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도 바쁜 황녀님-30화 (30/124)

?제30화. 6장. 일단 나한테 잘 해 (2)

서신을 보고 걱정이 되었는지 에밀이 말했다.

“황궁에 가면 폐하부터 찾아 봬야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에밀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내가 황궁을 떠나기 전에 시종장이 찾아왔었다. 그 말은 루이스도 내가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서신은 마치 몰랐다는 것처럼 도착했다.

“아니, 공작님께서 찾아가실 거야.”

그러니 이 서신은 헤레이스에게 보낸 거였다. 그것도 그냥 겁주기 용. 아마 그가 찾아가더라도 시답지 않은 거로 시비를 걸고 벌을 주다가 말 것이다. 그래도 뭐, 오라버니가 원한다면 기꺼이.

서신을 서랍에 넣으려다 말고 다시 펼쳐서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읽어 봤다. 이럴 때마다 오라버니가 정말 살아 있음을 느껴져서 애틋해지곤 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헤레이스에게 다시 한번 조건을 내밀었다. 공작가로 돌아오면서 확실하게 해야 했다.

헤레이스가 내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나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또렷하게 말했다.

“공작가의 집안을 관리하는 모든 권한을 제게 주세요.”

내가 공작 부인이니, 당연한 권한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내가 이 권한을 가져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공작가의 모든 것을 이사벨이 관리했으니까.

이사벨은 그것이 자신의 자존심이라도 되는지 유난히 집착했다. 사실, 그것은 잠시 맡고 있던 이사벨로부터 위임받아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마치 내게 빼앗기는 것처럼 반응했다. 결국, 회귀 전의 나는 그녀에게 어머니께서 해 주시라는 말로 물러났었다. 사실 공작가의 주도권 따위 내게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럴 이유가 없었다. 지금은 헤레이스의 반역을 막기 위해서는 그 증거를 찾아야 했다. 그러려면 공작가의 내부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했다. 공작가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그 안에는 자연스레 공작가의 흐름이 들어가 있을 테니까.

집안을 누가 관리하느냐는 결국 여자들의 권력 싸움이었다. 황궁에서부터 일반 가정집까지. 그것만큼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건 원래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당당하게 요구하기에 좋았다. 거기에 앞으로 공작가에서 지내려면 이사벨의 손발을 철저하게 묶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껏 공작가가 자신의 손안에 있다는 자신감으로 고용인들을 멋대로 휘두르고 사사건건 내게 트집을 잡곤 했었으니까.

헤레이스가 대답 없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내가 물었다.

“곤란한가요.”

그가 만약 안 된다는 대답을 하는 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양보하면 앞으로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니까.

헤레이스의 입술이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아서 내가 일어나기 위해 테이블을 짚었을 때였다. 그가 드디어 입술을 살짝 열었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짧고 간단했다. 그렇기에 명확한 대답인데도 불구하고 순간 헷갈렸다. 내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자, 헤레이스가 다시 한번 대답했다. 전혀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원래 부인이 공작가를 관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나는 일부러 바로 말하지 않고 시간을 들였다. 그러다 헤레이스를 똑바로 보며 단호하면서도 확실하게 말했다.

“저한테 잘하세요.”

“네.”

이번에는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이미 황궁 연회에서 했던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말을 내가 다시 한번 하는 것은 역시 그에게 쐐기를 박아 놓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요구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모두 들어주셔야 합니다. 그게 어떤 것이든. 공작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보기에 동의할 수 있을 만큼 잘하셔야 합니다.”

포괄적인 요구인 만큼, 내가 요구할 수 있는 범위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나에게 잘하라는 말만 생각한다면 착각이었다. 그 말에는 앞으로 헤레이스가 내 말에 거절할 자유 따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헤레이스는 이번에도 고민 없이 대답했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내가 한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한 건가 싶어 그의 얼굴을 살펴봤지만,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헤레이스가 내게 물었다.

“그럼 이제 완전히 돌아오신 겁니까.”

어쩐지 헤레이스의 거침없는 대답에 ‘내가 놓친 게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요구에서 헤레이스가 이득을 볼 것은 없었다.

‘어느 쪽이든 내가 손해 보는 건 아니니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내게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헤레이스가 씨익, 웃었다.

* * *

헤레이스에게 내건 조건 중 공작가의 실권을 내가 가지는 것. 이것은 바로 행동으로 옮겨졌다.

이사벨은 방 안에 문을 걸어 둔 채 끝까지 내놓지 않으려고 버텼다. 헤레이스가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이사벨이 악에 받쳐 내질렀다.

“이 가문의 안주인은 납니다! 감히 내게서 빼앗으려 하다니!”

자신의 것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그녀를 정신적으로 압박한 것 같았다.

“누가 안주인입니까?”

“그야 당연히…!”

눈을 부라리던 이사벨이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도 주제 파악은 하는 건가.

“지금 이 가문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 가문의 주인은 헤레이스였다. 이사벨은 그의 어머니였지만 아내는 아니었다. 그녀가 이 가문의 안주인이던 시절도 헤레이스가 가주가 되고 나와 결혼한 순간, 이미 끝났다.

“공작님의 아내는 접니다.”

‘그러니 이만 내놓으세요.’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서 하지 않았지만, 이사벨의 귀에는 정확하게 들렸을 것이다. 역시나 장부를 품에 안고 있는 이사벨의 손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뒤에서 지키고 있던 에밀과 앨버트에게 눈짓을 하자 두 사람이 이사벨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이사벨이 불안한 눈빛으로 장부를 더 꼭 품 안에 넣었다.

앨버트가 최대한 조심히 손을 내밀었다.

“마님, 이제 그만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마치 덫에 걸려 있는 자신을 끌어내려는 것 같았는지, 이사벨이 앨버트의 손을 강하게 내리쳤다. 앨버트의 손등은 마치 고양이에게 발톱을 긁힌 것처럼 빨간 선이 그어졌다.

이사벨인 눈이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헤레이스를 찾았다. 그가 자신에게 이럴 리는 없다고 믿으면서.

“내 아들…헤레이스!”

“…….”

이사벨은 헤레이스의 양팔을 붙잡고 악에 받친 것처럼 외쳤다.

“공작가에 온 그날부터 지금까지 삼십 년 동안 이 가문에 관한 거라면 그릇 하나부터 영지 전체에 이르기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관리하지 않은 것이 없어요. 그런데 이걸 나한테서 가져가겠다니요!”

“…….”

“내가 지금까지 허투루 관리한 적이 있었나요? 삼십 년이나 가문을 위해 드러나지 않는 모든 것들을 관리한 내게서 하루아침에 전부 앗아가다니요!”

가문의 금고 사정이 이렇게 악화된 게 누구 탓인데. 가문이 이렇게까지 휘청거린 데에는 금고 사정은 아랑곳 안 한 채 과거의 영광만을 떠올리며 사치를 이어 간 이사벨의 탓이 컸다.

나는 그녀의 뻔뻔함에 질려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라도 한마디 할까 싶었지만, 옆에서 무슨 생각인지 목석같이 서 있는 헤레이스가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서 가만히 있기로 했다.

“난 허수아비가 아닙니다!”

이사벨이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서럽게 울었다. 우는 모습만큼은 나이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젊어 보여서 더욱 그녀를 불쌍하게 만들었다. 내가 봐도 가련해 보일 정도이니.

이쯤 되면 헤레이스가 내게 다시 한번 생각해 달라고 하거나 시간을 달라는 말을 할 때가 되었는데, 이상하게 아무 말도 없었다. 그를 힐끔 보니 아무 감정 없이 이사벨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어린애처럼 소리까지 내면서 울고 있는데 아무도 반응이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방 안의 분위기는 어색해져 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혼자 방치된 채 눈물을 그칠 타이밍도 놓친 채 계속 우는 척을 하는 이사벨이 가장 민망할 터였다.

“부인에게 가문의 모든 권한을 넘기세요.”

“헤레이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었다. 이사벨은 배신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경악해서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어머니께서도 품위 유지비는 물론, 일 년간 예산을 받아서 쓰셔야 합니다.”

하지만 헤레이스가 단호하게 말하자 이사벨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애처로운 얼굴로 호소했다.

“헤레이스……. 혹시 어미가 잘못한 게 있나요…? 그런 게 있으면 먼저 얘기를…….”

나는 이사벨과 헤레이스를 번갈아 보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안쓰러울 만큼 간절하게 부탁하고 있는 모습에 흔들리지 않을까.

그러나 헤레이스는 이사벨을 보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녀에게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제가 결혼을 했으니 변화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사벨은 헤레이스의 냉정한 시선에 할 말을 잃었는지 더는 반항할 의욕을 잃은 것처럼 고개가 축 늘어졌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억세게 힘을 주던 팔에 힘을 풀었다. 저절로 품 안에 쥐고 있던 장부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사벨은 넋을 놓은 사람처럼 미동이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나왔다. 그 뒤를 헤레이스 역시 따라 나왔다. 그녀에게 남겨 줄 자비가 없는 이상,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 역시 없으니까.

사실 나도 조금은 놀랐다. 헤레이스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그때였다. 헤레이스가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부인.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