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4장. 황궁 생활 (2)
루이스는 헤레이스에게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일 뿐 진심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 허공 위에서 화려하게 움직이던 루이스의 검 끝이 피를 원하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역시. 이곳에 있었던 것은 모두 계획된 게 분명하다. 우리를 부르고, 올 때를 맞춰서 여기서 기다린 거다. 그 이유야 당연히 그거겠지.
‘한마디로 위협용.’
또 다른 말로는 협박용. 루이스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 원인을 제공한 것 역시, 나일 테고. 뿌듯해야 할지, 유치함에 고개를 내저어야 할지 미묘했다.
방금 전까지 루이스를 상대하던 병사가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토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구른 건지 그의 옷은 흙으로 엉망진창인 데다가 머리도 풀어헤쳐져 있었다. 그런데 루이스는 이마에 난 몇 방울의 땀을 제외하고는 숨도 거칠지 않은 것이 언제 대련을 했냐는 것처럼 멀쩡했다.
나는 루이스와 헤레이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헤레이스의 검술 실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과거에 그가 반역을 일으킨 후에야 헤레이스의 진짜 실력을 알게 되었다.
원래라면 압도적으로 루이스가 우위였지만, 지금은 두 사람 중에 누가 이길지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두 사람이 대결을 한다고 해서 헤레이스가 실력을 다 보여 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오히려 걱정해야 할 것은 검을 맞대고 있다 보면 가끔씩 이성을 잃는 오라버니의 검 끝이 무의식적으로 헤레이스의 몸 어딘가를 관통하는 사고가 벌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공작을 연습 도중에 죽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었다.
“부디 한 수 부탁드립니다.”
헤레이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고 일어날 때였다. 옆에서 지키고 있던 시종장이 시녀에게 보고를 받은 후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폐하. 준비가 다 됐다고 합니다. 대련을 하신다면 준비한 것이 식을 텐데……. 다시 준비하라고 할까요?”
“…대련은 다음에 하지.”
시종장의 보고에 검의 날 부분을 매만지던 루이스가 아쉽다는 듯이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나와 헤레이스는 그 뒤를 따랐다.
루이스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 시종장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내게 눈짓을 했다. 일부러 루이스를 말리려고 중간에 말을 걸었던 것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루이스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황녀궁 뒤에 있는 작은 후원이었다. 다른 궁에 있는 후원에 비한다면 작은 규모였다. 하지만 후원에 있는 나무는 물론 풀 한 포기마저도 내가 직접 가꾼 곳이었다.
‘여기서 갖는 티타임을 참 좋아했었는데.’
이렇게 오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티타임을 가질 수 있게 각종 디저트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길이 끄는 것은 이 공간 그 자체였다. 비록 내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동안 비어 있었는데도 내가 없다는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있었을 때 그대로 모든 것이 관리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들떴다.
루이스가 가장 먼저 찻잔에 입을 갖다 댔다. 한 모금 삼키자마자 인상이 구겨졌지만, 아무 말 없이 다시 한 모금 더 마셨다. 마치 술을 마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마시는 건 엄연히 차였다.
루이스는 일부러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와 차를 준비해 놓은 거다. 나는 감동에 젖어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실수로라도 눈이 마주칠까 봐 열심히 앞만 보고 있는 모습마저 반가웠다.
사실, 루이스는 티타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정적인 분위기는 그가 견디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였다. 티타임을 가질 때면 언제나 인상을 구긴 채, 이런 맛도 없는 걸 무슨 생각으로 마시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곤 했었다.
‘아무리 마셔도 네 취향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혼자 마시는 차를 싫어하는 나를 위해서 오라버니는 틈날 때마다 이렇게 나와 함께 시간을 가졌었다. 술이 제 짝마냥 어울리고 꽃을 띄운 차와는 상극인 오라버니였지만, 그런 그가 겨우 한다는 투정은 언제나 이런 거였다.
“오랜만에 돌아오니 너무 좋네요.”
차를 음미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사람과 내 입맛에 딱 맞춰진 차와 디저트를 먹는 이 감각. 모든 것이 완벽했다.
생각 외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비록, 중간중간 헤레이스와 루이스가 날 선 신경전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것만 무시한다면 익숙한 공간 내 입맛에 딱 맞는 차, 간간이 이어지는 별것 아닌 대화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물론, 별것 아닌 대화에서조차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긴 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까. 루이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늘 오느라 고생했어. 이만 돌아가.”
이제 그만 티타임을 정리하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일부러 황궁에 오라는 소환장을 보내온 것은 루이스였다. 수도에 돌고 있는 소문에 관한 얘기든 다른 것이든 뭔가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근데 루이스는 별다른 말 없이 티타임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라고 하고 있었다.
‘그럼 왜 부른 거지.’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루이스는 더 할 말이 없어 보였다. 결국, 나와 헤레이스는 공작가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싱거운 기분이 들었다.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루이스가 헤레이스를 불렀다.
“헤레이스 공작.”
“예, 폐하.”
“그대만 돌아가도록.”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를 에스코트하려던 헤레이스가 멈칫하며 루이스를 봤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 나의 오라버니이자 황제 루이스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에일린. 황궁으로 돌아오는 게 어때.”
“폐하!”
무심하게 말했지만, 결코 빈말은 아니었다. 그것을 나와 헤레이스 모두 알아차렸다.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갑자기 무슨 말이십니까.”
헤레이스는 루이스에게 반발했지만, 루이스는 헤레이스를 무시한 채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갑자기 튀어나온 제안, 루이스의 한마디로 일어난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놀라서 흥분한 헤레이스와 무표정하지만 화난 것이 분명한 루이스, 그리고 우리의 눈치를 보는 시종장을 비롯한 시녀와 시종들. 루이스의 말에 주위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여기서 잘못 반응을 보였다가는 후환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시녀와 시종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필 그중에, 타이밍이 나빴던 시녀 한 명이 뜨거운 물이 담긴 티포트를 가져오다가 루이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몸이 휘청거렸다. 뜨거운 물이 출렁거리며 티포트 밖으로 새어 나왔다. 다행인 것은 몸이 완전히 중심을 잃기 전에 정신을 차린 덕분에 새어 나온 물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만약, 물이 새어 나왔다면 소동이 벌어졌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화를 방해한 죄로 시녀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위에서 고요한 소란이 일었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나뿐이었다. 헤레이스는 나와 루이스를 번갈아 보고 있었고, 루이스 역시 시녀의 일 따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건 억지이십니다.”
헤레이스가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어차피 반쪽짜리 부부인데 뭐가 억지지.”
“제 부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집을 비우는 것은 남편인 제가 허락할 수 없습니다.”
헤레이스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루이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눈은 얼음장처럼 여전히 차가운데 한쪽 입술 끝만 올라가 있는 모습은 그냥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웃기는군. 지금 누가 나에게 허락할 수 없다는 거지? 소문을 들어 보면 결혼했다고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대가 나설 자격이 되는 건가?”
역시, 카일라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이건 그에 대한 일침이었다. 그 말에 헤레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이스는 여전히 헤레이스를 비웃고 있었다.
나는 다시 루이스와 헤레이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사이에서 고요한 사람은 나 혼자만인 것 같았다.
‘황궁이라….’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루이스의 제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때였다. 헤레이스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돌아가시죠.”
헤레이스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는 것이 아무래도 루이스와의 대화는 결렬된 것이 분명했다. 나는 루이스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손을 내민 의미는 함께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손을 잡지 않고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러다 헤레이스를 보았다. 헤레이스는 어느새 루이스를 외면한 채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스 역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부인, 인제 그만 저와 돌아가시죠.”
“…….”
내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답답하고 초조한 듯 보이는 헤레이스가 나를 불렀다.
“부인…….”
내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아니, 막 열기 시작했을 때였다.
언제 뽑았는지 모를 검이 헤레이스의 목을 향해 겨눠져 있었다. 그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루이스였다.
“이대로 내빼면 안 되지.”
루이스가 헤레이스의 목 안쪽으로 검을 더 깊숙이 갖다 댔다. 헤레이스의 목에서 검이 그린 선을 따라 피가 살짝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루이스를 말렸다.
“폐하, 그만하세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무시하기로 결심했지만. 여기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다행스럽게도 루이스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검을 내려놓았다.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상황을 마무리하려고 할 때였다. 루이스가 여전히 검집에 넣지 않은 검을 허공에 한 바퀴 휘두르며 말했다. 그의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왠지 불안해졌다.
“그럼 좀 전에 하려다 못한 거로 결정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