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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27화 (27/124)

?제27화. 5장. 황궁 연회 (4)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당시에는 황자 신분이었던 그가 황태자가 되면서 제국에 오는 일 역시 없어졌다. 아마 그동안 후계자 수업을 받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 후에는 전쟁에 참가하여 존재감을 알리기도 했고.

음악이 흐르는 동안 나와 룩센 사이에서는 계속해서 대화가 이어졌다.

“이번에도 제국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고 가시길 바랍니다.”

“네, 정말 그러면 좋겠군요.”

어색함이 조금씩 사라져갈 때쯤, 노래도 자연스럽게 멈췄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서로 인사하는 것이 마무리였다. 룩센 황태자는 정중하면서 절도 있었다.

나와 댄스가 끝나자마자 그에게 댄스를 신청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영애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쯤에서 살짝 물러나자. 나는 댄스홀에서 내려왔다. 사실, 댄스를 하는 동안 헤레이스의 시선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그 시선을 무시하는 것이 조금씩 부담스러워질 지경이었다.

내가 자리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루이스가 보이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루이스는 내가 룩센 황태자와 댄스를 하는 동안 이미 연회장을 나간 이후였다. 어차피 중요한 절차는 마무리되었으니 루이스가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문제는 없었다. 이제 연회장에서 적당히 자리를 지키다가 정리하면 될 것이다.

연회장 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춤을 추는 내내 헤레이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리 내가 무시한다고 해도 좇아오듯이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어쩔 수 없이 긴장했다. 몸에 힘이 들어가고 그만큼 더 피곤했다. 지금은 연회장에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나도 잠시 나갔다 올까.’

어차피 지금 당장 나를 찾을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연회의 시작을 여는 댄스도 방금 전에 했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귀족들 간의 시간이었다. 연회가 무르익다못해 질펀해졌다. 반쯤은 술에 취해서 해롱거리고 반쯤은 이미 장소를 이탈해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루이스의 몫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쯤 되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온몸에 쌓여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너무 빨리, 그리고 순식간에 긴장을 풀어 버렸는지 온몸에 힘이 빠졌다.

결국, 연회장을 벗어나 휴게실에 가려고 했는데……. 이미 자기네들끼리 빠져나와 있는 귀족들로 그곳도 북적거렸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찾고 찾다가 겨우 연회장 뒤편에 가서야 쉴 수 있었다. 발끝을 시작으로 발목, 무릎으로 올라와 허리를 관통해서 목을 빳빳하게 굳게 만든 원흉인 높은 굽의 구두를 벗어 던지고 쉬기로 했다.

“아, 이제 살 것 같아.”

달빛을 눈요기 삼아 한결 편해진 다리를 허공에서 물장구치고 있을 때였다. 내 뒤로 발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소리가 뚝 끊겼다.

뒤를 돌아보니 헤레이스와 이사벨이 있었다.

‘…무슨 상황이지?’

연회장에서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도 별로 지나다니지 않는 곳에서 이사벨과 헤레이스가 대화 중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돌아가려던 내 발을 묶은 것은 얼핏 들린 두 사람의 노성이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언뜻 들리는 목소리와 제스처를 보면 두 사람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점차 두 사람의 말싸움이 격해지는지 언성이 높아졌다. 그럴수록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황궁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을 무슨 수로 데려옵니까!”

먼저 소리를 지른 사람은 헤레이스였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이사벨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황궁에 있기 원하는 사람…? 나를 말하는 건가.’

지금 헤레이스가 말하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 봐도 나였다.

지금 나를 두고 두 사람이 싸우는 건가. 이제는 무시하고 돌아갈 수 없다. 나를 두고 무슨 작당을 하는 건지 확인해야 했다.

헤레이스의 말에 이사벨 역시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결혼까지 했는데 왜 못 데려오죠? 공작 부인으로서 의무를 다해야죠!”

평소에는 헤레이스의 말이라면 생각도 하기 전에 무조건 옳다고 하는 모습과는 달랐다.

“지금 상황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어머니 책임도 있습니다.”

“지, 지금…어미를 탓하는 건가요?”

이사벨의 얼굴을 감쌌다. 어깨가 조금 들썩이는 것을 보니 울먹이는 척하는 것 같았다.

“하아…. 그런 게 아니라….”

이사벨의 눈물에 헤레이스가 난처해 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흐음…. 이사벨이 이렇게까지 나를 보고 싶어 했나.’

정말 보고 싶어 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녀가 나를 이토록 찾을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는 나를 찾아오더니 그 후에도 나와 만나기 위해 꾸준히 시도해 왔었다.

내가 공작가의 돈줄일 테니까. 그런데 이사벨의 행동을 보다 보면 뭔가 걸렸다. 공작가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러는 거라고 하기엔 너무 절박해 보였다.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좀 더 주의 깊게 듣기 시작했다.

방금 전, 이사벨은 분명 내가 공작 부인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작 부인으로서의 의무가 무엇이지?

공작가의 전반적인 관리를 수행하는 것? 하지만 그것은 이사벨이 전권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에도 지금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공작 부인으로서 가장 큰 의무는 하나뿐이었다.

공작가의 후계자를 낳는 것? 하지만 그것 역시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보다 못한 관계가 헤레이스와 나였다. 게다가 이사벨은 내가 공작가의 후계자를 낳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을 확신하는 이유는, 회귀 전에 그녀가 내게 보내 주던 약 때문이다. 처음 그 약을 받았을 때는 그녀가 처음을 내게 신경을 써 주는 것 같아서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그 약을 먹을수록 이상하게 몸이 피곤하고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 약이 임신이 잘 안 되도록 하는 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느낀 나의 절망감과 분노는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그러니 이것도 이사벨이 말하는 공작 부인으로서의 의무가 아니었다.

‘역시……. 그것뿐이겠지.’

그녀가 내게 원하는 공작 부인으로서의 의무는 불안한 공작가를 안정시키고 재정적 지원을 해 주는 것. 그것이 공작 부인으로서 공작가의 부흥과 번영을 위해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고 의무라고, 이사벨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황궁까지 찾아와 내게 도와주기를 요구했던 것처럼.

하지만 틀렸다. 그것은 나의 의무가 아니다.

‘그건 내 오지랖이었지.’

그것을 의무라고 착각하면 안 되지. 두 사람을 보며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이사벨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헤레이스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

“…….”

“프랫 자작가에서도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다고 통보해 왔어요.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우리 가문은 끝이에요!”

프랫 자작가는 카일라 영애의 가문이기도 했다. 또한, 대부업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어떻게든 에일린을 데려와야 해요.”

내가 돌아간다고 해서 공작가의 부채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벨은 내가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말했다.

그녀가 저토록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이전까지 내가 해 온 행동 때문이었다. 공작가에 필요하다는 한마디면 무엇이든지 따지지 않고 나섰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쩌다 한순간에 그렇게까지 무모하고 멍청해졌을까 싶을 정도였다.

“부인이 돌아온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사벨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요.”

어째서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까지 헛기침을 할 뻔했다.

“원하지도 않은 결혼을 한 대가잖아요.”

결혼의 대가는 공작가에 존재하던 결혼 전의 모든 부채를 해결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이미 지켜졌다.

이사벨이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그 정도는 당연히 받아야지요.”

“어머니….”

이사벨은 헤레이스가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그것 때문에 억지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게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인정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헤레이스가 침묵했다. 사실, 이사벨의 말만 따르자면 그녀는 빚 때문에 가문의 주인인 헤레이스를 내게 팔아넘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아들에게 침을 뱉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쩜 저렇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걸까.

“쓸모는 있을 줄 알았는데….”

이사벨이 당장 얻은 것이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해 냈다. 그녀는 아직 할 말이 다 끝나지 않았는지, 아니면 헤레이스의 침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황녀와 결혼을 하면 황가의 사업권도 넘겨받고 광산 채굴권도 좀 생길 줄 알았더니…….”

소름이 끼쳤다. 이사벨이 얘기한 것들은 모두 회귀 전에 내가 헤레이스와 공작가를 위해 했던 일들이었다. 공작가가 안정될 수 있도록 제국에서 직접 관리하는 특정 품목에 관한 수입·수출 독점 사업권을 주었고, 큰돈을 벌 수 있는 광산 채굴권을 갖도록 해 주었다. 그 덕분에 공작가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재정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힘과 부로 나와 루이스를…배신했다.

이사벨의 엄살이 분명한 한마디에도 걱정되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하며 공작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결혼 직전까지도 나는 분명 그랬었다.

그러니 이사벨은 그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갑자기 돌변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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