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3장. 안 해! (6)
그녀가 결연하게 나온 만큼 이번 순간이 중요했다. 이럴 때 그녀를 더욱 확실하게 밟아 주어야 그녀는 겨우 현실을 직시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사벨은 영원히 이대로 똑같을 것이다.
이사벨은 거침없었다. 마치 내게 할 말들을 모두 외워 놓은 사람처럼 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동안 엄청 분했나 보네.’
계속 듣다 보니 멜로디처럼 들리는 이사벨의 목소리를 감상하며 생각했다. 얼마나 분했으면, 대체 내게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던 것일까. 그러니까 이렇게 단 한 번도 말을 버벅거리지 않고 말하는 거겠지.
이사벨은 대단한 것을 해 준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특별히 에일린의 적응을 위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알려 줄게요.”
만약 회귀 전이라면 이사벨이 내게 쓰는 관심에 감격하여 기뻐했겠지. 그래서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짓을 시켜도 군소리 없이 해냈을 것이다.
이사벨 역시 지금 내게 그런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녀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돌이켜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멍청했던 내 행동. 하지만 그 수고는 모두 쓸모없는 짓이었다.
“에일린…?”
이사벨이 나를 불렀다. 방금 전 내가 웃음을 터트린 것을 본 모양이다.
‘좀 더 참아보려고 했는데…안 되겠네.’
이사벨이 하는 모습을 좀 더 두고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려 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생글거리던 표정을 얼굴에서 지웠다. 그리고 이사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앞으로 매일 내가 차근차근하게 가르쳐 주도록 할게요.”
차근차근 가르쳐 준다는 것은 매일 이사벨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를 내던 그녀가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라도 나를 매일 보는 일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이사벨은 내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공작가에는 공작가만의 규칙이 있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녀가 말하는 것을 나는 모두 알고 있었다. 비록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공작가에서 5년을 살았다. 이곳에 관해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사벨이 아무리 공작가만의 규칙이라며 내게 이상한 짓을 시켜도 소용없었다.
“당분간 하녀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서 공작가에 대해 알아가는 건 어떤가요.”
“하녀들이 일하는 것을요…?”
“그래요. 하녀들이야말로 공작가 구석구석 모르는 것이 없으니까요. 일단 이 저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한눈에 알 수 있을 거예요.”
이사벨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웃으라고 하는 말인가 싶을 정도로.
“그건 직접 보고받으면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대꾸해 주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 헛소리였다. 나는 그대로 이사벨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사벨은 살짝 눈썹이 꿈틀거리나 싶더니 다시 미소를 유지했다.
“그대가 아무리 황녀라고 해도 이곳에 온 이상 공작 부인입니다. 신분도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져야 해요.”
하지만 이사벨은 내가 다시 말을 꺼낼 타이밍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방금 전의 얘기는 포기하고 다른 것을 노리려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일단 들어 봤다.
“분명 귀하게만 살아와서 분명 낯설고 불편할 거예요.”
“…….”
“너무 걱정 마세요. 내가 곁에서 도와줄 테니.”
가만히 듣기만 하면 세상에 다시없을 좋은 시어머니였다. 그녀의 웃음 뒤에 숨어 있는 진심을 모른다면 말이지만.
“제가 처음 이곳에 시집 왔을 때는….”
이사벨은 과거에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옛날엔 안 이랬는데, 요즘엔-.’이라는 가장 흔한 시작이었다.
“가문의 안전을 서로 신경 썼답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서서 도와주었죠.”
“…….”
“그리고 가문의 어른을 언제나 최우선으로 존중했답니다. 저 역시 처음 공작가에 왔을 때 그리 했었고요.”
공작가의 재정을 언제나 도와주고, 이사벨 자신을 잘 모셔라. 그런 뜻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명료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에일린, 앞으로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요. 내가 가문의 어른으로서 많이 도와줄 테니.”
꿀에 바른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면서 눈빛은 나에게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이사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켜볼 만큼 지켜보았다. 그런 판단이 들자마자 나는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부인.”
이사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내 거침없는 행동에 이사벨이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이사벨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 더 이상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지만, 이사벨의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사벨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부인은 저한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이사벨을 가르치듯이 다정하게, 하지만 혹시라도 못 알아듣고 엉뚱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매섭게.
이사벨의 양어깨가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살짝 낮게 깔린 목소리를 유지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동안 부인이 멋대로 할 수 있었던 건.”
꼴깍. 이사벨이 마른 침을 삼키는 것이 내 귓가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는 긴장한 채로 시선을 조금씩 피했다.
“제가 부인을 봐 드렸기 때문이에요.”
회귀 전 이사벨이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무조건 참았다. 헤레이스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럴수록 돌아오는 것은 이사벨의 인정이 아니라 교묘한 괴롭힘과 무시였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결국 내가 참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사벨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그녀에게 되갚아 줄 생각 따위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그녀는 의기양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내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사벨의 만행을 두고 볼 생각도 없고, 내게 하는 어떤 무례도 참고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마음을 돌린 이상, 이사벨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그녀는 내게 어떤 앙갚음도 할 수 없다.
나는 이사벨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선을 지키세요.”
작게 속삭이지만, 이사벨의 귀에는 똑똑히 들리도록. 한 글자마다 힘을 주고.
“제가 지금까지라도 봐 드린 것은 그래도 제 시어머니기 때문입니다.”
이사벨이 악에 받쳐 내 이름을 절규하듯이 외쳤다.
“에일린…!”
온몸이 부들거리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제가 어째서 부인의 만행을 두고 봐야 하나요.”
그저 냉정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멍청하게 당하기만 한 것이 사실은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이사벨은 현실을 직시한 것인지 단지 내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이사벨이 정신을 차리고 반응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이사벨이 감당하기에는 충격이 너무 컸나. 이사벨의 모습이 어쩐지 이상해 보였다. 그리고 역시나, 이사벨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사이에 눈에 피가 고였다는 착각이 들 만큼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네가 뭔데 나한테 이런 말을 해!!”
당장 나에게 달려들어 나를 쓰러 눕힐 것 같은 기세였다.
“나가! 당장 나가!!”
흥분한 이사벨이 있는 힘껏 양팔로 나를 밀쳐냈다. 말인지 비명인지 잘 알아듣기 힘든 소리와 함께.
나는 중심을 놓치지 않은 채 버텼다. 옆에 있던 에밀이 바로 이사벨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내가 고개를 저었다. 에밀은 그 모습을 보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꽉 쥔 주먹이 떨리는 것이 참기 힘들어 보였다. 여기서 내가 좀 더 당하면 에밀의 꽉 쥔 주먹 사이로 피가 흐를 것만 같았다.
내가 이사벨의 팔을 붙잡으려고 할 때였다. 그대로 이사벨을 떼어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헤레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사벨의 눈이 커진 것을 보니 내 등 뒤에 헤레이스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타나지 않자 헤레이스가 온 것이었다. 이사벨은 어느새 정신이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얼굴이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피식, 비소가 흘러나왔다.
“지금 무슨 상황인 겁니까.”
헤레이스의 물음에 이사벨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했다. 이사벨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 상황에 대해 설명-혹은 해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잠시…에일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부인을 밀치면서요?”
하필, 헤레이스는 흥분한 이사벨이 나를 밀치던 모습을 멀리서 보고 달려온 것 같았다. 그가 보기에 내가 당하던 입장인 것이다.
“헤레이스. 그게 아니라…지금 상황 때문에 그런 오해를 할 수는 있지만…아닙니다. 설마 나를 못 믿는 건가요.”
헤레이스는 이사벨의 변명에 입을 꾹 다문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헤레이스는 곧바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사벨에게서부터 나를 보호하듯이 나를 자신의 뒤로 보냈다.
헤레이스의 등에 가려져 이사벨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직전, 분명 그녀가 입술에 피가 나올 만큼 세게 깨무는 모습을 보았다.
“헤레이스. 이게 지금 무슨 짓인가요.”
이사벨이 화를 겨우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여전히 내 앞을 굳걷하게 지키고 있었다.
“지금 저와 얘기 중인데…이게 무슨 무례인가요.”
하지만 헤레이스의 등은 단 한 순간도 움찔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어쩌다 나와 이사벨의 싸움이 이사벨과 헤레이스의 신경전으로 변한 거지? 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생각할 뿐, 그렇다고 이사벨이나 헤레이스를 말리지는 않았다.
헤레이스가 단호하게 이사벨에게 말했다.
“부인은 오늘 저와 선약이 있습니다. 먼저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