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3장. 안 해! (5)
가문과 영지를 책임지지 못하는 귀족이 몰락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은 단순히 신분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앞으로 그 어떠한 지원도 없어. 그렇게 알도록 해. 만약 누가 물어본다면 그렇게 전하도록 하고.”
“마, 마님…!!”
헤레이스든 이사벨이든 그대로 전달하라는 뜻이었다. 앨버트가 당황했는지 나를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소용이 있을 리 없었다.
“이만 돌아가.”
앨버트가 간절한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다.
“마님.”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돌아가.”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앨버트는 망설이면서도 하는 수 없이 돌아갔다.
그러자 방 안에는 알 수 없는 침묵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갑자기 달라진 내 태도 때문인지 시녀들이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다들 물러나 있어.”
“네.”
시녀들 모두 문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졌다. 방 안에는 나와 에밀만이 남았다. 내가 말한 모두에 에밀은 제외였고, 그것을 에밀 역시 당연히 알아들은 것이다.
“후우….”
피곤했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만들어놓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니 엉망진창이었다.
망해가는 공작가, 나에겐 관심도 없는 남편, 헤레이스는 심지어 5년 후에 반역을 일으킨다. 게다가 사치가 심하고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이사벨까지. 어떻게 내가 이런 곳에 제 발로 들어와서 모든 것을 망쳤을까 싶을 정도로 최악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나는 대체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 무엇도 과거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처럼 질질 끌려다니지도 휘둘리지도 않을 것이다.
앨버트와 대화할 때부터 옆에 있었던 에밀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왜…?”
“하루아침에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며 에밀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하,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다가 순간 아차, 싶었다. 나는 5년이라는 끔찍한 시간을 겪고 회귀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보이게 내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조심해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눈치 안 봐.’
괜히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느라 공작가의 비위를 맞출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헤레이스를 여전히 사랑하는 척은 더더욱.
“달라진 게 아니라,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거야.”
그동안의 내가 미쳤던 것이다. 이제야 겨우 깊고 헤어 나올 수 없었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제대로 된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
‘나 안 해!’
이미 한 번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 봤다.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역시 모두 겪어 봤다. 그걸 다시 한번 반복할 생각 따위 없다. 이번 생에는 반역을 막고, 오빠를 구하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 * *
이사벨은 꾀병이 다 나을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방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헤레이스가 찾아왔다.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공작님이…?”
“네.”
찾아올 리 없는 사람의 방문이었다. 하지만 에밀의 대답은 확고했다.
순간, 얼마 전에 앨버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떠한 지원도 없을 것이라고 했던.
‘그것 때문에 찾아왔나 보네.’
과거에는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나서서 모든 것을 처리했다. 그래서 나를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해 주지 않고 나 몰라라 하자,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온 건가.
“부인.”
헤레이스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내가 먼저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어차피 그가 할 말은 알고 있었다. 굳이 그 말을 듣기 위해 불필요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헤레이스가 말하면 뭐라고 받아칠지도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어째서 공작가에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냐고 물어오면…….
“언제가 좋습니까.”
“네…?”
갑자기 무슨 소리지, 아니 그보다 헤레이스가 나한테 뭔가를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기본적으로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대화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한 집을 공유하고 있을 뿐, 결국엔 타인이었다.
“지난번에 식사 때 옷이 망가졌으니, 한 벌 새로 맞추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뜬금없는 말에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헤레이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제가 선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면 열수록 오히려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예상한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더 이상 어떤 식으로든 공작가에 금전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내 말을 전해 들은 헤레이스가 따지러 와야 했다. 이런 식으로 맥을 뚝 끓는 말이 아니라.
지금 드레스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순간 따져 물을 뻔했다.
심지어 우리는 단 한 번도 사적으로 함께 외출한 적이 없었다. 함께 움직이는 것이라곤 황궁에 입궐할 때뿐이었다.
“흐앗…….”
깜짝이야. 이해할 수 없는 헤레이스의 행동에 혹시 숨은 목적이라도 있는 것일까,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미간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정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순간, 내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와 버렸다.
피식. 게다가 지금 내 앞에서 웃음소리까지 들렸다. 지금 내 해괴망측한 신음 소리를 비웃은 거지. 나도 모르게 헤레이스를 노려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따지고 들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헤레이스가 짐짓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심각한 얼굴을 하고 계셔서.”
헤레이스의 변명이었다. 심각한 얼굴이라니,
‘내가 그런 표정이었다고?’
나는 이해되지 않는 말을 이해해 보려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때였다. 헤레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지금처럼요.”
헤레이스가 내 미간을 눈짓하며 말했다. 내가 얼굴을 손바닥으로 살짝 가렸다. 방금 전에도 그가 말한 심각한 얼굴이 나왔나 보다. 아무래도 그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놀라 나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던 것 같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왜 갑자기 사람 미간을 꾹 누르는 거야. 물론, 예전의 나라면 설레서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겠지만.
헤레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싫으십니까.”
아주 조금 내 눈치를 보는 듯하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아직도 내가 답하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어떻게 할까. 이제 더는 그와 엮이지 않는 것이 옳았다. 그러니 지금 이것도 거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 같이 다녀오는 게 어떻습니까.”
헤레이스는 외출을 밀어붙였다.
“기분 전환 겸 나쁘지 않을 겁니다.”
헤레이스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다. 내가 모든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식사 때 이사벨의 실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선 나를 달래려는 것이다.
‘어디 한 번 어디까지 하나 볼까.’
생각해 보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수록 애가 타는 것은 헤레이스와 이사벨이다. 지금 당장 내 도움이 절실할 테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러죠.”
내 수락을 헤레이스가 덥석 물었다.
“내일 제가 직접 데리러 오겠습니다.”
나는 허가해 준 사람처럼 헤레이스를 내려다보듯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그러세요.”
헤레이스는 그 차이를 알지 못하는 듯 미소를 지은 채 얘기했다.
“그럼 편히 쉬세요.”
“네.”
헤레이스가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나는 이미 등을 보인 채 돌아선 그를 불렀다.
“공작님.”
헤레이스가 나를 돌아봤다. 내가 그를 향해 한쪽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말했다.
“내일. 기대되네요.”
내일 헤레이스의 계획은 실패할 테니까. 헤레이스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저도 기대됩니다.”
티끌 없이 해맑은 미소였다. 그 미소는 정말 순수하게 내일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게 모두 연기인 것을 몰랐다면, 다시 한번 속아 넘어갈 만큼.
* * *
하지만 헤레이스와 외출하기 전에 다른 일이 생겼다. 정확히는 붙잡힌 거라고 볼 수 있지만.
아침 일찍 이사벨이 나를 찾아왔다.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무래도 작정을 하고 온 것 같았다.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신가요.”
좋게 표현해서 방문이었지, 사실은 갑자기 쳐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사벨은 사전 약속이나 오기 전에 시녀를 먼저 보내 알리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식사도 하기 전인 이른 아침에 멋대로 들이닥친 것이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이사벨이 앞으로 무슨 질을 벌일지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사벨의 행동은 뜻밖이었다.
이사벨은 딱딱하게 굳어 잘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말했다.
“공작가에 온 지 얼마 안 돼 많은 것이 낯설 겁니다.”
아직까지는 인자한 모습을 유지할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속셈은 따로 파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쉽게 보였다. 그럼 그렇지. 수모를 당하고도 얌전히 있을 이사벨이 아니었다.
나는 이사벨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았다.
“그동안 제가 무심했던 것도 같아서 이제부터라도 각별히 신경써주려고요.”
그러면서 이사벨이 호호거리며 웃었다. ‘어때, 고맙지?’라고 외치면서.
이사벨은 나를 도와준다는 핑계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시키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공작가에서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게 도와주려는 깊은 마음이라고 포장하면서.
이사벨이 대뜸 내 손을 잡아 쓰다듬었다. 마치 어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한 시선으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옆에서 열심히 도울게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에일린.”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도 아니고, 이대로 당해 줄 생각도 없었다. 다만,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