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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28화 (28/124)

?제28화. 5장. 황궁 연회 (5)

이사벨이 헤레이스의 양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헤레이스. 에일린을 잘 달래서 데려오세요. 당분간은 섭섭지 않게 잘 좀 해 주고요.”

어쩐지 이사벨이 더 간절해 보일 정도였다.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헤레이스를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그 누구도 내게 잘 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지.’

그런 귀찮은 짓을 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나서서 했으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공작가의 사람들은 내게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였고, 나를 더욱 무시했다.

그런데 내가 과거에 아무 조건 없이 해 주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니 절박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나한테 잘 보이려 하면서까지. 내 태도가 변하자마자 이렇게까지 달라지는 거였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인데,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건데.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잘 보이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그때의 나는 사랑하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 미련하고 멍청한 생각이 모든 것을 망쳤다.

“어차피 결혼한 거 얻을 수 있는 건 얻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사벨의 끈질긴 설득에 헤레이스가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뭔가 더 말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두 사람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헤레이스의 목소리만 겨우 들렸지만 내가 들은 것은 일부에 불과했다.

“…데려올 겁니다.”

헤레이스가 한 말이었다. 앞에 듣지 못한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사벨의 말대로 나를 공작가에 데려갈 거라는 말이겠지. 어쩐지 헛웃음이 자꾸 나오려고 했다.

그다음부터는 헤레이스의 목소리가 작아져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들어야 할 내용은 이미 다 들었다.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두고 자리를 떠났다.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했다. 어쩐지 그동안 맞지 않던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달라졌던 헤레이스의 이상한 행동들이 갑자기 전부 이해됐다. 그래, 그랬구나. 헤레이스가 그동안 보인 이상한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또한 회귀 전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지도.

헤레이스와 내 관계가 변해서가 아니었다. 회귀 전에는 맹목적으로 그에게 해 주던 모든 것을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결국, 돈이란 말이지.

과거에는 헤레이스가 나를 붙잡지 않아도, 그가 수많은 영애를 만나고 다녀도, 나는 묵묵히 그를 위한 일들을 했었다. 그러니 내게 잘 보일 필요도 없었던 거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그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아쉬워진 거겠지. 나와 결혼하면 저절로 따라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것들이 손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안달이 난 것이다.

어느새 두 사람은 자리를 떠났다. 다시 혼자가 됐다. 조금 걷다 보니 연회장에서 음악 소리가 여기까지 흘러나왔다. 밤이 꽤 깊었다.

“…다시 홀에 가 봐야겠다.”

얼굴을 한 번 비추고 상황을 살핀 후에 황녀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잠시 쉬려고 나왔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할 수 없지. 덕분에 알게 된 것도 있으니까.

나는 연회장으로 향하는 입구로 향했다. 하지만 들어갈 수는 없었다.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두 사람이 보였다. 그레이스와 헤레이스, 두 사람이 길을 막은 채 함께 있었다.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입구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칫,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돌아서면 도망치는 거고, 앞으로 계속 걸어가면 꼼짝없이 삼자대면이다. 갑자기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삼자대면까지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건 소용없었다. 다시 죽는 한이 있어도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헤레이스와 그레이스가 있는 곳으로 한 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부인…!”

헤레이스가 나를 부르더니 어느새 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손목을 붙잡고 돌아서게 했다. 나는 헤레이스에게 붙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팔을 비틀었다. 하지만 단단하게 잡은 그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손목을 빼내는 것을 포기하고 헤레이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오늘 인사조차 못 하지 않았습니까.”

헤레이스가 나를 향해 웃었다. 너무 활짝 웃어서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 대신 ‘우리가 인사할 상황은 아니지 않나요.’ 하고 이렇게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방금 전, 헤레이스와 이사벨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그리고 헤레이스가 과거와는 달리 갑자기 내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아차렸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적당히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고 했다. 이제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왜 그러는지 보였다. 이제부터 내게 달콤한 말을 늘어놓으며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다.

“부인. 잠시 제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역시나, 헤레이스는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내게 다정하게 말하며 단둘이 있을 때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다.

분명, 공작가로 돌아와 달라고 하겠지. 모든 것이 뻔했다.

“아뇨. 그건 힘들 것…!!”

내가 거절하며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나보다 헤레이스가 한발 빨랐다.

“시간 좀 내주세요.”

헤레이스는 갑자기 붙잡고 있는 내 손목을 살짝 당기며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연회장에서도 꽤 떨어져 있는 후원이었다. 헤레이스는 도착한 후에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내 손목을 잡은 채로.

“놔 주세요.”

내가 인상을 쓰며 손목을 가리키자, 헤레이스가 깜짝 놀라며 잡고 있던 손목에 힘을 풀었다. 내가 손목을 붙잡고 아파하자 헤레이스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그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내 눈치를 보고도 나를 설득할 생각이라면 제대로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생각에 괜히 아픈 척 손목을 감싸 쥐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꼭 얘기를 하고 싶어서.”

겨우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닐 텐데, 헤레이스는 그 말을 한 것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둘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헤레이스는 내 뒤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뒤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아마도 나와 눈이 마주칠까 봐 피하고 있는 것이리라. 왠지 모르겠지만 헤레이스는 내 눈치를 보는 것과 동시에 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봤다.

이토록 고요한 상태에서 가만히 바라보자 헤레이스의 얼굴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한때 내가 내 모든 것을 바칠 만큼 사랑했던 남자는 아름다웠다. 헤레이스의 금발 머리 아래에 칼같이 자리 잡은 이목구비가 그를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차가운 외모로 웃을 때 드러나는 부드러운 인상이 예상외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게다가 나도 그에게 반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지.

헤레이스는 할 말이 있다고 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헤레이스가 입을 열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말했다.

“공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계속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내 목소리에 반응한 헤레이스가 움찔했다. 길고 긴 침묵이 깨지자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내 머리카락과 비슷한 저 눈동자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별거 아닌 사소한 공통점이 그와 나를 이어 주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뗀 채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회한에 빠지는 것은 이 순간을 끝으로 할 생각이었다.

헤레이스가 달라진 이유, 헤레이스가 나를 필요로 하는 이유. 그건 모두 내 신분과 지위 때문이었다. 내가 줄 수 있는 무한한 부와 명예, 가능성.

과거에도 알고 있었다. 내가 사랑에 미쳐 천치가 된 게 아닌 이상, 헤레이스와 이사벨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한지, 사교계에 고립되고 저택의 하인들에게까지 무시당하면서 인내하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모를 수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내 갑작스러운 사죄에 되레 당황한 헤레이스가 되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부인이 죄송할 게 뭐가…?”

지금 이 상황에서는 누가 봐도 헤레이스가 용서를 비는 것이 맞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결혼하자마자 아내가 황궁에 머무는 것은 남편의 귀책사유로 간주 된다. 심지어 방금 전에 그레이스와 함께 있는 상황에서 마주치기까지 했으니. 그런데 정작 내가 사과를 하자,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는 거다.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제 일방적인 마음 때문에 억지로 결혼까지 하시게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바로 그 결혼식부터 잘못됐다.

한눈에 반했었다. 그게 스치는 감정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잊지 못해서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다가 협박을 하다시피 해서 한 결혼이었다.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마음 한편에 그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었다. 내 일방적인 마음 때문에 헤레이스의 인생을 희생하고 있다고. 그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나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사벨이 내게 무슨 짓을 하든, 헤레이스가 내게 어떤 수모를 주든 내가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원치 않는 상대와 결혼이라니. 아무리 서로의 상대를 정하지 못하는 것이 귀족이라고 해도, 황명에 의한 결혼이 공작님께는 얼마나 불쾌한 일이었는지 압니다.”

결국, 이해관계가 잘 맞아 떨어졌을 뿐인데. 헤레이스 또한 내게서 원하는 게 있어서 거래와도 같은 결혼을 유지했던 거였는데.

헤레이스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제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콩깍지의 부스러기마저도 털어 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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