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3장. 안 해! (4)
밖에 있으면 흥미로 가득한 시선이 느껴져서 방에서 쉬기로 했다. 그들을 모두 일일이 붙잡아서 경고를 하는 것은 번거로우니까.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벌써 그럴 시간인가.”
에밀의 말에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방 안에 있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회귀 전에는 아침은 방 안에서 간단하게 먹을 때가 많았지만, 저녁은 식당으로 가서 먹었다. 혹시라도 헤레이스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저녁이 되면 일부러 한껏 꾸미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연이라도 식당에 갔다가 헤레이스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방에서 간단하게 먹을게.”
“그럼 이리로 가져오겠습니다.”
에밀은 저녁 식사를 가져오며, 헤레이스가 식당에 있었다고 귀띔해 주었다.
의아한 일이었다. 과거에는 그가 식당에서 식사를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와 함께 식사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늦은 밤에 따로 식사를 할 뿐.
나는 방에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차를 마셨다.
아침에 마시는 차, 식사를 마치고 마시는 차,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차. 어떤 경우에라도 나는 차를 마시는 시간을 즐겼다.
한창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예상치 못하게 헤레이스가 나를 찾아왔다.
“어쩐 일인가요.”
과거에 헤레이스는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은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나를 외면했고,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 나를 찾아올 때는 루이스의 명령 때문이었거나 나를 찾아올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을 때뿐이었다.
‘지금 그럴 만한 일이 있었나.’
황궁은 이미 얼마 전에 다녀왔다. 벌써 루이스가 우리를 부르거나 헤레이스에게 뭔가를 명령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일이 있는 걸 텐데.
‘뭐, 무슨 일인지는 들어보면 알겠지.’
그가 내게 무슨 부탁을 하더라도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거절해 줄까. 어떻게 거절을 해야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해 줄 수 있을까.
나는 헤레이스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식사를 하는데 오지 않아서 찾아왔습니다.”
“식사요…?”
“오실 줄 알고 기다렸는데, 이미 식사를 마쳤다고 하더군요.”
나는 가만히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과거의 일을 생각했다. 나와 헤레이스가 함께 식사를 했던 적이 있었나. 기억을 오래 되짚어 볼 필요도 없었다. 그와 내가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식사를 함께한 적은 없었다. 그것도 이런 일상적인 날에 평범한 식사를.
“공작님께서 저를 기다릴 줄 몰랐네요.”
이미 에밀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식당으로 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알지 못한 것처럼 안타까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래도 식사는 맛있게 하셨……,”
헤레이스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다고 말하는 헤레이스의 눈빛이 너무 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강조하듯이 다시 한번 말했다.
“식사도 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이런. 허기지시겠어요.”
나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건가. 나는 조금 과장하며 그를 걱정하는 척했다. 그 역시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능청스럽게 안타까워하는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헤레이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타까우시면 지금이라도 함께 식사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이미 식사를 마무리해서요. 아쉽네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헤레이스를 향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인제 그만 헤레이스를 돌려보내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헤레이스가 먼저 내게 말했다.
“그럼 내일부터는 함께 식사하죠.”
헤레이스는 지금 내게 함께 식사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솔직히 좀 당황스럽다. 나도 모르게 헤레이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왜요.”
내가 왜 헤레이스와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하는 거지.
내 물음에 헤레이스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마치 당연한 것을 말하듯이.
“하루에 한 끼 정도는 함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부부가 아닙니까.”
헤레이스의 입에서 부부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헤레이스는 뻔뻔한 얼굴로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당황해서 순간 할 말을 잃을 정도로.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럼 정말로 내일부터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어야 할 것만 같았다.
“저희가 제대로 된 부부였나요.”
“…….”
“허울만 겨우 유지한 부부겠지요.”
나는 단호하게 헤레이스에게 우리의 관계를 짚어 주었다. 그런 결혼생활을 원한 것은 물론 헤레이스였다.
“굳이 시간을 맞춰서 함께 하는 일이라니. 분명 공작님께서 번거로우실 겁니다.”
나는 더 이상 헤레이스와 부부 행세를 할 마음 따위 없었다. 이번에는 그의 핑계를 대서 무늬만 부부로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런 수고는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나는 헤레이스를 향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방금 전까지 헤레이스가 웃고 있었던 것처럼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럼 저는 이만 쉬어야겠어서…이만.”
나는 웃는 낯으로 헤레이스를 방에서 내보냈다. 그는 아쉬운 듯하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물러났다.
나는 방에 혼자 남은 채로 다시 차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회귀했으니 이전의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변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공작가에서의 내 위치부터일 것이다.
다시는 시집살이 같은 것도 하지 않고.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헤레이스에게 사랑받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희생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아직 이혼할 수는 없다. 그가 앞으로 일으킬 반역. 그 반역을 막아야 한다. 그래야 루이스를 지킬 수 있다.
‘반역에 대한 기억이 많았으면 좋을 텐데.’
불행하게도 과거의 나는 반역이 거의 마무리 되었을 때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헤레이스가 어떻게 반역을 준비하고 어떤 식으로 일으켰는지는 모른다.
아직 아무런 반역의 움직임도 없는데, 미래에 그들이 할 짓을 빌미 삼아서 처단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정말로 그들에게 반역의 명분을 쥐여 주는 것이니까.
일단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자.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차는 어느새 식어 있었다.
* * *
일단 공작가의 재정을 휘어잡을 필요가 있었다. 회귀 전에는 이사벨이 계속 관리했던 것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내가 도와주기만 했을 뿐.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
나는 곧바로 앨버트에게 공작가의 예산안을 가져오도록 했다.
“여기 있습니다.”
집사장인 앨버트가 내게 공작가의 분기별 예산안을 내밀었다. 앨버트가 가져온 서류의 예산안에는 건물 보수, 유지 관리, 품위 유지는 물론이고 고용인들에게 지급되는 것들까지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나와 헤레이스의 결혼은 거래나 마찬가지였다. 결혼하는 대가로 공작가의 빚을 청산해 주었다.
‘그리고 공작가에게 황실 지원 사업을 몰아주었지.’
그동안 공작가가 지고 있던 부채는 결혼식 당일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공작가의 재정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축적되어 온 적자로 인해 공작가의 재정은 그야말로 위태로웠다.
그래도 한때 잘나가던 명문가였고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그런 공작가가 이렇게까지 나빠졌던 데에는 이사벨의 영향도 있었다. 점점 나빠지는 가계와는 상관없이 공작가를 운영한 것이었다. 과거에는 이 역시도 내가 모두 대신 지불해 주었지만.
과거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면 꺼낼수록 내가 얼마나 호구에 멍청이였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 정말 호구였네.’
앨버트가 가져온 공작가의 분기별 예산안은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느 곳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특히, 건물 보수는 제대로 하지도 못한 지 몇 해째인 것에 비해, 품위 유지비는 지나치게 많이 지출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작가의 영지는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는 집사장 알레드릭이 전반적인 것을 관리하고 사후에 헤레이스에게 결재받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곳마저도 이사벨이 관리했다면, 지금까지 공작가가 버티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엉망이네.”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이사벨은 나를 싫어했다. 나와 헤레이스의 결혼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것도 그녀였다. 처음에는 알게 모르게 은밀하던 괴롭힘이 시간이 지날수록 노골적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한 것 역시 그녀였다.
내 도움은 전부 받은 이사벨이 영악한 것일까. 그 짓을 당하고도 바보같이 계속 도움을 준 내가 호구인 거지. 나를 지켜보던 에밀, 올리비아가 그토록 답답해하고 욕을 하던 이유를 알고도 넘칠 것 같다.
‘욕 먹어도 할 말 없지.’
나를 걱정하던 사람들을 더 힘들게만 만들었었다.
‘그러니까 이제 안 해.’
더 이상은 절대 안 할 것이다.
다시는 이사벨에게 멍청하게 이용당하지도, 헤레이스에게 속아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과거에 헤레이스는 내가 지원해서 쌓은 부로 나와 루이스를 쳤다. 그 결과를 알면서도 경제적 지원을 해 줄 수는 없었다.
과거에 내가 공작가에 주었던 것들을 하나씩 정리할 것이다. 공작가에 관한 그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뭔가를 꾸밀 때 필요한 기반을 내 손으로 쥐여 주지는 않을 것이다
엉망진창에 언제 어디서 문제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장부를 보면서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 건 없군.”
앨버트가 나를 설득하려 입을 뗐다.
“하지만 마님….”
그는 내가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을 테지만,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공작가를 살리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라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공작가가 다시 자리를 잡을수록 그것은 나와 루이스에게 해가 되는 일이니까. 결국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앨버트를 향해 일침했다.
“이 정도도 감당 못 한다면…없어져야지, 공작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