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6장. 일단 나한테 잘 해 (4)
“네…네?”
갑자기 튀어나온 헤레이스의 뻔뻔한 모습에 되레 당황한 것은 내 쪽이었다. 티파티에 대한 그림을 아직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가 내 머릿속을 읽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무엇을 요구할지 아시는 건가요?”
“모릅니다.”
헤레이스는 조금 전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뻔뻔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그의 앞에서 당황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하지만 속으로나마 외치고 싶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잘하겠다고.”
헤레이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뻔뻔해 보이지만.
“배려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고 낯부끄러운 짓도 잘합니다.”
하지만 그의 뻔뻔함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었다.
“특히 미소가. 사람들 다 홀리는 미소랄까요……. 아.”
열심히 자기 장점을 어필하던 헤레이스가 순간 아차, 하며 말을 끊었다.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가는 게 보였다.
“……예, 참 자랑이시네요.”
지금 그 말이 전부 그 잘난 바람기를 증명하는 거였다. 그게 지금 내 앞에서 할 말인가.
나도 모르게 눈을 흘기며 노려보자, 헤레이스가 열심히 음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뭐, 그 대단한 재능을 꼭 펼쳐 주세요.”
* * *
티파티 전날에 마담 세실의 의상실에서 헤레이스와 함께 주문했던 드레스가 도착했다. 추가로 주문한 주얼리들이 도착했지만, 결혼반지와 함께 낄 반지만 착용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헤어, 메이크업에 드레스까지. 준비된 구두를 마지막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드레스가 도착할 때 주문했던 레이스도 함께 오긴 했지만, 이걸 입는 방법은 따로 있다. 그러니 지금 입고 있는 것은 안에 입은 속옷을 제외하면 드레스 한 장뿐이었다.
아직 초대된 사람들이 오려면 시간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준비됐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에밀은 황궁에 있을 때부터 이런 것을 준비하는 데 도가 터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나보다 더 잘 알았다.
“공작님은 어디 계시지?”
“집무실에 계십니다.”
에밀에게 물어보니 함께 티파티 준비를 하고 있던 앨버트가 대답했다.
집무실을 찾아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기사를 뒤로 하고 내가 직접 말했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헤레이스의 대답은 곧바로 이어졌다.
“들어오세요.”
들어와 보니 헤레이스는 정말로 일을 하고 있었다. 집무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웬일이지?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겠다고 내 앞에서 당당하게 한 말이 있어서 보여 주기 식인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옆에 쌓여 있는 서류나 방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일을 하긴 하는 것 같았다.
“부인. 드레스가…….”
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움직여 내게로 향한 헤레이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를 향했다가 내 뒤편 어딘가를 봤다가 하는 것이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때 맞춘 드레스인가요.”
헤레이스의 말대로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는 헤레이스와 함께 마담 세실 의상실을 갔을 때 맞춘 드레스였다.
“네. 이번 티파티 때 입으려고 해요.”
내 말에 헤레이스는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겨우 나를 보며 말했다.
“날씨도 추운데,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다른 드레스로 갈아입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갈아입을 거였다면 애초에 이런 드레스를 입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나도 연회장처럼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이라면 차마 이런 드레스를 입고 활보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영애와 귀부인들만 참석하는 티파티였다. 게다가 장소는 공작가 내부였다. 계절감 따위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공간이었다.
“그때 공작님과 함께 갔을 때 고른 건데요.”
그때 무슨 옷을 골랐는지 기억이나 나느냐, 비꼬는 말이었다. 그때 카일라 영애와의 일을 떠올렸는지 헤레이스 역시 아무 말도 못 했다.
“제가 보기엔 이 드레스가 저한테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안 그런가요.”
“그야…….”
차마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도 잘 어울린다는 말도 하지 못하는 헤레이스를 보면서 에밀이 들고 있는 상자를 건네받아서 그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맘에 들지 않으시면 티파티 때 이걸 가져와 주세요.”
헤레이스가 상자를 받아 들어 열어 봤다. 상자 안의 내용물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헤레이스가 도통 감을 잡지 못한 얼굴로 물어봤다.
“이게……. 뭡니까.”
상자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내서 펼쳐 봐도 이게 어떤 용도로 쓰는 건지, 이게 드레스와 상관이 있는 물건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드레스 위에 입는 레이스입니다. 어깨에 걸치는 거지요.”
드레스에 레이스를 함께 착용하는 것은 사실 흔한 방식은 아니었다. 다만 유혹하고 싶은 애인이나 남편, 혹은 정부가 있는 귀족 여성들이 자신의 몸매를 자랑하면서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노출된 부분을 감추기 위해서 착용하면서 유행을 하게 됐다.
그래서 초반의 레이스는 단지 잠시 노출된 부분을 가릴 목적으로 굉장히 촘촘하게 제작되었었다. 하지만 다양한 디자인이 나오게 되면서 귀족 여성들은 레이스로 인해 신체가 보일 듯 말 듯 효과를 주는 것이 신비로움과 매력을 극대화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에는 촘촘한 레이스의 인기는 한물가고 큰 문양, 다양한 패턴의 레이스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든 유행은 앞으로 생길 일이었다. 아직은 이런 디자인의 레이스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이고, 이것 또한 내가 직접 주문을 해서 만든 것이었다. 헤레이스가 못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착용하는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레이스는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니 헤레이스에게 방법을 알려 줘도 여성에게 입혀 주는 것 외에는 써먹을 데가 없을 것이었다.
내가 대뜸 풍성하게 내렸던 머리를 돌돌 말아서 위로 올렸다. 그러자 목선부터 어깨 라인이 훤히 보였다.
“그 레이스는 목걸이 착용법과 비슷하답니다. 자세히 보면 고리로 연결된 부분이 있을 거예요. 그걸 풀어서 제 어깨에 걸쳐 주세요.”
헤레이스는 내가 시키는 대로 고리를 풀고는 조심스럽게 뒤에서 팔을 둘러 레이스를 내 어깨에 걸친 후 고리를 다시 연결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
역시, 헤레이스는 이런 데 센스가 있다. 처음에는 뭔지도 몰랐으면서 고리를 목 뒤에서 연결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연결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레이스는 정확하게 내 가슴 위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다시 풀어 주세요.”
애써 레이스로 가렸는데 다시 풀면 아무 의미가 없다. 헤레이스가 풀지 않고 머뭇거리자, 내가 다시 말했다.
“공작님께서 티파티 때 이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레이스의 진짜 목적은 처음부터 내가 착용하는 게 아니라, 티파티 때 헤레이스가 와서 직접 해 주는 데 의미가 있었다.
레이스는 남심을 홀린다는 데 매력이 있어서 인기가 많았던 거다. 그런데 그걸 처음부터 내가 하고 있으면 그건 그저 유행에 맞지 않는 이상한 스타일에 불과했다.
뭐, 겸사겸사 남편들이 흔히 하는 목걸이 선물보다 이쪽이 더 로맨틱하고 과시하기 좋은 것도 있었다. 강한 인상을 주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 * *
오늘 공작가에서 티파티가 열릴 것이다.
“올리비아 백작 영애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오늘 참석할 손님이 누구인지 들은 올리비아가 참지 못하고 이른 시간부터 찾아온 것이다. 앨버트의 보고에 나는 에밀과 함께 올리비아가 기다리고 있는 티파티 장소로 향했다.
“어서 와.”
내가 다가가서 반기자 올리비아는 웃으며 인사하다가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진짜 초대했어?”
이미 사교계에서는 황녀가 티파티에 헤레이스의 내연녀로 유명한 카일라와 최근에 그의 내연녀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그레이스를 초대했다는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그들은 과연 이번 티파티가 어떤 식으로 끝날지 그 후일담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남들의 입방아에 오를 일을 굳이 시작한 게 올리비아는 아무래도 걱정되는 얼굴이었다.
“그럼, 온다는 답신도 받았어.”
하지만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자, 올리비아의 표정이 질렸다. 올리비아가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그렇게 다 모아 놓고 뭘 하려는 거야?”
“얘기하면 도와줄 거야?”
“…들어 보고.”
올리비아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걱정하는 거겠지. 나는 올리비아에게 이번 티파티에서 뭘 할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카일라와 그레이스를 비롯한 헤레이스와 소문이 있는 영애들을 불러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생각이라고. 다만, 내가 헤레이스에게 티파티에서 영애들 보란 듯이 내게 푹 빠진 듯한 연기를 하라고 요구한 부분만 빼고 말했다.
“에일린…왜 갑자기 이런…….”
올리비아가 내게 뭐라고 더 말하고 싶어 하는 게 보였지만, 곧바로 다른 영애가 도착해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갈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애와 귀부인들이 이어서 도착했다.
처음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그러던 중 뒤늦게 이번 티파티의 중요 손님이 등장했다.
“카일라 자작 영애께서 도착했습니다.”
“그레이스 백작 영애께서 도착했습니다.”
영애들의 자랑과 웃음소리로 가득해야 할 티파티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사교계에 발을 걸치고 있다면 모를 수 없는 조합이었다.
대체 누가 부른 거야? 티파티에 초대된 영애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기고만장했고, 카일라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눈치를 보고 있었다.
“헤레이스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