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4장. 황궁 생활 (10)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지켜보기에는 심사가 뒤틀린다.
과거에 내가 참았듯이 이번에도 역시 그저 가만히 보기만 하면,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이혼을 요구할 것이다. 만약, 내가 미련 없이 이혼해 주면 공작가의 정실 자리를 꿰찰 테고. 그럼 반역은 앞당겨지겠지.
‘그렇게 놔둘 수야 없지.’
답은 나왔다. 카일라나 그레이스의 가문에서 원조를 받을 수 없도록 차단할 것. 또한, 그녀들의 기세를 눌러줄 것.
옆에서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에밀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헤레이스 공작께서는 다른 영애들의 원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에밀의 목소리는 추측이 아니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째서인지 에밀은 헤레이스가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내 물음에 에밀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자존심이 강한 분이니까요. 약점을 잡히는 것도, 약점 때문에 이용당하는 것도 견디질 못합니다.”
마치 헤레이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에밀에게 향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나처럼 5년간의 그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도 않을 텐데.
회귀한 후, 내가 공작가에서 보낸 시간은 황궁에 와 있는 지금의 시간까지 합해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에밀이 헤레이스와 마주친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데 에밀은 어떻게 헤레이스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사람처럼 확신하는 거지?
나의 의아한 눈빛을 본 에밀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당황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눈꼬리를 살짝 내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결혼 전에 헤레이스 공작께서 어떤 분인지 폐하의 명을 받고 조사했었습니다. 가문의 내력과 헤레이스 공작의 성격 및 사생활 등, 모두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
과거에는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다. 회귀 전에 에밀은 그런 사실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에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했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머리로는 에밀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방금 전까지도 평정심을 유지하던 에밀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에밀의 눈동자가 방황하더니 갑자기 에밀이 무릎을 꿇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에밀, 일어나.”
하지만 에밀은 고개를 더 깊숙이 숙일 뿐이었다.
“속이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마음에…주제넘은 짓을 했습니다.”
“…에밀.”
“예, 전하.”
항상 이런다. 잘못한 일이 있거나. 내 눈치를 볼 때면 언제나 주책없게 ‘아기씨’ 하며 부르던 호칭을 ‘전하’로 변경했다. 그러면 나는 괜히 에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정말로 화낼 거야.”
“…….”
“에밀.”
내가 단호하게 부르자. 에밀이 그제야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흘끔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결국, 그 모습에 내가 피식, 하고 웃음이 터지자 에밀이 슬쩍 미소를 곁들었다.
회귀 전으로 돌아와서 이젠 모든 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겪어 보니 오히려 회귀 전에 몰랐던 사실을 하나둘씩 알게 되는 것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요즘에는 내가 몰라서는 안 되는 것들을 놓친 것이 있었는지 불안해졌다.
하지만, 회귀한 후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된 것도 있었다. 에밀이 나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내게 에밀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이다.
“아기씨.”
내 기분이 풀린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호칭이 바로 ‘전하’에서 ‘아기씨’로 돌아왔다.
“헤레이스 공작께서는 분명 누구의 지원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다만…?”
“이사벨 부인은 모르지요.”
에밀의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밀의 말이 맞았다. 돈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이사벨이었다. 그녀는 돈이 필요하면 헤레이스의 정부를 얼마든지 찾아갔다. 이사벨이 사고를 치고 헤레이스가 뒷수습을 하는 게 언제나와 같은 패턴이었다.
“이사벨 부인에게 사람을 한 명 붙이는 게 좋겠어.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보고할 수 있는 사람으로.”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가던 중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이사벨 부인을 지켜보는 게 좋겠어.”
하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니라는 것을 에밀도 알아차렸는지,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헤레이스 공작께서 만나는 여자들 쪽도 지켜볼까요.”
내가 입안으로 삼켜 낸 말을 에밀이 끄집어냈다. 사실 회귀 전에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과거에는 그것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특히, 이사벨과 접촉한 적이 있는 영애들을 위주로. 유모가 알아서 해 줘.”
결국, 나는 마지막 순간 능력 있는 보좌관 에밀이 아닌, 나를 어머니보다 더 아껴 주는 유모 에밀에게 떼를 썼다.
“그럴게요. 아기씨.”
에밀도 어느새 유모의 모습으로 돌아와 내 어리광을 애정으로 덮어 줬다.
* * *
공작가를 예의주시하는 한편,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일은 또 있었다.
이제 곧 황궁에서 타국에서 외교사절단이 파견되는 연회가 열릴 것이다. 루이스는 연회에 참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자리에서도 언제나 얼굴만 잠시 비추거나 아니면 참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연회에서는 루이스의 존재감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이번 연회는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해야 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루이스뿐만 아니라 내 존재감도 이번에 확실하게 보여 줄 것이다.
끔찍한 결말이었던 기억을 안고 과거로 회귀했다. 그 사실에 덩달아 따라오는 것이 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 지금부터 앞으로 5년 동안 어떤 것이 유행하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예언자처럼.
그러니 그 기억을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적절하게 과거의 기억을 이용해 필요한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위험은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내가 알고 있는 기억을 이용해서 협박도 할 것이다.
“연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줘.”
하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놓치는 것도 있을 테니, 연회장에서도 모든 상황을 두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일들은 모두 연회가 열리기 전에 손을 쓸 것이다.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지고 싶은 영애에겐 앞으로 곧 유행하게 될 아이템을 슬쩍 흘리고, 다른 귀족들과 친분을 쌓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서로에게 이득이 될 만한 가문의 영애와 귀부인들을 소개해 주었다. 물론,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러면서 내게 고마움을 느낄 정도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연회가 열릴 때쯤이면 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도록 만들었다. 그녀들은 대놓고 드러내지 않겠지만, 다른 이들과는 다른 우호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다. 필요하다면 내 편이 되어 주기도 할 것이다.
과거에 나는 사교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황궁에서 연회를 열어 꼭 참석해야 하는 경우가 전부였다. 결혼 후에는 오로지 공작가에만 집중하느라 다른 것은 모두 뒷전이었다.
하지만 사교계는 곧 인맥이자 힘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수많은 정보가 오갔다. 그렇기에 때론 전쟁보다도 치열한 것이 사교계였다.
이제 나도 그 사교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 무슨 말들이 오가는지. 그곳에는 반역에 관한 뭔가가 있는지. 누가 내 편이 되고 누가 내 적이 될지 가려낼 필요가 있었다.
황궁 연회 준비는 내가 도맡아서 진행했다. 각국과 귀족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연회장에 배치할 가구와 꽃, 장식품들을 선정했다. 그에 어울리는 음식과 음악까지.
“연회 때 사용할 꽃과 자리 배치까지 모두 정해졌습니다.”
“그때 연회용 음악 역시 선정하였습니다.”
“이대로 진행하면 되겠네.”
연회 준비 역시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각종 보고를 받으며 연회장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에밀이 물었다.
“그런데 연회 때 입장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보통 결혼을 한 귀부인들은 당연히 남편과 참석했다. 심지어 나는 이번이 결혼 후 첫 연회 참석이었다. 그만큼 시선이 쏠릴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걱정해서 묻는 것이었다. 연회만큼은 헤레이스와 입장할 것인지 아닌지.
에밀의 걱정은 나 역시도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답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애매모호하게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글쎄.”
에밀이 걱정하는 얼굴이 보였지만, 아직 명확한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곧 정해야겠지.”
헤레이스와 함께 입장해도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즐겨야겠지.’
귀족들의 시선을 보란 듯이 받으며 연회를 즐길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 전에 연회 준비부터 마무리하자. 나는 다시 한번 연회에 필요한 것들과 진행 순서 등을 꼼꼼하게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