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4장. 황궁 생활 (4)
“당분간입니다. 결혼하고 잠시 친정에 머무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내 확고한 대답에 오라버니는 뭔가 후련한 얼굴이 되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즐거워 보이기도 한 모습을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자리에 일어났다.
“에일린까지 그렇다고 하니. 결정됐군.”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는 뜻이었다. 또한, 헤레이스의 의견 따위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헤레이스는 주먹을 꽉 쥐었지만, 황제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오는 건 함께였어도 돌아가는 건 혼자겠군.”
루이스의 한마디로 모든 것이 결정됐다. 공작가로 돌아가는 것은 헤레이스 한 사람이었다.
* * *
제국의 무서울 것이 없는 황제가 유일하게 아끼는 혈육이자 동생인 황녀 에일린. 거기에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다고 칭송받는 아름다운 외모까지. 과연 누가 황녀와 결혼하게 될까. 모든 제국민의 궁금증과 기대감을 한 몸에 받았었다.
그런 그녀에게 비록 오랫동안 이어져 온 명망 있는 공작가라고 하지만, 현재는 기울어 가고 있는 가문인 헤레이스 공작과 결혼한다는 것은 제국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그 결혼이 헤레이스 공작의 청혼이 아닌 황녀가 한눈에 반해서 열렬한 청혼과 설득 끝에 성사된 결혼이라는 소식은 제국민이 경악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제국의 그 누구도 축복하지 않는 결혼을 대가로 공작가에 있는 모든 빚을 황가에 의해 탕감받기로 약속받았다.
그럴수록 루이스는 헤레이스가 못마땅했다. 에일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했을 뿐, 지금이라도 당장 결혼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루이스는 절대로 에일린을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결혼을 대가로 황가로부터 공작가의 모든 빚이 변제되는 것. 이것은 공작가가 받는 대가인 동시에 헤레이스의 발목을 잡는 족쇄이기도 했다. 그것을 헤레이스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루이스는 결혼 식 전, 헤레이스를 따로 불렀다. 그가 에일린의 무조건적인 마음에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될 거라는 착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경고를 할 생각이었다.
“에일린을 죽게 놔둘 수는 없어서 당장은 결혼을 허락했지만.”
루이스는 한참을 헤레이스를 내려다보았다. 싫은 기색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명백한 혐오가 담긴 시선이 똑바로 헤레이스를 향한 채로 루이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놈이 에일린의 진짜 남편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헤레이스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결혼을 하는데 진짜 남편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니. 웃기는 얘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말조차도 헤레이스는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헤레이스가 루이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저는 남편이 아닌 어떤 존재여야 하는 겁니까.”
루이스의 눈썹이 위로 올라가며 얼굴이 험악해졌지만, 헤레이스는 꿈쩍하지 않았다. 헤레이스는 지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애초에 제가 원하던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에일린이 밀어붙인 결혼이었다. 헤레이스가 결혼을 승낙하기 전에 루이스가 먼저 에일린에게 손을 들고 허락을 해 준 결혼이기도 했다. 마지막에 하는 수 없이 승낙한 것은 누구도 아닌 헤레이스였다. 그런데 정작 진짜 남편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루이스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헤레이스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날카로운 눈매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네놈이 정말로 하기 싫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
뼈를 때린 것처럼 울리는 말이었다. 헤레이스가 정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에일린과의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만 했다면. 에일린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결국 무너져가는 가문을 도와준다는 대가로 헤레이스는 할 수 없는 척 결혼을 승낙했다.
루이스가 헤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뱀 같군.”
마치 아닌 것처럼 빠져나가면서 진짜 속내를 숨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루이스는 가장 불쾌했다.
“그렇게 인정하기 싫으시면 허락하지 마셨어야죠.”
하지만 헤레이스는 루이스의 말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할 말을 할 뿐이었다.
“결혼을 하면 폐하께서 인정하시지 않아도 부부가 됩니다.”
“……!”
“그럼 저는 에일린의 남편이 되는 겁니다.”
루이스의 진짜 남편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거슬렸다. 그래서 헤레이스는 루이스이 말에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끝끝내 그의 말을 부정하며 받아쳤다.
루이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 위로 핏줄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 순간 루이스의 호위가 헤레이스의 목에 검을 겨눴다. 살기를 전혀 숨기지 않은 상태로. 언제든지 자신의 주군인 루이스가 신호를 보내는 순간 헤레이스의 목을 벨 기세였다.
루이스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주제를 알아야지.”
그 말 한마디에 음산한 분위기가 깔렸다. 루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덧붙였다.
“잊지 마라. 네놈의 목 정도는 언제든 내 손에 끝날 수 있다는 것을.”
루이스가 호위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헤레이스의 목에 검을 겨누던 호위가 검을 거두고 다시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 * *
에일린이 황궁에서 머물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황궁에서 지내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루이스의 말과는 달리 에일린은 헤레이스와 함께 공작가로 돌아갔다.
아무리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공작가의 방을 비우고 황궁에서 지내려면 최소한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공작가에 들리지도 않고 바로 황궁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잠시 들렀다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한 보여 주기 식에 가까웠다.
에일린이 황궁에서 머물기 전에 헤레이스는 루이스를 찾아왔다.
헤레이스가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루이스는 평소 재상을 비롯한 귀족들과 회의를 할 때도 제대로 차려입지 않는 정복을 차려입고 그를 맞이했다. 정복을 입은 루이스는 평소에 보기 힘들었던 황제의 위엄과 권위가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이스는 관심은 없지만 예의상 물어본다는 것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지?”
하지만 헤레이스는 루이스의 반응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곧 부인이 황궁에서 머물 테니, 그 전에 인사를 드리려 찾아왔습니다.”
“인사…?”
루이스가 헤레이스의 인사라는 단어를 되짚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헤레이스 역시 루이스의 비웃음을 모른 척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것도 매우 정중하게.
“며칠이겠지만 그동안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말입니다.”
그럴수록 루이스는 헤레이스를 향해 조소를 날리면서 어쩐지 기분이 불쾌했다. 말을 비꼬아서 하고 싶게 만드는 놈이야. 루이스는 헤레이스를 보며 생각했다.
“황궁이 집인 아이가 돌아오는 것뿐인데 걱정이 지나치군.”
“‘집이었던’ 곳이니까요.”
루이스는 집이라고 말하고 헤레이스는 집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비슷하지만 명백하게 다른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이제 제 부인입니다.”
“그래서 결혼하자마자 황궁에 머물겠다고 하는 건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이이기에 에일린이 그런 선택을 한 거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그 말이 충분이 전달됐다.
“그렇다고 저희가 부부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헤레이스의 말에 루이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불쾌함이 만면에 드러났다.
“역시 난 네놈이 맘에 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에일린과 결혼한 것도 불쾌하고.”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헤레이스는 루이스의 말에 덤덤하게 답했다. 그럴수록 루이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결국,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헤레이스가 있는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똑바로 해. 그러지 않으면 절대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헤레이스에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루이스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루이스는 당장이라도 헤레이스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 같은 살의를 띤 채 다가가고 있었다.
“이미 결혼은 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만. 결혼이 곧 끝은 아니니까.”
그 말은 많은 가능성을 열어 둔 말이었다. 루이스는 헤레이스에게 다가가다 멈췄다. 더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채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이 엄청났다.
그때였다. 갑자기 헤레이스가 루이스를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두 걸음, 세 걸음 앞으로 간 헤레이스가 루이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십시오.”
헤레이스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만큼은 선명하게 전달됐다. 순간 덤덤했던 헤레이스의 얼굴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치 제국의 황제인 루이스를 향해 경고를 하는 것처럼.
“걱정은 감사하지만…제 부인입니다. 제가 알아서 잘할 겁니다.”
헤레이스가 잠시 말을 끊은 뒤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 루이스를 쳐다보았다. 지지 않는다는 듯이 강한 눈빛을 한 채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지나친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웃기는군.”
루이스는 보란 듯이 비웃어 주었다. 헤레이스의 말이 같잖게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레이스 역시 황제를 상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잠시 쉬게 하는 겁니다. 연회가 끝나면 부인을 데리고 갈 겁니다.”
헤레이스는 루이스에게 무려 통보를 하고 돌아섰다. 루이스는 황당한 듯 헤레이스의 뒷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루이스가 비뚜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일지 마지막일지 어떻게 확신하고.”
“황궁에 있는다고 부인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앞으로 부인을 보러 황궁에 자주 오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것도 미리 인사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