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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11화 (11/124)

?제11화. 3장. 안 해! (7)

헤레이스가 나를 이끌고 앞장서 나갔다. 이사벨은 마치 버려진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헤레이스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헤레이스가 잔뜩 걱정된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내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하지만 나는 멀뚱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괜찮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난 듯 정색하며 그에게 답했다. 일부러 헤레이스가 이 상황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도록.

“아뇨. 별로 그러지 못한 것 같네요.”

이번에는 내가 먼저 앞장서며 말했다.

“출발하죠.”

헤레이스의 말대로 오늘 선약은 이사벨이 아니라 헤레이스였으니까.

* * *

약속대로 헤레이스와 외출해 도착한 곳은 마담 세실의 의상실이었다. 이곳은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의상실이었다. 과거에 나 역시도 종종 방문했었다. 최고급 원단과 일류 디자이너를 확보하고 있어 제국의 최신 유행을 이끌어 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특히, 이곳의 주인인 마담 세실은 사업 수완이 뛰어났다. 그녀는 귀족들의 비위를 잘 맞추면서도 의상실에 대한 높은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나와 헤레이스가 들어서자마자 마담 세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마담 세실이 소파를 가리켰다. 나와 헤레이스가 나란히 앉고 마담 세실이 맞은편에 앉았다. 곧, 의상실의 직원이 차를 가져왔다.

마담 세실이 나를 보며 물었다.

“찾으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보통 의상실은 귀부인과 영애들의 놀이터와 같은 곳이었다. 특별한 날에 와서 드레스와 주얼리를 사고 기분이 울적할 때는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 방문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귀부인들의 말이 많이 오가는 곳 중에 하나가 바로 의상실이었고, 그 의상실을 운영하는 마담 세실 역시 많은 소문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와 헤레이스에 대한 소문 역시 넘치도록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담 세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

“부인의 드레스를 선물하려고 하는데.”

“선물하시는 거군요…!”

마담 세실의 고개가 휙 돌아가며 놀라는 것이 보였다. 놀란 것을 티 내지 않으려 웃음으로 감췄지만 잠깐 사이에 그녀의 눈이 커졌었다.

그녀가 놀란 이유는 명확했다. 황녀의 일방적인 구애로 성공한 결혼. 헤레이스는 그런 황녀를 지긋지긋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뭐,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데 결혼하자마자 나와 헤레이스가 함께 의상실을 방문한 것도 모자라, 헤레이스가 내게 드레스를 선물하겠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마담 세실이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공작님께서 자상하시네요. 최선을 다해서 만족하실 수 있는 드레스를 만들겠습니다.”

그녀의 말투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평소에 입을 드레스를 한 벌 맞출 거야.”

“아니. 연회용 드레스로 여러 벌 맞출 거네.”

“?”

내가 놀란 눈으로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사벨로 인해 더러워진 드레스에 대한 보상. 그것이 이번 방문의 목적이었다. 그러니 드레스는 평상시에 입는 드레스로 충분했다.

내 시선을 받은 헤레이스가 말했다.

“이제 곧 황궁 연회가 있지 않습니까.”

얼마 후, 황궁에서 매년 주최하는 연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헤레이스와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와 나는 언제나 형식적인 파트너에 불과했고, 연회 준비와 연회장에서의 활동 모두 함께한 적 없었다.

그러니 헤레이스의 대답은 나를 납득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저와 부인이 결혼하고 처음으로 참석하는 연회이니 제가 직접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왜요.’라고 물어볼 뻔했지만, 바로 앞에 있는 마담 세실의 존재 때문에 참았다.

얼핏 애정으로 가득한 달콤한 말처럼 들리는 대화였다. 과거에 나라면 그대로 속아 넘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부인이 입고 걸치고 사용하는 모든 물건이 공작가의 것이 될 테니까요.”

나를 빤히 바라보던 헤레이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의미심장해서 정말 그의 말대로 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괜찮습니다. 제 것은 어차피 대부분 황궁해서 준비해 줍니다.”

내가 입는 것, 착용하는 것, 사용하는 것. 대부분 내가 황궁에서 지낼 때부터 담당하던 자들이 내 취향에 맞춰 제작한 것들이었다. 루이스는 정기적으로 내게 그것들을 보내곤 했다. 내 물건은 앞으로도 대부분 황궁의 것이었다.

나와 헤레이스 사이에 알 수 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점점 어색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마담 세실이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우선 천천히 보고 골라 주세요.”

마담 세실의 친절한 말에 제발 그만해 달라는 간절한 부탁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나와 헤레이스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스케치북을 확인했다.

내가 스케치북에서 목과 쇄골이 드러난 드레스를 가만히 보고 있자, 헤레이스가 말했다.

“부인은 목이 드러난 것보다 어깨를 강조한 드레스가 어울립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보고 있던 스케치북을 가리켰다. 어깨 라인이 드러날 수 있도록 윗부분에 장식을 최소화한 드레스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 드레스는 예뻤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헤레이스가 가리킨 드레스가 그려진 종이를 뒤로 넘겼다. 마담 세실 의상실에 오고 나서 생각난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부터 앞으로 5년 동안에 제국에서 유행했던 스타일의 변화. 그리고 가지고 있는 기억을 써먹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헤레이스와 눈길을 거두고 마담 세실에게 내가 고른 드레스를 보여 줬다.

“마담. 내 드레스는 이걸로 할게요.”

“벌써 정하셨나요?”

마담 세실이 눈을 빛내며 스케치북을 확인했다.

“이건 조금…계절감이…….”

마담 세실은 내가 고른 드레스를 보고 머뭇거렸다. 최대한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녀가 내 앞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고른 드레스는 헤레이스가 보여 준 드레스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이었다.

이제 곧 다가올 겨울을 말해 주듯이 날씨도 점점 쌀쌀해졌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려고 얇고 노출이 있는 드레스를 입던 여성들도 하나둘씩 옷을 덧입기 시작할 때였다.

내가 고른 드레스는 그런 시기에 전혀 맞지 않았다. 목과 가슴 부분이 시원할 정도로 깊게 파이고, 상체의 몸매를 부각하면서 아래는 펑퍼짐하게 볼륨을 강조한 드레스다. 누가 봐도 제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서 계절감 따위는 무시하는 드레스였다.

하지만 사실 이 드레스는 회귀 전 이맘때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타일이었다. 회귀 전에 나 역시 그 당시에 유행하던 드레스를 입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이었다.

연회에 참석할 때만큼은 헤레이스와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국에서 유행하는 스타일로 누구보다도 가장 아름답게 보이고 싶었다. 저녁에 있는 연회였지만, 새벽부터 하루 종일 준비했다.

그렇게 공들여서 차려입은 내 모습을 보자마자 그의 반응은 끔찍했다.

‘…옷이 그것뿐입니까.’

‘준비한 건 이것뿐인데……. 이상한가요?’

‘…출발하죠.’

그는 불쾌한 얼굴로 마지못해 출발했었다. 마차 안에서도 연회장 안에서도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를 위해 하루 종일 준비한 것이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나는 그 이후로 다시는 그런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다음 연회에서 유행에는 뒤떨어지지만 평소에 입던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자, 헤레이스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진짜 가지가지 했군.’

뭐가 그렇게 잘 보이고 싶었는지. 드레스 하나도 눈치 보면서 입었다니. 세상에 다시없을 호구가 나였다는 걸, 이미 한 번 죽고 난 후에 깨닫는 이 한심한 행태를 어쩌면 좋을까.

과거의 불쌍한 나를 위해서 이번에는 마음껏 입어 볼 생각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헤레이스에게 얽매여서 혼자 눈치 보고 참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움에 목숨 거는 여자들이라고 해도 쌀쌀한 날씨에 이런 스타일의 드레스만 입고 돌아다니는 건 무리였다. 이 드레스가 유행하게 된 데는 데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또. 내가 따로 제작 주문을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저희 의상실은 못 만드는 것이 없는 거로 유명하답니다.”

마담 세실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녀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간이고 쓸개고 모두 내어 줄 만큼 비위를 잘 맞췄다. 하지만 그녀가 물불 가리지 않고 폭발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자신의 작품이 무시당했을 때다.

그것을 모르고 말을 함부로 날리던 몇몇 귀족 영애들은 마담 세실의 의상실에 영원한 블랙리스트가 되었다. 제국의 최신 유행을 이끄는 마담 세실 의상실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사교계에서 역시 뒤처진다는 것과 같았다. 그만큼 마담 세실은 사교계에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어깨에 걸칠 레이스를 제작해 줘.”

“그럼요. 어렵지 않습니다.”

마담 세실이 생글거리며 웃었다.

“아니. 여기서 말고 다른 데 주문했으면 해.”

“어머……. 저희 의상실이 보유하고 있는 레이스 디자이너들은 제국 최고의 실력자들이랍니다.”

역시나. 마담 세실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미간이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분명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그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이것만큼은 디자이너 조시에게 특별 주문하고 싶어.”

그제야 마담 세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케이프 스타일 레이스인 것 외에는 그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만들어도 되는 조건이야. 물론 금액 역시 한도가 없는 주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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