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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26화 (26/124)

?제26화. 5장. 황궁 연회 (3)

나는 올리비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하지만 올리비아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엇…저기…!”

올리비아의 눈이 순간 번뜩이며 연회장 입구 쪽을 향했다. 그와 동시에 문지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룩센 황태자 전하 도착했습니다.”

문지기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룩센 황태자가 홀 안으로 입장했다.

룩센 레이몬드 폰 헤렌부르크 3세. 이번 평화 협정 연회에 참석하는 외교 사절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국에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가 입장하자 시끄러웠던 홀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올리비아가 중얼거렸다.

“…역시, 소문이 진짜였어.”

룩센 황태자는 뛰어난 무술 실력과 남자다운 외모로 제국에까지 유명할 정도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몇 해 동안 국경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에 나가 있느라 제국끼리 모이는 연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기에, 이번에 그가 참석한다는 소식에 제국의 영애들이 그의 실물을 영접하고자 안달이 나 있었다. 모든 영애의 기대를 충족하는 모습에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룩센 황태자는 남성적인 면모가 강하게 드러났다. 선 굵은 외모에 듬직한 풍채, 그리고 위풍당당한 걸음걸이. 영애들에게는 마치 어떤 위기에 빠지더라도 지켜 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게다가 룩센 황태자는 은발이었다. 남성미가 강한 모습에 은발은 차가운 듯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소문의 황태자 등장이네.”

“…….”

머리부터 발끝까지 룩센 황태자를 해부할 기세로 열렬히 훑어보며 점수를 매기던 올리비아에게서 후한 점수가 나온 것 같았다. 올리비아가 내게 물었다.

“…소문보다 더 대단하네. 안 그래?”

“말투 돌아왔네.”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써 내게 존칭을 했지만, 올리비아는 룩센 황태자를 본 순간부터 흥분해서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말에 올리비아는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입을 떡 벌리고는 차마 대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못하는 룩센 황태자를 눈빛으로 열심히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라는 올리비아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억지로 외면했다.

그리고 룩센 황태자가 루이스에게 가서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룩센 헤렌부르크 황태자.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느새 내 앞을 지나친 룩센 황태자가 루이스 앞에 서 있었다.

제국 간의 평화 협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루이스와 바다 건너에 있는 제국 헤렌부르크 황가가 그 협정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제국은 그저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영토나 군사력이나 비등비등한 두 제국 중에서 한쪽이 평화를 깨는 순간 전쟁이 시작되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헤렌부르크 황가에서는 황태자를 보내어 평화가 건재하다는 것을 모든 귀족과 다른 제국의 사절단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만나 뵈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께서 오고 싶어 했으나, 출발 직전에 갑작스레 쓰러지셔서…….”

“그 영감은 자주 쓰러지는군. 그렇게 빌빌거릴 거면…….”

루이스가 타국의 황제에 대한 막말을 거침없이 쏟아 내려고 할 때였다.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니 폐하께서 걱정된다는 뜻입니다. 저희 제국의 약이 꽤 좋답니다. 돌아가시는 길에 선물로 드릴 테니, 부디 빠른 쾌유를 빈다고 전해 주세요.”

다급하게 자리로 돌아온 내가 걱정과 다정함이 섞인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자신의 말을 가로채자 기분이 상했는지 루이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여기서 괜히 루이스와 눈이 마주치기까지 하면 무슨 사고가 터질지 몰랐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루이스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무시한 채 룩센 황태자와 인사를 나눴다.

“제국에 머무는 동안 즐거운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제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도와주시겠습니까.”

누가 봐도 겉치레였는데, 그걸 모를 리 없는 룩센 황태자가 뜬금없이 도움을 청해 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하지만 나는 머릿속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방긋 웃으며 답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요.”

“그럼 황녀 전하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싫어하는 기색 없이 사교용 미소를 지어 보였고, 룩센 황태자 역시 뒤로 빼는 법 없이 내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그 손을 잡고 자신의 댄스 신청을 수락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사실 내심 깜짝 놀랐다. 원래라면 저런 요청을 해 올 때 거절할 명분이 없다.

처음엔 거절하려고 했다. 귀족들이 먹잇감을 포착한 것처럼 눈을 빛내는 것이 보였다. 이목이 집중된 곳에서 화제가 될 걸 뻔히 알면서 손을 잡을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 연회에서 대부분의 참석자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나와 헤레이스였다. 지금 그와 내가 남남인 것처럼 따로 행동하고 있는 와중에 룩센 황태자와 춤이라도 춘다면, 그다음에 사람들의 반응은 상상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제안을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하려고 할 때였다. 귀족들의 시선이 따갑도록 느껴졌다. 그중에는 헤레이스도 있었다. 유난히 그의 시선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내가 헤레이스가 아닌 룩센 황태자의 손을 잡는다면 반응들이 엄청나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다 보니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나 역시 모르겠지만. 일종의 충동이었다. 자꾸만 힐끔거리는 귀족들을 더욱 놀라게 해 주고 싶다는 충동.

‘안 될 건 없지.’

지금 이 손을 잡으면 분명 시끄러워질 것이고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겠지만.

어차피 한 번은 춤을 춰야 했다. 루이스가 절대 추지 않을 테니까. 그를 대신해서 황가의 인물이 연회의 시작을 알려야 했다. 그러니 지금 룩센 황태자의 손을 잡지 않으면 나는 어차피 다른 사람과 춰야 했다.

‘누구랑?’

그때 이쪽을 보고 있는 헤레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허공에 떠 있는 내 손을 보고 있었다.

나는 헤레이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허공에 있는 내 손을 살짝 밀었다. 이번 연회에서 헤레이스와 댄스를 춰야 한다면…차라리 룩센 황태자와 하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룩센 황태자는 이번 연회에 중요한 손님이었다. 그런 그의 댄스 요청을 거절하는 것 역시 황녀로서 바람직하지 않았다. 최대한 그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역시 나쁘지 않았다.

‘못 잡을 건 없지.’

나는 그대로 룩센 황태자의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룩센 황태자가 씨익, 입술 끝을 그림처럼 올렸다. 다른 영애들이 보면 반할 만큼 멋있는 미소였다.

역시나 귀족들이 입을 가리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룩센 황태자를 따라 댄스홀로 나갔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헤레이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음악이 흘렀다. 댄스홀에 나와 룩센 황태자가 가장 중앙에 섰다.

첫 번째 댄스는 보통 연회의 주최자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 함께하지 않고 주최자와 파트너가 단독으로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룩센 황태자만이 댄스홀에 있었고, 참석한 귀족들의 수많은 시선을 받고 있었다. 룩센 황태자는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게 나를 리드했다.

음악이 중반 정도 흘렀을 때였다. 룩센 황태자가 살짝 고개를 숙여 나를 보며 입술을 열었다.

“결혼 축하합니다.”

결혼 축하 인사라니……. 룩센 황태자는 의례적인 인사에 불과하겠지만 나에게는 오늘 연회에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당연할 수밖에. 결혼하자마자 내가 황궁에 왔으니, 그 누구도 내 앞에서 결혼에 관한 말을 함부로 꺼내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룩센 황태자가 말에 당황한 나는 멈칫하며 스텝을 잘못 밟을 뻔했다. 하지만 룩센 황태자가 눈치를 채고 내 허리를 좀 더 깊숙이 감은 후에 살짝 나를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살짝 돌고 다시 바닥에 발이 닿았을 때, 그가 리드하며 이끌었다. 그의 도움 덕분에 나는 곧 안정을 찾아 댄스를 이어 나갔다.

룩센 황태자의 인사에 굳이 나와 헤레이스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귀부인과 영애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뭐랄까.”

“역시, 저만 느끼는 거 아니죠?”

속닥이는 목소리였지만, 연회장 안에 갑자기 찾아온 침묵 때문에 작은 목소리마저도 들렸다.

“묘하게…….”

“잘 어울리네요.”

“잘 어울려요.”

두 명의 영애인지 귀부인이 동시에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합쳐지자 이전보다 더 확실하게 연회장 안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들이 말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나와 룩센 황태자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네.”

하지만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내가 계속 불편해하는 것을 느꼈는지, 룩센 황태자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대화를 해서 풀어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룩센이 물었다.

“저희가 얼마 만에 보는 거죠.”

사실 나와 룩센 황태자는 면식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 룩센 황태자가 제국에 몇 번이고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중에 몇 번은 제국에 잠시 체류하기도 했었다. 그때 나와 룩센 황태자는 자연스럽게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였다.

“글쎄요, 제가 어렸을 때라….”

“한 번은 다시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올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룩센 황태자의 목소리에 그리움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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