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도 바쁜 황녀님-16화 (16/124)

?제16화. 4장. 황궁 생활 (3)

“그게 무슨.”

두 사람의 미묘한 신경전을 지켜보는데, 루이스의 말에 순간 떠올랐다. 루이스가 말한 좀 전에 못 했던 것은 분명…….

루이스가 헤레이스를 도발하며 내뱉었다.

“왜. 겁이라도 나는 건가? 질 것 같아서.”

“…하겠습니다.”

헤레이스가 넙죽 받아들였다. 뜬금없이 황궁 안에서 황제와 공작의 검술 대결이 펼쳐질 판이다. 상황이 점점 묘하게 흘러갔다.

‘왜 나를 두고 두 사람이 싸워?’

나를 사이에 둔 남자가 맞긴 하는데. 둘 다 나에게 푹 빠져 사랑을 구걸하는 남자여야지, 왜 한쪽은 시스터 콤플렉스 절정인 오라버니 루이스에, 한쪽은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반역자 남편 헤레이스인 거야?

갑자기 지금 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 여유 따위 없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나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럼 당장 할까.”

“그러시죠.”

헤레이스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결연한 모습을 보며 루이스가 여유로운 얼굴을 한 채 입술 한쪽을 비죽 말아 올렸다.

“꽤나 자신만만하군.”

그를 시험하는 말투였다.

평소에는 바로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였을 헤레이스였다. 그의 진심이 무엇이든 간에 표면적으로 그는 언제나 루이스 앞에서 자세를 낮추었다. 그런데 헤레이스는 여전히 루이스를 향해 도전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는 자신 없는 대결은 하지 않습니다.”

“허, 그래?”

헤레이스의 선전포고에 루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장난에 가까웠던 표정이 험악해지더니 진지하게 돌변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깨달았다. 이거 위험하다.

“그 말이 허풍인지 아닌지,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

헤레이스에 이어 루이스마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연무장으로 향할 기세였다. 일촉즉발,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로 두 사람이 대결을 펼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두고두고 회자되며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결국, 내가 두 사람을 불렀다.

“잠시만요.”

루이스와 헤레이스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언제든지 싸우러 나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내세우려는지 살기가 등등한 눈빛이 내게 모였다.

“그만두세요.”

“싫은데.”

내 말에 루이스가 단칼에 거절했다. 가차 없는 대답에 순간 헤레이스가 있는 것도 잊고 그를 흘겨볼 뻔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루이스를 포기하고 헤레이스에게 말했다.

“후우…. 공작님이라도 그만하세요.”

“부인, 왜 그러십니까.”

그런데 헤레이스마저 내게 왜 말리냐는 얼굴이었다. 이대로는 두 사람 다 내 말을 무시하고 연무장으로 향할 것 같았다.

헤레이스와 루이스를 빤히 바라봤다. 두 사람을 향해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제 대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부인. 그게 무슨 의미인지….”

“대답이 뭔데.”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내 할 말만 이어 나갔다.

“가도 제가 결정하고. 가지 않아도 그 결정은 제 몫입니다.”

두 사람을 향해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싸우고 싶으면 싸우세요. 단, 누가 이기고 지든. 결정은 제 맘입니다.”

여전히 두 사람이 대결을 펼친다고 하면 그건 명분 없는 개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로 견제하면서 기세가 등등했던 두 사람이 한순간에 맥 빠진 얼굴이 되었다.

루이스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갑자기 힘이 빠져 나른한지 팔 한쪽에 몸을 기댄 채 나를 봤다.

“그래서 어쩔 생각인 건데.”

루이스가 내 대답을 재촉했다. 내 대답 여하에 따라 결정을 내릴 것처럼.

사실 두 사람의 대결을 말리는 것이 중요했을 뿐,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대답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내가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루이스가 투덜거리듯이 툭 내뱉었다.

“결혼하자마자 날 보고 펑펑 울더니. 벌써 잊은 거냐.”

“!!”

차라도 마시고 있었으면 분명 사례에 걸려 콜록거렸을 것이다. 그만큼 당황했다. 과거로 다시 돌아와서 살아 있는 루이스를 만났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고맙고 미안하고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이렇게 두고두고 회자되기에는…너무 창피했다.

이런 순간에 그 얘기를 꺼내다니.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루이스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회귀하기 전, 헤레이스와 결혼을 한 후에는 루이스와 제대로 된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강하고 멋대로인 성격이라고 해도, 그는 황궁에서 오랜 시간 혼자였다.

‘그때도 내가 찾아오기를 기다렸을 거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헤레이스의 반역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오라버니, 루이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돌아온 건지는 몰라도 힘들게 돌아온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전과 똑같은 후회를 남길 수 없었다.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헤레이스가 갑자기 공작가로 함께 돌아가자며 끼어들었다.

“부인, 이만 돌아가죠.”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헤레이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이스가 받아쳤다.

“에일린에게 돌아갈 곳은 거기가 아니야. 황궁이지.”

황궁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었다.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이 이곳에 있었고. 내게 더 익숙한 곳 역시 황궁이었다. 물론, 5년이라는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나에게 황궁은 이미 이전과 같은 느낌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리운 공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시선이 나를 향한 채 다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지금 부인이 사는 곳은 공작가입니다.”

“그래 봤자 한 달은 지났나?”

“하지만 앞으로 몇십 년을 더 살아갈 곳입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루이스는 지금까지의 시간을 얘기했고, 헤레이스는 앞으로의 시간을 얘기했다.

하지만 헤레이스의 말은 틀렸다. 나는 공작가에서 몇십 년을 살아가지 않는다. 내가 그곳에서 살아갈 시간은 5년, 딱 그만큼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살아갈 시간까지 다 합쳐도 내가 황궁에서 살아온 시간보다 공작가에서 살 시간이 짧았다.

그때, 밖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시종장이 계속 눈치를 보면서 인상을 험악하게 쓰고 있는 루이스에게 다가왔다. 걸음은 루이스를 향해 앞으로 걷는데 몸은 뒷걸음질 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폐하, 율레스 재상이 찾아왔습니다.”

루이스가 단호하게 답했다.

“바쁘다고 전해”

하지만 돌아갈 줄 알았던 시종장은 쭈뼛거리면서 루이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만나 주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지만 루이스는 인상을 한 번 쓸 뿐이었다. 고집을 꺾는 것은 그의 사전에 없는 일이었다.

“바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별거 아닌 거로 호들갑 떠는 거다. 신경 쓰지 마.”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루이스는 귀찮은 얼굴로 손까지 내저으며 답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신경 쓰였다.

율레스 재상은 오라버니의 오래된 충신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헤레이스의 편을 들면서 에드문드 황자를 황위에 올리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변심하는 데는 오라버니의 몫이 컸다. 그는 일편단심 짝사랑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라버니를 위해 충언을 했지만, 언제나 묵살당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 내막까지는 다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재상의 변심은 반역이 성공할 수 있게 하는 데 너무도 큰 역할을 했다.

그의 변심에는 분명 감정적인 배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만약, 루이스가 달라진다면 재상 율레스는 앞으로 있을 반역에 편을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저 사람의 변심을 막을 수 있다면, 그럼 분명 앞으로의 미래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저는.”

내가 운을 띄우자 팽팽하게 서로를 보고 있던 루이스와 헤레이스가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나는 바로 대답하기로 했다.

“당분간 황궁에서 지내겠습니다.”

어차피 내 대답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더 이상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얼른 이 상황을 정리하고 루이스를 재상에게 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내 말에 헤레이스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들은 것처럼 충격에 빠진 얼굴을 했다. 반대로 루이스는 마치 싸움에서 이긴 세 살짜리 어린애처럼 헤레이스를 보며 얄밉게 입꼬리를 한쪽으로 쓰윽 올렸다.

사실 황궁에서 당분간 머무른다는 선택지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괜찮은 방법이 될 것 같았다.

오라버니가 폐위당하며 죽는 미래. 그 뒤에 내가 사랑하던 남편과 그의 정부가 지켜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나. 이 미래의 시작은 반역을 일으킨 헤레이스 공작에 의하여 나의 오라버니, 루이스 황제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서부터다.

그의 반역이 쉽게 성공한 데에는 율레스 재상의 변심이 큰 역할을 한 것도 있지만, 폭군으로 악명이 자자한 오라버니를 지지하는 귀족이나 백성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두에게 원망을 받는 존재. 그렇기에 강력해 보이기만 하던 황권은 순식간에 무너졌었다.

그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자. 오라버니가 폭군이 아닌 성군이 된다면, 반역의 무리들은 폭군을 폐위시킨다는 명분을 잃게 될 것이고, 오라버니를 지지하는 백성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전과는 달리 쉽게 반역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역시…….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율레스 재상의 뒷모습을 봤다. 저 사람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귀족들이 존경하고 백성들이 사랑하는 재상.

그를 오라버니의 편으로 만들려면 아무래도 내가 황궁에 머무르면서 오라버니를 설득하는 것이 중요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