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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18화 (18/124)

?제18화. 4장. 황궁 생활 (5)

“과연 그럴까.”

헤레이스가 에일린을 보러 자주 황궁을 찾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루이스의 눈빛이 반짝이며 한쪽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렸다. 내가 만나게 놔둘 것 같으냐, 하는 의미가 명백하게 담겨 있었다. 루이스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며 입을 벌렸다.

“못 만날 거야.”

“네…?”

“에일린이 황궁에 있는 동안, 공작 그대는 황녀궁에 가는 것이 금해질 테니까.”

루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대가 출입한 사실이 보고되는 것과 동시에 병사들이 그대를 찾아갈 테니까. 공작 그대가 황궁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야.”

“…….”

“내 앞으로 끌려올 테니까.”

루이스가 회심의 미소를 씨익, 지었다.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거침없이 헤레이스를 향해 비웃었다.

“꼴좋군.”

마치 그동안 모아놓은 말을 내뱉듯이 통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였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헤레이스가 루이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루이스가 자신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거렸다. 헤레이스는 어쩐지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폐하를 만나러 오지요.”

“뭐…?”

“황궁에 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폐하뿐이라니…그럼 저는 폐하라도 뵈어야 하겠습니다.”

루이스가 황당하다는 듯이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친목이라도 다질 수 있겠군요.”

“설마 나랑 그걸 하겠다는 것이냐.”

“폐하가 아니면…누가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헤레이스가 회심의 미소를 씨익, 지어 보였다. 순간 루이스는 “윽….” 하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쩐지 헤레이스가 정말로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헤레이스가 덧붙여 말했다.

“술이라도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 * *

내가 황궁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복잡하지 않았다. 사실 별다른 절차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내가 황궁에서 머무르기 위한 모든 것이 이미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황궁으로 몸만 옮기면 끝이었다.

‘돌아왔어.’

여기저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황녀궁에 있는 침실은 물론, 드레스룸, 응접실, 욕실, 티룸은 물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후원까지. 모든 것이 그리운 것들이었다.

황궁은 나의 집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결혼 전까지 내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왔던 공간. 그렇기에 황궁에서의 생활은 굉장히 안락하고 편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맞춰져 있고, 황궁 사람들도 내 사소한 취향부터 싫어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선데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적응해야 했던 공작가와는 달랐다. 공작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헤레이스를 기다리고, 나를 싫어하는 시어머니 이사벨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비위를 맞춰야 했던 곳이었다. 도저히 내가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라고 여길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모든 것이 완벽했다.

내가 황궁에 돌아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제국이 시끄러웠다. 수많은 소문이 생겨나고, 말도 안 되는 억측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황궁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평화로웠다.

조금은 다른 의미로 모든 것이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황녀 전하! 이것 좀 처리해 주세요! 보강 공사가 필요한 궁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전하! 이것도 부탁드릴게요! 각 나라에서 보내온 조공과 선물들을 정리한 리스트입니다. 계속해서 창고에만 쌓이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각 궁의 시녀장을 비롯하여 하루가 멀다하고 나를 찾아왔다. 그동안 황궁의 살림살이가 아무것도 관리되고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꾸역꾸역 처리하다가 내가 돌아오자마자 달려와 처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녀님! 폐하께서…!”

게다가 루이스마저도 나의 평화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가 시종들을 곤란하게 만들 때마다 최후의 보루를 찾듯이 나를 찾아왔다. 그러면 나는 루이스를 말리러 달려가야만 했다.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더 바빠진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일까.’

황궁에서 지낸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황궁 안 사람들을 제외한 외부인들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나는 황궁에서 시녀장이 가져오는 서류들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하나를 처리하면 또 다른 서류가 기다리고 있었다.

“각 궁마다 시녀들을 재배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황궁 내 궁들이 텅텅 비어 있습니다. 황후궁과 황태자궁은 물론이고, 후궁들도 모두 비어 있으니 아무래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생겨서 문제입니다.”

보강 공사가 필요한 곳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황후궁과 황태자궁이었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서 아무리 관리해도 매년 문제가 발생하곤 했다.

“황후궁은 오래 비울 수 없는 곳이야. 거기부터 먼저 손 보도록 해.”

“네.”

“그리고 인력을 재배치하는 것은 우선 시녀장에게 맡기도록 할게. 아무래도 시녀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하는 게 좋을 테니까. 대신, 재배치를 하고 난 후 내게 보고서를 가져오도록 해. 검토할 테니.”

“네, 그리하겠습니다.”

황후가 있었다면 내 부재와는 상관없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고, 황궁에는 나 외에 황가의 인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일 처리가 마비되어 있었다.

“일단 대충 마무리된 건가.”

처음보다 많이 줄어든 서류 뭉치들을 보며 내가 물었다. 시녀장이 나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급한 것들은 진정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좀 쉴 테니까…….”

모두 물러나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밖에 있던 에밀이 문을 벌컥 열며 급하게 들어왔다. 입구에서부터 달려왔는지 숨이 살짝 거칠었다.

“아, 아기씨…화, 황제 폐하께서…!”

에밀의 말에 나는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의자 받침대를 누르며 일어났다.

“이번엔 어디로 가셨는데.”

“날이 좋으니 사냥을 해야겠다며 황궁 밖으로 나가셨다고 합니다…….”

“아, 골이야……. 가자.”

오라버니가 일은 안 하고 여기저기 내빼는 바람에 거기까지 쫓아다니느라고 황궁에서 지내는 하루하루가 추격전이었다.

루이스는 항상 지루해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사라졌다. 최근까지도 웬만한 일은 율레스 재상이 처리하면 루이스는 낙인만 찍어 주고 있었다. 율레스 재상이 일을 잘하니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지만, 앞으로 이걸 계기로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틀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선, 루이스가 제대로 일을 하게 만들어야 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우선 일을 열심히 하게 만들면 성군이 되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우선 이걸 시작으로 조금씩 사람을 변하게 만든 다음에……. 루이스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황후를 간택해서 오순도순 살다가 토끼 같은 자식들까지 낳으면 화룡점정이지 않을까.

루이스는 5년 후 죽는 그 날까지 황후는커녕 후궁 한 명 두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 모두를 지독히도 불신해서 그때는 억지로 결혼을 권하지 않았지만, 지금 떠올리면 정말 마음에 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쨌든 루이스는 앞으로 이상적인 미래를 위해서 변해야 했다. 이렇게 멀리서 오는 사신단 때문에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멋대로 사냥을 하러 나오는 게 아니라!

“제발 일 좀 하세요!”

내가 옆에서 소리를 지르든 열심히 빌든, 웬 날개 달린 벌레가 윙윙거리나 하는 얼굴로 무시하고 지나가던 루이스가 멈칫하더니 내 아래쪽을 흘깃 봤다.

“발밑 조심.”

순간 멈칫했지만, 루이스가 가리킨 발밑은 보지 않았다. 예전에도 루이스의 말에 몇 번이고 농락당했었다. 한눈을 팔게 만들어서 잠깐 사이에 사라지거나, 이상한 포즈를 취하게 만들어서 놀림거리를 만들었다.

“제가 속을 줄 아세요!”

“난 분명 경고했다.”

이번에는 절대 속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빳빳하게 유지하며 루이스의 말을 무시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지금 제 말 무시…, 으에엑!! 이거 뭐야아악!!!”

무심코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말캉한 뭔가가 발에 느껴졌다. 불길한 기운과 함께 내려다본 발밑에는 말똥으로 추정되는 거무튀튀하고 푹신한 게 있었다.

아니, 이게 언제부터……. 봤으면 미리 말 좀 해 주지! 루이스를 노려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옆에서 이미 말 그대로 포복절도를 하고 있었다.

“크, 크하하하. 그러게 누가 팔딱거리래?”

“제가 언제 팔딱…!”

분한 마음에 내 양손으로 허벅다리를 두들기자, 루이스가 내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거 봐라. 아주 팔팔하게 팔딱거리잖아.”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폐하!!”

그러거나 말거나 루이스는 더욱 즐거워했다.

“조심해라. 뒤에도 있다.”

“꺄악!!”

“크하하핫!”

루이스의 말에 깜짝 놀라 내가 높이 점프했다가 앞으로 뛰어서 루이스가 가리킨 자리를 봤다.

“…….”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흙과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이 전부였다. 하지만 내 사정과는 상관없이 루이스는 마냥 즐거워 보였다.

‘그래. 내 구두 한 짝 희생해서 웃음을 준다면…….’

‘그것도 괜찮지.’라고 생각하기엔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얄미울 정도로 루이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내 구두를 말똥에 희생하고 난 뒤에야 루이스는 황궁으로 돌아왔다. 황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웃음을 참을 생각인 요만큼도 없는지 킬킬거리며 웃는 루이스를 보고 있자니, 이 모든 게 함정처럼 느껴졌다.

‘설마, 일부러 내 발밑에 말똥을 갖다 놓은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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