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3장. 안 해! (8)
“…이런, 조시가 알면 굉장히 기뻐할 거예요.”
언제 자존심이 상했냐는 듯이 마담 세실이 환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디자이너 조시는 섬세한 작업으로 만드는 작품 모두 완성도가 뛰어났다. 하지만 고집불통이라 고객들의 요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만의 예술을 한다고 고집하는 외골수였다.
그래서 디자이너 조시는 비주류에 속했다. 마담 세실도 그를 디자이너로 탐내면서도 골치를 앓고 있었다. 다른 귀족 영애나 귀부인들과 끊임없이 트러블을 일으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주문을 한다면, 앞으로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회귀 전 상황대로 흘러간다면, 디자이너 조시는 어떤 심정의 변화인지 예술을 버리고 상업적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으니까. 그와 동시에 레이스 케이프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는 변두리 디자이너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디자이너로 발돋움했었다.
레이스 케이프가 유행이 시들해질 무렵에는 그 자리를 대신하듯 얇은 천을 레이스 대신 활용하거나 혹은 보석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스타일들이 유행했다.
드레스와 레이스를 주문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딸랑. 경쾌한 방울 소리와 함께 의상실 문이 열리고 발걸음부터 가벼운 영애가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주문한 드레스가 완성됐다고…공작님!”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할 말을 늘어놓던 높은 톤의 목소리를 가진 영애는 헤레이스를 발견하자마자 화색이 되며 그의 품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나방처럼 저돌적인 모습이었다.
빨간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영애는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어 새침하면서도 매혹적인 얼굴이지만 어딘지 백치미가 느껴졌다.
“!!”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지켜보던 마담 세실과 직원들의 눈이 커지고 놀라는 것이 보였다.
벌써부터 스캔들이라니. 지금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나와 헤레이스, 그리고 그의 내연녀의 만남이었다. 내일 주간 신문에 대서특필되고도 남을 사건이었다.
귀족이라면 이런 일로 화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사실만이 중요하고 품위를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그녀에겐 예외였지만. 영애는 비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주위에 누가 있는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는 표정이 드러나지 않은 얼굴로 영애를 보고 있었다.
삼자대면이었지만 나는 이방인인 것 같은 상황. 사실, 익숙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영애 역시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결국, 내가 먼저 그녀를 불렀다.
“카일라 자작 영애.”
카일라 자작 영애. 그녀는 대부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후, 재산의 일부를 제국에 받친 대가로 작위를 받은 프랫 자작가의 영애였다. 비록 하급 작위였지만, 넘치는 부로 웬만한 백작가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콧대가 높은 가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회귀 전에 어느 시점인가부터는 헤레이스의 내연녀이기도 했다. 내가 헤레이스와 결혼한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며 찾아와 내가 뒷목을 잡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내가 잊을 리 없었다.
헤레이스의 내연녀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자신이 그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 없이 오히려 드러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드디어 돌아본 카일라가 나를 향해 능청스럽게 말했다.
“공작 부인께서도 계셨군요.”
마치 몰랐던 것처럼. 이제야 본 것처럼 카일라가 뻔뻔하게 말했다.
“어머…제가 실수한 건가요?”
카일라는 마치 미안한 것처럼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고 눈을 깜박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렸다. 넘치는 부가 자랑인 가문과 어리고 예쁜 외모.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젊은 혈기와 치기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너무도 쉽게 속내를 드러내고 상대를 도발했다. 마치, 지금처럼.
지금도 그녀는 헤레이스에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당신이 아내이지만 그와 사랑하는 건 나야.’ 그녀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저 눈빛. 저 미소. 저것들이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저 애는 모르겠지.’
고작 자작가의 영애.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녀가 감히 내게 이럴 수 있는 것은 결혼 전, 내가 헤레이스에게 몇 번이고 매달리던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귀 전에는 헤레이스의 내연녀가 내게 저런 눈빛으로 무장한 채 거만한 태도를 취할 때마다 나는 떨리는 손을 꼭 부여잡고 태연한 척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런 일들에 흥분해서 싸우고 질투해서 헤레이스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순진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에일린.’
사랑이라는 감정이 과거의 나를 집어삼켰듯이. 인제 보니 카일라 역시 사랑이라는 치기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과시할 생각뿐. 그 모습이 가소로웠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카일라를 가만히 보고만 있자,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무마시키고자 나선 사람은 의상실의 주인인 마담 세실이었다. 그녀가 카일라에게 마담 특유의 친절한 영업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카일라 자작 영애, 주문하신 드레스입니다.”
세실 의상실의 고용인이 가져온 드레스를 마담 세실이 건네받은 뒤, 카일라에게 건네주었다.
“한번 입어보시겠어요.”
“아니, 괜찮아.”
마담 세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카일라가 드레스를 자신의 앞에 대보았다.
“공작님, 이것 좀 봐요. 공작님이 절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가서 그런지 너무 예뻐요.”
하지만 마담 세실의 노력이 소용없게도 카일라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 반응도 없는 헤레이스에게 자신의 드레스를 자랑하느라 정신없었다.
드레스를 선물하겠다고 데려온 곳에서 내연녀와의 삼자대면이라. 과거와는 장소는 다르지만, 결국 상황은 그대로였다. 피식, 비릿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천천히 뗐다. 그리고 조금 전에 카일라가 한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었다.
“실수가 아니라 실례한 거겠지.”
“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당황한 듯 카일라의 눈이 커졌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억지로 입꼬리를 늘리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프랫 자작가는 기본 예의도 가르치지 않나 보군.”
“부, 부인…!”
“입조심 하도록! 내가 그대의 친구라도 되는 건가.”
“네…?”
카일라가 당황해서 눈만 깜박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몰아세울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감히 그대가 함부로 말해도 되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
내 일갈에 카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분함에 드레스를 쥐고 있는 양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카일라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를 정면에서 응시했다. 입술은 굳게 다문 채 눈만 반으로 접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그대가 어린 치기로 지나치게 씩씩한 건 좋지만…그대의 치기로 인한 책임은 그대의 가문이 져야 한다는 걸 알아야지.”
“책임…이요?”
“내가 어떤 식으로 책임을 요구하더라도…감당할 수 있는가?”
카일라는 얼이 나간 듯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마담 세실을 바라봤다.
“마담.”
“네.”
마담 세실의 대답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행동을 똑바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공작 부부, 그것도 황녀인 내가 의상실에 방문했다. 그런데 헤레이스의 내연녀가 갑자기 나타난 상황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의상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여기서 그녀가 어설프게 대처했다가는 의상실과 자신에 대한 가치가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역시 상황 파악은 빠르군.’
나는 입꼬리를 한쪽으로 씨익, 올리며 흘리듯 툭 말했다.
“관리가 허술하군.”
“죄송합니다.”
내 말의 무게를 느끼고 행동하는 것은 마담 세실의 몫이었다. 마담 세실은 곧바로 직원들에게 눈짓을 한 후, 카일라에게 다가갔다.
우선 이 정도만 하자. 어차피 카일라는 분수를 모르고 또다시 사고를 칠 것이 분명했다. 이후의 상황은 마담 세실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나가는 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전에 카일라와 헤레이스를 흘깃 바라보았다. 카일라는 어느 순간 헤레이스에게서 떨어진 채 서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쏘아붙일 때도 그 상태이기는 했다. 다만, 헤레이스와 카일라의 모습을 자세히 보지 않아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과정이 지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헤레이스는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문을 향했다.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나는 그 한마디를 헤레이스를 향해 남기고 먼저 의상실 밖으로 나갔다.
헤레이스와 카일라, 두 사람이 내연 관계이든 아니든 관심 없었다.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방진 카일라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이런 애한테 당했었다니.’
단순히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고 오만한 카일라. 그녀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가장 멍청한 건 나였구나.’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영애에게조차 당했었다니. 과거의 나에게 화가 났다. 과거의 생각 때문에 내가 어두운 얼굴로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앨버트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어째서 먼저 나오셨습니까.”
그의 얼굴에 걱정이 담긴 것이 보였다. 의상실의 유리 너머로 헤레이스와 카일라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 헤레이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먼저 돌아가지.”
공작가로 먼저 돌아가겠다고 말하는데, 딸랑-. 경쾌한 방울 소리와 함께 헤레이스가 나왔다. “으어어엉-!!” 잠깐 열린 문틈 사이로 카일라 영애가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