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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31화 (31/124)

?제31화. 6장. 일단 나한테 잘 해 (3)

“…얘기하세요.”

나는 몸을 돌려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이사벨에게 보여 주던 냉정한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그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가 지금 이 상황에 할 부탁이 무엇인지는 흥미가 생겼다.

“가능하다면 어머니를 조금만 봐주세요.”

그 말을 하는 헤레이스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딘가 처연한 듯한 인상을 풍기는 미소였다. 역시 신경은 쓰이는 건가. 내가 그의 부탁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자, 헤레이스는 억지로 입꼬리를 더 끌어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나를 지나쳐 앞장서 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등을 보며 확신했다. 그가 이사벨에게 한 말과 내게 한 말은 모두 내게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가짜일 수 있지만, 지금 그가 한 부탁만큼은 진심이라는 것을.

그런데 이사벨을 봐 달라는 건 당신은 봐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 건가.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해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 * *

가문의 모든 장부와 열쇠가 내 손에 떨어졌다. 황궁의 살림을 보다가 공작가의 가문을 보면 사실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이 권한은 공작가의 실세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실권을 가지고 있는 주인에게 시녀들은 생존 본능처럼 눈치를 보고 충성을 맹세한다. 그래서 과거에는 이사벨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거다.

‘이제 더는 그러지 못하겠지.’

이사벨은 앞으로 그녀가 원하는 사치스럽고 풍요로운 일상을 계속해서 누리려면 내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

소리 없는 강한 자기주장이란 게 이런 건가. 어떤 말도 안 했는데 귀가 따갑다 못해 아프고 얼굴이 쿡쿡 찔리는 이상한 현상을 느끼고 있다. 결국, 부담스러움에 짓눌릴 것 같은 내가 먼저 물었다.

“…대체 왜 그래.”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넣은 주범인 에밀이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태평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분명히 좀 전까지 나를 이렇게 막! 얼굴을 뚫을 기세로 쳐다봤으면서!’

에밀은 공작가에 돌아온 순간부터 내내 뚱한 얼굴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 봐도 내 결정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건데. ‘그래도 그렇지 이거 하극상 아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해야지! 왜 자꾸 쳐다보기만 하는 거냐고! 어느새 에밀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밀린 내가 도리어 눈치를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에밀이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밀뿐만 아니라 저택에 앨버트나 보좌관들은 물론이고 시녀들이 최근에 달라진 우리 때문에 하루하루를 어리둥절하게 보내는 것이 눈에 보였다.

“공작…, 아니 공작님께서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죠?”

에밀은 정말 궁금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그렇게’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내가 공작가로 돌아온 날부터 저택에서는 얼굴도 보기 힘들었던 헤레이스의 외출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앨버트의 말에 따르면 하루의 절반은 집무실에 머무르면서 영지 관리와 가문의 사업에 관한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아침저녁은 나와 함께 식사를 했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에밀이 의혹을 품었다.

“어떻게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거죠?”

에밀의 의심은 타당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 모든 건 내가 공작가로 돌아오기 전에 건 조건을 이행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에 불과했으니까.

우선 공작가 안에 시녀들 사이에 소문이 돌고, 그게 가문 밖으로 퍼져 나가 사교계에까지 소문이 퍼지는 것. 그게 일단 지금 금실 좋은 부부 행세를 하는 목적이니까. 그럴수록 사람들이 소문을 믿을 것이다. 나와 헤레이스의 부부관계가 원만해 보여야,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로 에밀의 반응은 나쁘지 않은 신호였다.

“티파티를 열 거야.”

“그야 뭐.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지만.”

티파티야 결혼을 한 귀족가의 귀부인들이 결혼을 한 가문에서 자신의 입지를 보여 주고 새로운 신분으로 사교계 인맥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통상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티파티를 하는 거야 아무 문제가 없지만, 뜬금없는 타이밍에 내가 그 말을 하자 에밀이 놀란 것 같았다.

“초대는 내가 직접 선정한 사람들만 참석할 수 있도록 할 거야.”

“네. 그것도 뭐. 뜻대로 따르겠습니다만.”

에밀은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뭔가를 묻고 싶은데 정확히 무엇을 물어야 할지를 몰라서 답답해 보였다.

“티파티에 초대할 귀부인과 영애들은 올리비아 백작 영애…….”

가장 우선순위인 올리비아를 시작으로 이미 결혼을 한 귀부인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후 말을 이었다.

“카일라 자작 영애와 그레이스 백작 영애. 이상이야.”

“…네?? 지금 뭐라고???”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에밀이 눈을 끔벅였다. 턱이 아래로 떨어져서 입이 다물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거 같으니 다시 한번 말해 달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이번 티파티에 카일라 자작 영애와 그레이스 백작 영애를 초대하도록 해. 참석 여부도 꼭 듣도록.”

이미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사교계에 시답잖은 소문으로 시끄러운데 괜한 빌미를 만들 사람을 초대하다니, 제정신입니까! 에밀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소리겠지.

내가 강한 어조로 재차 말하자, 자신이 들은 게 정확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에밀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에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억지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에밀이 물러난 후 혼자 남은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이 위쪽으로 둥글게 휘어졌다.

내가 이곳에 돌아온 것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나 내 뜻에 따르는 에밀조차도 의아해한다.

“이혼은 너무 쉬운 복수지.”

이혼해서 그들이 알아서 몰락하기 바라는 건 너무 쉬운 복수였다. 나에게는 그들에게 복수할 힘도 능력도 있는데. 그들의 더러운 진의도 알고 있는 이 상황에서 이혼은 너무 쉽지.

그레이스와 카일라의 가문은 반역에 가담한 핵심 가문이었다. 어차피 반역을 막기 위해서 헤레이스와 그녀들의 가문의 관계를 무너뜨려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반역을 추진하는 힘을 상당 부분 뺄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러면서 겸사겸사 과거에 호구처럼 휘둘렸던 모든 것들을 헤레이스와 그의 내연녀들에게 뼈저리게 경험시켜 줄 생각이었다. 좀 더 영악하게. 좀 더 교묘하게.

“기대되네.”

비릿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 * *

처음에 내가 보낸 초대 손님 명부에 앨버트가 놀라서 말리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에밀의 선에서 차단했다. 그 이후부터는 아무도 내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고, 티파티 준비는 에밀이 진두지휘하고 앨버트가 보좌하면서 진행하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헤레이스에게 통보했다.

“티파티를 할 거예요.”

이미 알고 있었는지, 그는 덤덤하게 답했다.

“네. 전해 들었습니다.”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만, 그가 모르는 말을 이제부터 할 거긴 하지만.

“그날 그레이스 백작 영애와 카일라 자작 영애도 참석할 겁니다.”

그것까지는 몰랐는지 헤레이스의 말문이 닫혔다.

그 모습을 흘깃 보며 준비해 둔 말을 이어 가려고 할 때였다.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잠시 나이프를 집으며 여유로운 얼굴로 답했다.

“그렇습니까.”

그레이스와 카일라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 두 사람 모두 그와 얽힌 영애들이었다. 그녀들이 이곳에 오면 좋든 싫든 얽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공작님께서 해 주셔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제가 말입니까.”

“네. 공작님께서 꼭 해 주셔야 합니다.”

헤레이스는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본래 티파티라는 것 자체가 사교계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중에서도 귀부인들이 서로를 자랑하고 시기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남자들이 나설 자리라는 것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들의 역할이라는 것도 아내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깜짝 등장해서 서로의 애정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리를 떠나기 전 그들이 입을 떡 벌릴 만큼 대단한 선물을 하면 한동안 사교계에서 그녀가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아내를 위해서 그런 것까지 신경을 기울이는 남편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더 특별한 행동이기도 했다.

헤레이스가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아주 중요한 역할입니다.”

황궁에서 공작가로 돌아오면서 결심한 게 있었다.

과거와 지금은 다르다. 과거에는 내가 헤레이스에게 휘둘렸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 헤레이스와 이사벨 역시 나를 붙잡기 위해서는 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 저택 안에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헤레이스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내가 과거에 상처받고 힘들어한 것들을 모두, 역으로 돌려줄 것이다. 더불어 그레이스와 카일라, 두 영애의 가문이 헤레이스와 결탁해 반역을 도모하는 것 역시 끊어 내야겠지.

그래서 과거와 비슷한 역할이긴 하지만, 다른 의미로 이번 티파티에서 그의 역할은 히든 카드였다. 카일라와 그레이스를 위해 완벽하게 준비한 장치.

“그러니 부디 잘해 주시기를 바라요.”

헤레이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만히 보더니 갑자기 쓰윽,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걱정 마세요. 제가 생각보다 뭐든 잘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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