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4장. 황궁 생활 (9)
루이스와 헤레이스가 내 앞에 있다면 내가 선택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루이스의 곁에서 그의 편을 들고 그를 지킬 것이다.
“그러니 오늘 대련에서 승리한 사람은 폐하입니다.”
이제는 의미 없는 결과이지만, 나는 한껏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제야 루이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헤레이스가 타고 있는 마차가 공작가 앞에서 멈췄다. 마차에서 헤레이스가 내렸다. 그런데 공작가로 돌아온 헤레이스를 본 앨버트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공작님, 이 상처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의 옆구리에 어느새 빨간 피가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꽤 많은 피를 흘린 채 제대로 된 응급처치도 없이 공작가까지 온 것 같았다. 당연히 평상시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은 당연했다.
“방으로 가시죠. 바로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사실, 헤레이스는 루이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입었다. 루이스는 왼손에 얇게 검이 스쳐 지나가서 나온 피였지만, 헤레이스는 옆구리를 다쳤다. 그것도 루이스의 날카로운 검에 의하여.
‘이젠 좀 상대가 될 줄 알았는데.’
헤레이스는 주치의에게 치료를 받는 내내 한쪽 팔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역시나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검으로 루이스를 이기는 것은 무리였다. 심지어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그런데도 폭발하는 힘이 새어 나오듯 강한 힘으로 헤레이스의 옆구리를 베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상은 크지만, 내상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는 점이다.
헤레이스는 간단한 치료를 한 후 이사벨이 있는 곳을 찾았다.
“어머니는?”
앨버트가 대답했다.
“이사벨 님께서는 방에 계십니다.”
그리고 헤레이스는 곧바로 이사벨을 찾아갔다. 헤레이스는 이사벨을 보자마자 황궁에서 들었던 것을 확인했다.
“부인은 왜 찾아가셨습니까.”
“그사이에 에일린이 얘기하던가요.”
“다시는 찾아가지 마세요.”
“그럼 공작님이 직접 찾아가 얘기하세요. 이번 연회에서 에일린을 만나 제대로 얘기하세요. 그때까지는 기다릴 테니.”
“…….”
이사벨이 얘기하라고 하는 것은 공작가의 금전적인 지원이었다. 이사벨이 에일린과 헤레이스의 결혼을 인정했을 때, 이사벨이 원했던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 이사벨은 점점 초조해하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그런 이사벨이 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되었다.
* * *
이사벨은 그렇게 쫓겨난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내게 줄기차게 서신을 써서 보내왔다. 그럼에도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사람을 보내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사벨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서신은 처음부터 읽지도 않았다. 그녀가 보낸 사람은 내 얼굴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이사벨을 철저히 무시하는 한편, 나는 에밀에게 따로 공작가의 내정 상황을 정확하게 알아 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에밀은 평범한 유모가 아니다. 루이스와 나를 제외하고는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지만, 에밀은 내 유모이면서 동시에 내게 필요한 일을 해 주는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보좌관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최측근이다. 그 일이 비록 위험한 일일지라도, 에밀은 어떤 일도 완벽하게 수행한다.
제국의 귀족 중에 자작가와 남작가에는 일부 특수 계층이 존재한다.
원래는 귀족이 아니었지만 특별한 능력을 인정받아서 황실과 모종의 거래로 귀족이 되는 경우인데, 이때 모종의 거래는 보통 황실에 10년 동안 그 능력을 바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귀족이 카일라의 부친인 프랫 자작과 내 유모인 에밀 클라크 남작이다.
프랫 자작은 젊은 시절부터 악명 높은 대부업을 운영해 왔다. 그의 악명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재물은 점점 거대해졌다. 그 재산의 절반을 반납하고 매년 수입의 10%를 10년 동안 바치는 것이 그가 귀족이 되는 조건이었다.
그는 웬만한 귀족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현재도 자작에 그치지 않고 백작이 되기 위해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아마 백작이 되면 후작이 되기 위해서, 후작이 되면 공작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욕심을 부릴 인사다.
하지만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그가 자작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아마, 내가 죽은 후에는 반역에 일조한 대가로 백작이나 후작 정도의 지위를 받았을 테지만.
그리고 나의 유모 에밀 클라크. 그녀는 혼인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그건 바로 첩보 및 정보 수집에 뛰어난 능력 덕분이었다.
내 유모로 오기 전까지는 표정 변화 없이 언제나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얼음 마녀’라고 불렸다는데, 별것 아닌 일에도 엄청난 반응을 보이는 지금의 에밀을 보면 도저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상상도 안 된다.
하지만 에밀의 과거에 대한 엄청난 소문들을 어느 정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녀의 엄청난 소문을 뛰어넘는 실력 때문이다.
회귀 전, 내가 에밀에게 그런 일을 부탁한 것은 고작 몇 번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에밀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결과를 가져왔었다. 그것도 별것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소문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그 후에, 지켜본 바에 의하면 에밀은 과거에도 내 지시로 자료 수집 혹은 첩보가 필요한 일을 할 때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 되었다. 말투만 해도 내 유모일 때는 세상 다시없을 오지랖을 선보이면서 호들갑을 떨지만, 내게 보고를 할 때면 격식을 차린 사무적인 말투가 되었다. 그녀의 말투에는 한 치의 틈도 없었다.
역시나, 내가 부탁한 지 하루 만에 에밀의 보고서가 내 책상에 올라왔다.
“……개판이네.”
보고서를 확인한 내가 내뱉은 말이었다.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이미 한 번 앨버트에게 공작가의 분기별 예산안을 받아 확인했기 때문에 공작가의 재정 상태가 엉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보다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각해져 있었다.
과거에 나는 이 모든 것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누가 부탁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금액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쓰고 다니는 것이 공작가의 빚이 되는 악순환이 얼마나 심각한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지금 꽤나 궁지에 몰려 있는 것 같습니다.”
에밀의 말이 맞았다. 보고서가 정확하다면 ?물론, 정확한 게 당연하지만- 이대로 두면 이사벨로 인해 공작가는 머지않아 파산할 것이 분명하다.
현재 헤레이스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정도의 규모를 하루아침에 해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기까지 생각에 이르는 순간, 카일라 자작 영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대부업으로 유명한 프랫 자작가의 외동딸이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이사벨 부인은 이미 헤레이스 몰래 카일라를 통해서 프랫 자작가의 돈을 꽤나 빌린 것으로 나온다. 그 빚 역시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 숨겨진 빚이 더 있다니.
헤레이스에게 빠져 있는 카일라가 이 사실을 안다면, 기꺼이 헤레이스가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돈을 빌려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또 다른 빚으로 공작가를 옥죄어 오겠지. 그렇게 되면 카일라는 헤레이스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카일라 역시, 이 정도의 규모를 프랫 자작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빌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카일라의 요구는 프랫 자작의 요구이기도 할 것이다.
프랫 자작이 헤레이스에게 요구할 것이라.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허울뿐인 작위를 가진 졸부가 원하는 것은 작위였다. 그리고 헤레이스는 제국 최고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돈이 없었다.
‘카일라를 헤레이스와 결혼시켜서 작위를 얻을 생각인 건가.’
하지만 그건 무리가 있었다. 카일라가 헤레이스와 결혼하면 그녀가 공작 부인이 될 뿐이었다. 프랫 자작가가 백작위를 받을 수 있도록 공작가가 도와줄 수는 있어도, 직접적으로 작위를 줄 수는 없었다. 내가 아는 프랫 자작은 확실하지 않은 거래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회귀 전에도 마지막까지 헤레이스의 옆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카일라가 아니었다. 그 자리의 주인은 그레이스 백작 영애였다.
과거에 헤레이스는 카일라와 헤어진 후에 그레이스를 만났다. 원래대로라면 그 시기는 1년 후였다. 그런데 헤레이스는 1년 전인, 지금 카일라와 헤어진 상태였다.
그럼, 그레이스는? 과거대로 1년 후에 만나게 되는 걸까. 아니면 벌써 만났을까? 만약 두 사람이 이미 아는 사이라면, 그레이스가 공작가를 도와줄 수도 있다. 카일라가 수중에 있는 돈만 믿고 날뛰었다면, 그레이스는 가문의 힘과 부유한 재정을 모두 활용해서 그를 보좌했으니까. 마치 내가 아니라 자기가 진짜 부인인 것처럼.
어느 쪽일까. 카일라일까, 그레이스일까. 사실, 누가 공작가를 도와주든 상관없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과 방해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그들이 앞으로 하게 될 반역 모의를 늦출 수 있는지. 그것을 가늠하는 것이었다.
회귀 전, 그들은 반역을 도운 후, 각각 카일라의 가문은 작위 상승을, 그레이스의 가문은 소금과 후추같이 일상생활에는 필요하지만 구하기는 어려운 품목에 관한 독점 무역권을 요구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가문이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 방해가 되는 인물. 그게 바로 나였다. 루이스의 동생이며 헤레이스의 아내. 그래서 그들은 루이스를 죽이고 나를 죽여서 헤레이스를 차지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지켜보기에는 심사가 뒤틀린다.
과거에 내가 참았듯이 이번에도 역시 그저 가만히 보기만 하면,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이혼을 요구할 것이다. 만약, 내가 미련 없이 이혼해 주면 공작가의 정실 자리를 꿰찰 테고. 그럼 반역은 앞당겨지겠지.
‘그렇게 놔둘 수야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