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5장. 황궁 연회 (2)
헤레이스와 이사벨은 짧은 인사를 끝으로 돌아섰다. 연회장 안에서 다른 귀족들과 간단한 인사와 담소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언제까지 헤레이스를 모른 척할 순 없었다. 헤레이스와 나는 부부였고, 공식적으로 나는 공작 부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황녀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월튼 후작 부인.”
귀부인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아까부터 자꾸만 나를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다. 그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자연스럽게 몸을 틀면서 시선의 주인을 살짝 확인했다. 역시나, 헤레이스였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지만, 나는 그대로 지나쳤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헤레이스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대체 언제까지 쳐다볼 생각이지.’ 하고 살짝 돌아보는데, 헤레이스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설마 나한테 오려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다. 지금 이 연회장에 있는 모든 귀족이 아닌 척하면서 나와 헤레이스를 향한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시선이 쏠린 상태에서…!’
그런데…헤레이스는 내 우려대로 이 수많은 시선 속에서 내게 다가오려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내가 먼저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였다.
“폐, 폐하 잠시만…!”
당황해 말을 더듬는 시종장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해서 시종장이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연회는 이제 시작했는데.’
연회장에 얼마나 있었다고, 루이스는 벌써 지긋지긋한 얼굴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시종장이 루이스의 다리라도 붙잡을 기세였다.
“폐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시종장이 루이스를 간절하게 부르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 주위를 살폈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전하 제발.’
시종장이 입만 벙긋거리며 나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나는 시종장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홀 안을 둘러보았다. 아직 연회는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다. 최소한 외교사절단과 인사를 하고 평화 협정에 대한 기념사를 한마디 해 주어야 했다.
루이스가 시종장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드레스를 살짝 잡았다. 드레스 밑자락에 가려져 있는 구두가 드러났다.
루이스가 내 앞을 지나칠 때였다. 나는 발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읏!”
걸렸다. 평소라면 절대 걸리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끈질기게 매달리는 시종장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어 있었다. 슬쩍 내민 발에 루이스가 걸린 것이다.
휘청, 루이스가 순간 중심을 잃어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홀에 있는 귀족들은 각자 아는 사람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서로를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서 둔탁한 소리가 나는 순간 모두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루이스가 나를 힐긋 노려보며 앞으로 기울어진 중심을 뒤로 억지로 끌어당겼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몸이 일자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그대로 몸을 뒤로 넘기면서 중심을 잡다니. 그건 엄청난 근력과 몸의 탄성이 있어야 가능했다.
루이스는 어느새 내 앞에 서 있었다. 이 정도는 루이스가 아무렇지 않게 중심을 잡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엔 제국의 귀족들 대부분이 와 있었다. 이곳에서 루이스가 정말로 넘어지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슨 짓이냐.”
루이스의 말에 내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한 짓을 모면하기 위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세게 나가지 않으면 방법이 없잖아요.’
다년간의 고생으로 쌓인 노하우 중에 하나였다. 루이스를 말려야 하는 상황에서 단순한 부탁이나 충언은 통하지 않는다. 웃기거나 화나게 하거나. 루이스가 다른 생각을 하도록 강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
내가 쓰는 방법은 화나게 하는 게 압도적으로 많았다. 루이스를 웃기는 것보다 화나게 하는 게 더 빠르고 확실하고, 쉬우니까.
내가 계속 웃고 있으니까, 루이스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 같았다.
“웃는 얼굴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아직 연회는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들 알아서 잘 노는구만.”
“폐하. 그래도 자리는 지키셔야 합니다.”
나와 루이스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루이스의 등 뒤에서 시종장이 내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폐하, 조금만 참으세요. 공식적인 일정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여기에 계시지 않으면 분명 항의가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 것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겠지. 루이스가 말하기 그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제국 내의 문제라면 모를까. 타국의 사절단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항의하면 외교적인 문제로 불거져서 후에 더 귀찮은 일들이 생길 뿐입니다.”
안에서 막 나가는 황제님이지만, 밖에서는 제발 참아 달라는 사정이었다. 그러면서 마무리로는 루이스가 가장 싫어하는 ‘귀찮은 일’이라는 표현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연회, 사람들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해도 형식적으로는 평화 협정을 맺은 나라끼리 그 평화가 유효하며 지금의 관계가 유지될 것을 약속하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다른 제국에서 오는 사절단에 황족이 무조건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조금만 더!’
시종장이 루이스의 등 뒤에서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루이스가 홀에서 나가는 길을 보면서 살짝 망설이고 있었다. 됐다. 루이스가 흔들린다.
“곧 사절단들이 인사를 할 겁니다. 가더라도 인사만이라도 받고 가세요.”
마지막으로 루이스에게 작은 희망을 주었다. 사절단의 인사까지만 받으면 연회장을 나가도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고.
“그럼 순서를 앞당겨.”
순서를 앞당기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설득이 무색하게 당장이라도 나갈 기세였다. 내가 재빨리 눈짓을 하자, 옆을 지키고 있던 시종장이 알아듣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폐하.”
결국, 루이스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팔걸이에 턱을 받치고 못마땅한 얼굴이 가득했지만, 이게 어딘가. 시종장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내게 감사하다며 두 손을 모았다.
“시종장의 손은 계속 바쁜가 보군. 심심한 건가.”
흠칫, 시종장이 그대로 굳었다. 지금까지 루이스는 시종장이 등 뒤에서 내게 보낸 신호들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린 채 벌벌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루이스는 그 모습을 보는 둥 마는 둥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피곤하니 얼른 끝내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종장이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그의 수족과도 같은 시종에게 연회 식순을 변경하도록 지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 * *
연회장에서 황제가 앉는 가장 높은 상석 바로 옆에 앉아 있다 보면, 그 전체가 잘 보였다. 연회는 사교계의 작은 축소판이었다. 연회장의 상석에 앉아 바라보면 몇 가지 유형이 보였다.
우선 사교계 최신 동향에 대해 교류하는 집단이다.
제국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사건부터 시작해서 소문으로만 떠돌 뿐인 것에 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교환하면서 퍼즐을 맞추기도 한다. 좋게 포장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단순히 각종 이간질과 뒷담화에 열을 올리는 무리였다.
하지만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되는 유형이기도 했다. 그들은 제국의 정보원들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소문에 관한 출처마저도 알아낼 만큼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 경우에는, 주로 최소 넷이나 다섯 명 이상 모여 있을 때 형성되는 무리였다.
그들과는 달리, 모여 있지 않고 나란히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저 연회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유형.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지켜보다 보면 그들의 진짜 관계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연회를 핑계로 만나는 내연 관계였다. 드물지만 가끔씩, 그들 중에는 내연 관계로 위장한 채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비밀리에 거래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유형,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연보라빛 머리 색이 신비로움을 더하는 한 영애가 남녀를 불문한 채 모두의 이목을 받으며 연회장을 제집인 것마냥 누비고 있었다.
뛰어난 가문에, 그보다 뛰어난 능력, 그 모든 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외모를 가져 모든 귀족의 선망을 받는 존재는 어느 파벌에도 섞이지 않은 채 모든 파벌의 중심에 서 있었다.
모든 귀족의 시선을 받던 자가 내 앞에서 치마 끝자락을 살짝 잡으며 인사를 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가 내게 ‘공작 부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황녀 전하’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녀는 내게 와서 자연스럽게 ‘황녀 전하’라고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반갑게 웃으며 다가갔다.
“올리비아. 백작 부인은?”
“저쪽에서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이 많은 장소라 그런지, 올리비아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르게 내게 존칭을 썼다.
올리비아의 말에 그녀의 뒤쪽을 보니, 이미 혼기를 채운 영애를 둔 공작가의 귀부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도 틈틈이 올리비아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가 보였다.
“말도 마세요.”
“왜?”
“여기 참석한 혼기 찬 영식들은 죄다 만나게 할 기세입니다.”
올리비아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사실, 좀 전까지도 연회장의 모든 시선을 즐기고 있던 그녀는 뉴튼 백작가의 영애로 나의 오래된 친구다.
올리비아는 주목받는 게 잘 어울렸다. 결혼은 싫다고 하지만, 그녀는 과거에도 많은 영식을 만났었다. 그런데 절대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비혼을 유지하다니. 오히려 그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니 백작 부인이 쉽게 포기할 수가 없지.”
“읏…제발 너까지 그런 말은.”
올리비아가 괴로움에 몸서리를 쳤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입가를 가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내 웃음소리에 올리비아가 너무하다는 얼굴을 할 때였다. 갑자기 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