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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29화 (29/124)

?제29화. 5장. 황궁 연회 (6)

헤레이스는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보는 내 시선을 그대로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일단 결혼부터 하면 나머지는 차차 나아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시작이 잘못되었으니 나머지가 잘될 리가 없는데 말이죠.”

“…….”

“그래서…제가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뒷말을 이어 가려고 할 때였다.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헤레이스가 갑자기 말을 툭 내뱉었다. 평소의 말투와는 달리 조금 신경질적이기까지 했다.

“그동안 생각한 것이 겨우 그겁니까.”

“…?”

“부인.”

“네?”

헤레이스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단어마다 씹어 먹을 것처럼 말했다.

“저는 이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6장. 일단 나한테 잘 해 (1)

헤레이스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순간 놀라서 얼어붙은 내가 헤레이스를 바라보자, 그가 단호한 얼굴로 다시 한번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저는 절대 이혼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이혼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다시 보니 그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안절부절못하면서 기다리는 것도 보였다.

그래, 이혼할 수 없겠지. 이혼하면 잃을 게 많을 테니까.

‘그동안 생각한 게 이혼인가.’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웃음이 터지는 순간, 구역질도 함께 터질 것 같아서 참았다. 그의 의도가 뻔히 보여서.

회귀 전이었다면 그의 말에 속아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에게 속아 넘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방금 전 헤레이스와 이사벨의 대화까지 들은 마당에.

헤레이스가 나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오세요.”

하지만 그 모습을 자세히 보면 초조해하는 것을 내게 들키지 않으려 애써 숨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공작가로 돌아가지 않고 황궁에 계속 남을까 봐 그런 것이겠지. 이대로 공작가가 무너지고 말까 봐.

“글쎄요…….”

나는 일부러 고민하는 척 말끝을 늘였다. 헤레이스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의 의도대로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이혼이라…….’

지금 내 기분에만 충실한다면 헤레이스의 말을 받아치며 ‘이혼하죠.’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헤레이스의 말이 아니어도 아직은 이혼할 생각은 아직 없었다.

어차피 결혼한 거라면, 적을 잡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니 나는 그에게서 증거를 찾아내 반역을 막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나는 내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헤레이스에게 말했다. 마치 그를 시험하듯이.

“제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생각해 보죠.”

지금 이혼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이대로 돌아갈 생각 역시 없었다. 내 말에 헤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그 조건이…무엇입니까.”

헤레이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티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지만, 내가 눈치챌 정도인 것을 보면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그는 내가 어떤 조건을 말하더라도 무조건 하겠다고 할 것 같았다. 나는 조건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잠시 숨을 골랐다. 좀 더 적합하고 딱 알맞은 말을 고르기 위해.

역시나 헤레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헤레이스는 내가 황궁에서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분명 방금 전에 이사벨과의 말다툼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내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내가 공작 부인으로서 공작가의 존립 자체가 걸린 문제를 해결해 주기 바라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뭘 원하는 걸까. 독점 사업권? 광산 채굴권? 영지 확장?

‘전부겠지.’

회귀 전에 내가 그에게 전부 다 해 줬으니까. 원하는 것이 큰 만큼, 내 요구 또한 들어주려 할 것이다.

나는 헤레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헤레이스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긴장하고 있었다.

“저한테 잘하세요.”

내 말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헤레이스의 눈이 잠시 커졌다. 내 말에 놀란 것인지 뭔가 묻고 싶은 것처럼 그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헤레이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앞으로 내가 할 말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뿐이었다.

“앞으로 공작님은 대외적으로 저를 사랑하는 겁니다. 함께 참석하는 연회는 물론이고, 제가 사적으로 갖는 사교 모임에도 얼굴을 비춰서 아내를 사랑하는 공작님의 모습을 보여 주세요.”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당분간…헤레이스의 반역을 막아 낼 때까지는 공작 부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상, 대외적으로는 좋은 부부의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나와 헤레이스는 이미 사람들에게 부부이지만, 나의 일방적인 관계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구혼하고 결혼을 하게 되는 과정에 생긴 것이기 때문에 회귀한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일단 그것부터 바꿔야 했다. 내가 헤레이스를 위해 무엇이든 할 거라는 인식. 내 앞에서 무슨 짓을 해도 헤레이스 때문에 참을 거라는 인식.

회귀 전에는 그것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이 조금씩 무너졌었다. 그것은 또한 황녀로서의 위신이 무너진 것이기도 했다. 그건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루이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황실을 넘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잘하면 무너뜨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으니까. 그러니 할 거라면 과거에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를 역전시키자.

이건 또한 나의 개인적이면서도 사소한 복수이기도 했다. 과거에 내 입장, 내가 느낀 감정들을 되돌려주고 싶은 아주 사소한 복수.

헤레이스가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다음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또.”

“…더 있는 겁니까.”

헤레이스는 불안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운 듯이.

“왜요, 안 되나요?”

그가 내 조건을 지킬 생각이 없어 보이면, 나는 그대로 연회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가 돌아서려고 하자, 헤레이스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나는 다시 헤레이스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공작님과 결혼했지만, 현재 황궁에 기둥이 되어 줄 여성이 없으니 제가 황녀로서 황궁의 일을 돌볼 것입니다. 그에 대해 반대하지 마세요.”

사실 이 조건은 공작가로 돌아가긴 하지만 언제든지 내가 황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황궁에서 처리하는 서류 중에서는 외부에 유출되면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아무리 보안이 좋은 공작가라고 해도 황궁에 있는 서류를 전부 가져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니 앞으로 황궁의 일도 보기 위해서는 내가 공작가와 황궁을 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황궁은 내게 완전히 멀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을 것이다.

헤레이스는 내가 언제든지 황궁으로 돌아갈 여지가 있다는 것을 계속 의식을 하며 내가 내거는 조건들을 이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불어 앞으로 내가 황궁에 와야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헤레이스는 대답 대신 내게 물었다.

“…그럼 돌아올 겁니까.”

“생각해 보지요.”

완전한 긍정이 아닌 가능성을 열어 둔 애매모호한 대답. 상대방으로 하여금 초조함과 불안함을 자극할 것이다.

“생각이 아니라 지금 당장 돌아온다면, 모두 승낙하겠습니다.”

역시나, 헤레이스는 내게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또 다른 조건을 걸며 모든 것에 동의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다.

“저도 지금 당장이어야 합니다.”

헤레이스가 세게 나왔다. 자신도 이것만큼은 물러날 수 없다는 것처럼.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 결정했다. 어차피 돌아가긴 갈 생각이었으니 그게 좀 당겨진다고 해서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황궁 일을 보기 위해 다시 와야 하기도 하니까.

“저한테 잘하세요. 제가 하는 말은 뭐든지 지키세요. 그러면 돌아가겠습니다.”

헤레이스가 내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만큼 간이고 쓸개고 빼서 갖다 바치게 할 거다. 그동안 헤레이스 공작가에서 손쉽게 가져서 그 소중함이라곤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얼마나 귀하고 어려운 건지 뼈저리게 알게 만들어 줄 것이다.

헤레이스는 곧바로 대답했다. 고민할 것 없다는 듯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인의 조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습니다.”

“그럼 저도 좋습니다.”

헤레이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헤레이스와 함께 공작가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회귀한 게 기회가 맞다면, 이미 그와 결혼한 후로 돌려보낸 이유 또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과거에는 멍청하게 눈치채지 못했던 반역을 이번에는 그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막으라는 거 아닐까. 그러니 일단 공작가로 돌아가서 한 번 살아 볼 것이다.

단,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 * *

연회가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을 때, 나는 헤레이스와 함께 그가 준비한 마차를 타고 공작가로 돌아갔다.

공작가에 도착한 후, 다음 날 이른 아침에 황궁으로부터 무시무시한 분노가 담긴 서신이 도착했다. 내가 말도 없이 공작가로 돌아온 것 때문에 루이스가 보낸 것이었다.

[감히 인사도 없이 가! 다음에 오면 내가 다리를 꺾어 버릴 거다!]

‘다리가 꺾일’ 사람이 나인지 헤레이스인지, 아니면 우리 둘 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루이스의 어마어마한 분노가 실린 것이 분명한 서신이었다.

나는 서신에서 생생하게 전해지는 분노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화가 단단히 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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