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4장. 황궁 생활 (8)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어째서 두 사람이 연무장에서 서로 검을 맞대고 있는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혹시 무슨 사달이라도 난 것은 아니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위 분위기를 보니 큰일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공기마저도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을 것이다.
일단 당장 뭔가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이 들자 피곤이 몰려왔다. 낮에는 이사벨이 찾아오더니, 이번에는 헤레이스였다. 황궁에 왔는데도 두 사람이 자꾸만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오랜만에 보게 되는 사람들이 많네요.”
내 말에 헤레이스가 물었다.
“저 말고 누굴 또 만나셨습니까.”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모르는 건가. 이사벨이 나를 찾아온 것을.
“오늘 낮에 이사벨 부인이 찾아왔었습니다.”
이사벨 얘기에 헤레이스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마치 이사벨이 나를 찾아온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당황한 것 같았다.
“혹, 어머니께서 무슨 얘기를 하셨습니까.”
“저야 상관없지만…….”
나는 루이스와 그 주위에 있는 시종장을 비롯한 시녀와 시종들을 눈짓하며 말했다. 내가 굳이 이사벨이 내게 찾아와서 한 말을 한다면, 그녀가 뻔뻔하게 공작가를 도와 달라고 말했다고 했다는 얘기를 할 것이었다. 나는 최소한의 배려로 헤레이스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글쎄요.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이것만으로도 헤레이스와 루이스까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역시나 헤레이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헤레이스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답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시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강조하듯이 대답했다.
“꼭 그렇게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물론, 그렇게 한다고 이사벨이 얌전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나저나 여기서 두 분이 뭘 하고 계셨던 건가요.”
내 물음에 헤레이스는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다.
“폐하의 훈련 상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시녀가 나에게까지 달려왔던 것으로 보면, 단순한 훈련은 아니었을 것이다. 훈련을 가장한 다른 것이었겠지.
게다가 루이스가 굳이 몸을 풀고 싶다면 헤레이스 말고 적당한 상대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중에서 왜 하필 헤레이스인 거지.
“그런데 아직 승부를 내지 못했습니다.”
아직 승부를 내지 못했다니. 그럼 루이스가 아직 헤레이스를 이기지 못했다는 건가. 설마 정말로 헤레이스가 루이스를 상대로 대등하다는 뜻인가.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실은 당황하고 있었다.
“일단 시작한 대련이니 결판을 내긴 해야 할 텐데.”
“그럼 좀 더 하든가.”
“저 역시도 그러고 싶지만…….”
그러면서 헤레이스는 루이스에게 나를 힐끗, 눈짓을 했다.
“부인께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주는 곳이 승리. 그런 룰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루이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승부를 내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루이스가 말하기 전에 먼저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안 됩니다.”
황제와 공작의 한밤중 난투라니. 두 사람은 대련이라고 하지만 이 상황을 말로 옮기는 자들은 난투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괜히 일이 커지기 전에 마무리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내면 다음에 또 대련을 해야 할 텐데.”
“언제든지 응하겠습니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의 호흡이 척척 맞았다. 나는 기가 막혀 두 사람의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때도 부인의 허락은 맡아야 할 것 같습니다.”
“허락이라. 무서워서 도망치는 건가.”
루이스가 비웃으며 헤레이스를 도발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입술 끝을 한껏 끌어올리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제 제 목숨은 부인의 것이기도 하니까요.”
아니다. 헤레이스의 목숨은 온전히 헤레이스 것이다. 왜 나를 끌어들여.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핑계도 많군.”
“사실입니다.”
헤레이스는 루이스의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루이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헤레이스를 쳐다보았다.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루이스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럼. 그 목숨 같은 에일린이 결판을 내주면 되겠군.”
“네…?”
루이스의 말에 놀라서 대답한 것은 나였다. 갑자기 내가 결판을 내라니. 어떻게?
눈만 깜박이며 루이스를 보자 그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가 나와 공작 중에 한 놈의 손을 들어주면 그쪽이 이긴 거로 하지.”
루이스가 대뜸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제시했지만, 헤레이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내가 루이스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는 두 분이 대련한 걸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지금 보여 줄까.”
혹시라도 루이스가 바로 검을 고쳐 잡고 휘두르기라도 할까 봐, 나는 서둘러 답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헤레이스까지 루이스의 말에 거들었다.
“그거 괜찮은 방법이군요.”
“네…?”
아니 지금까지 검을 맞대고 싸워서 시녀와 시종들을 기겁하게 만들더니, 그 승부를 내 마음대로 정하라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하죠.”
승부를 낼 때까지 끝낼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내가 대충 정해서 이 상황을 끝내자.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루이스와 헤레이스 역시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기대하는 듯이.
막상 부담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까 선뜻 한 사람을 고를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모습을 자세하게 살피는데.
‘잠깐. 저게 뭐야…?’
두 사람을 자세히 살피다 보니 헤레이스의 상처가 보였다. 옆구리에 부상을 입었는지, 옷이 조금씩 붉은색이 물들고 있었다.
“설마 다치신 겁니까.”
내 물음에 헤레이스가 옆구리를 가리면서 대답했다.
“별 것 아닙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뭔가 기대하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옆구리는 자신의 손으로 가린 채. 나는 어쩐지 헤레이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옆에 있는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잠깐. 설마 루이스도 부상을 입은 건가.’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에 루이스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나는 순간 얼굴이 사색이 되어 루이스에게 달려갔다. 두 사람 모두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루이스의 손을 따라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폐하! 피가 나잖아요!”
그의 손에서 피가 뚝,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리 연습 훈련이라 해도 폐하의 몸에 상처를 입히다니요.”
나는 헤레이스를 향해 화를 냈다. 어느새 그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죄송합니다.”
헤레이스가 정중하게 사과를 했지만, 나는 그 사과를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다시 루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나는 당연하게 루이스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도 손 외에는 상처가 없는 것 같았다. 방금 전 붉은 선혈이 루이스의 몸을 따라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은 다시 생각해도 오싹했다.
루이스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글쎄. 괜찮은지 잘 모르겠는데.”
“황궁 주치의를 부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무서워졌다. 혹시라도 루이스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폐하를 모셔라.”
시종장을 비롯한 시종들이 루이스의 곁을 호위하듯 둘러쌌다. 나는 루이스와 함께 연무장을 떠나기 전 헤레이스를 흘깃 보며 말했다.
“다시는 이런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
혹시라도 이런 부상이 생긴다면, 그땐 정말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헤레이스에게 단호하게 말한 후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헤레이스가 갑자기 안부를 물었다.
“부인, 황궁에서 잘 쉬고 있습니까.”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잘 지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안부라니. 나는 다시 한번 울컥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가득하게 대답했다.
“공작님께서도 다치신 것 같은데 공작가로 돌아가서 치료받으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그러죠.”
그리고 돌아서기 전, 헤레이스에게 상처를 치료하라고 조언했다. 혹시라도 상처가 심해져 루이스와 대련해서 그렇게 됐다는 쓸데없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그럼 이만.”
그런 후에 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헤레이스를 등졌다. 여기서 뒤돌아볼 생각 따위는 없었다.
헤레이스가 돌아가고 난 후, 나는 황궁 주치의에게 치료를 받는 루이스를 지켜보았다.
“상처는 곧 아물 테지만 흔적은 좀 남을 수도 있습니다.”
황궁 주치의는 치료를 신속하게 마친 후 자리를 떠났다. 황궁 주치의까지 없자 나는 본격적으로 루이스를 채근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헤레이스가 매일 밤 루이스를 찾아와 술을 마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별거 아니다. 술을 조금 마시다가….”
술을 마시고 대련을 했다는 건가. 최근 헤레이스가 찾아와 저녁 늦게 술을 마신다는 보고를 들었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
“검을 좀 휘두른다는 게, 조절이 잘 안 된 것뿐이다.”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자칫 잘못해서 더 큰 부상이라도 입으셨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나는 속상한 마음에 루이스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만약 그가 큰 부상이라도 입어서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면, 나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루이스를 가만히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라버니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