 힘들었던 얼굴이 우연하게도 가는 곳마다 그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한데, 이번에는 헤레이스가 나를 찾아왔다.

“드레스는 괜찮습니까.”

“버렸어요.”

이사벨이 망친 저녁 식사에서 망친 것 중 하나인 드레스는 목욕을 할 때 벗어서 그대로 버렸다.

“도저히 못 쓰겠어서요.”

처음부터 버릴 생각이었지만. 그날의 이사벨의 무례를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서 드레스를 구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겼다.

“그럼 제가 대신 선물하겠습니다.”

“네?”

“드레스를 버렸으니 새로 필요하지 않습니까. 제가 선물하겠습니다.”

“…….”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었다고. 내가 드레스를 버리든 새로 사든 신경 쓴 적 없으면서. 갑자기 선물이라니 무슨 생각인 거지.

나는 헤레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돌리며 거절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헤레이스와 오래 있지 않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갑자기 뜬금없이 드레스라니. 이사벨의 실수를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건가.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나는 이사벨의 실수를 빚으로 놔둘 생각이었다. 언제나 내게 뭔가를 하려고 할 때 계속 신경 쓰이도록.

공작가에서 일하는 시녀와 하녀들의 시선이 나를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지난 저녁 때 이사벨과의 있었던 일과 오늘 헤레이스와 나눈 대화가 그들 사이에서 말이 나온 것 때문일 것이다.

결혼 전까지는 분명 헤레이스에게 정신없이 빠져서 무엇이든지 하던 내가 하루아침에 달라진 것 때문에 모두 의아한 것이겠지. 이사벨에게 인정받기 위해 잘 보이려 비위를 맞추고, 헤레이스에게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받기 위해서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려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상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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