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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33화 (33/124)

?제33화. 6장. 일단 나한테 잘 해 (5)

에밀의 말에 영애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본부인과 정부라고 이미 소문이 파다한 여자가 한 자리에 있는 곳에 발을 내밀다니.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영애들의 생각이 얼굴에 전부 드러났다.

헤레이스가 내게 다가오며 영애들을 향해서 물었다.

“티파티는 즐거운가요?”

헤레이스의 등장에 순간 영애들이 술렁였다. 상대적으로 어린 영애들은 그레이스와 카일라를 대놓고 힐끔거리기까지 했다.

“부인께서 티파티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잠시 들렸습니다.”

헤레이스가 나타난 순간, 그레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려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나설 자리를 만들어 줄 생각 따위 없었다.

헤레이스가 영애들을 향한 인사말을 신호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내가 황녀이던 시절에 가장 많이 사용하던 영업용 미소였다. 주로 외교 사절단이나 연회에서 쓸모가 많은 표정 중 하나였다.

“잠시 앉으시겠어요?”

내가 에밀에게 눈짓을 하자, 그녀가 답하기도 전에 헤레이스가 빠르게 답했다.

“아뇨. 곧 가 봐야 합니다.”

“조금 더 있다 가세요.”

영애 중 한 사람이 아쉬워하며 헤레이스를 붙잡았다. 그녀를 향해 헤레이스가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를 보고 있으니 과거에 내가 그에게 반해 허우적거릴 때가 다시 떠올랐다.

그가 한번 웃어 줄 때마다 나는 얼굴 전체가 붉게 타올랐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미소를 보아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즐거운 척 미소를 그리며 헤레이스와 영애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티파티가 내가 의도한 대로 흐르기를 바라면서.

헤레이스는 내가 말한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그저 부인께서 티파티는 즐기고 있으신지 궁금해서 잠시 들린 겁니다.”

“어머…….”

“즐거워 보여 다행입니다."

헤레이스가 영애들을 향해 멋스럽게 웃었다. 영애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그때, 헤레이스가 뒤에 있던 앨버트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 순간 앨버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한 상자를 가져왔다. 그것을 헤레이스가 참석한 영애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영애들에게 하나씩 건네준 선물은 정확히는 내가 준비했고 헤레이스에게 맡긴 것이었다. 그 선물은 안에 있는 내용물을 포장하기 위한 상자만 해도 그들의 사치품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영애들에게 그 안에 있는 선물은 당연히 더 대단할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영애들의 눈빛에는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게 보였다.

“열어 봐도 될까요?”

형식적인 물음에 이어 올리비아가 바로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언뜻 봐도 웬만한 목걸이에 있는 보석보다 크기가 더 커 보이는 보석이 박힌 머리 장식이 들어 있었다.

“…대단하네요.”

사실, 별로 감탄하지도 않았으면서. 올리비아는 다른 영애들 보란 듯이 정말 크게 놀란 것처럼 행동했다. 일부러 내 계획을 아는 것처럼 완벽한 바람잡이 역할을 해 주었다.

올리비아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이며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작 공작 부인께는 선물은 없나요?”

헤레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티파티 전에 얘기한 대로 레이스가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설마요. 영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부인 것은 따로 준비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어리둥절한 척 물었다.

“이게 뭔가요?”

헤레이스는 대답 대신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숨소리도 눈치를 볼 정도로 긴장한 채 지켜보고 있던 영애들의 술렁거림이 다시 한번 커졌다.

티파티 도중에 방문한다. 영애들에게 선물을 주고 마지막에 내게 미리 준비해 놓은 선물을 주며 사람들에게 과시할 것. 여기까지가 내가 헤레이스에게 고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거기에 한 발 더 나갔다.

그 뒤에 이어진 행동은 집무실에서 연습했던 것과는 달랐다. 헤레이스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내 머리 뒤로 넘어가서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말아 올렸다. 자연스럽게 내 목덜미가 드러나면서 어깨와 가슴 라인이 보였다.

“…….”

갑자기 흐르는 정적과 함께 공기의 흐름이 묘하게 긴장감이 흘렀다. 영애들 중 몇몇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헤레이스의 행동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내 한쪽 손을 부드럽게 잡아 천천히 올려서 자신이 잡고 있던 내 머리카락 위에 올렸다. 내가 머리를 잡으면서 헤레이스의 양쪽 손이 모두 자유로워지자, 그는 내 앞에서 레이스 케이프를 뒤로 넘겨서 걸쳐 주었다.

옆에서 보면 마치 헤레이스가 나를 안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헤레이스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맞닿은 숨이 서로 얽혔다. 헤레이스가 고개만 살짝 들어 말했다.

“역시 잘 어울리네요.”

코가 닿을 듯 말 듯 했다. 헤레이스가 내 눈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럴수록 영애들의 감탄이 섞인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때 헤레이스가 씨익, 나를 보며 웃었다.

순간 정신이 들었다. 헤레이스는 내가 한 말들을 보란 듯이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걸쳐 준 레이스 케이프를 보기 위한 척,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잡고 있던 머리를 한쪽으로 몰아 넘겼다. 고개를 살짝 숙여 레이스 케이프를 봤다.

이미 어떻게 생겼는지 착용했을 때는 어떤 모습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본 것처럼 나는 감동 받은 얼굴로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감사해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공작님께서 직접 해 주시니 더 그런 것 같아요. 어때요?”

보란 듯이 목을 쭉 빼내고 레이스 케이프가 잘 보이게 했다. 헤레이스가 나를 지그시 보더니 갑자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가 장난기가 발동할 때 나오는 표정이기도 했다.

“부인을 가장 빛나게 만들어 주는 걸 선물해 주고 싶었습니다. 역시 이 안에서 부인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헤레이스의 말을 듣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영애들에게서도 이번만큼은 노골적인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짓궂은 야유가 섞였다.

헤레이스와 나, 우리 두 사람 모두 입에 발린 말의 향연이었다. 어떻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저런 말을 이어 나갈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지만, 모두가 보는 내 얼굴은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입에 경련이 날 정도로.

그래도 헤레이스의 말은 오글거렸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이 안에 있는 그레이스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고, 더 이상 그레이스가 헤레이스의 내연녀라는 것도 힘을 잃게 될 것이란 소리였다. 그와 더불어 내 위치는 점점 더 견고해질 것이고.

회귀 전에,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 적이 있었다.

상황은 비슷했지만, 내가 느껴야 하는 감정은 너무도 달랐던 과거의 어느 날이었다. 그때는 이미 사교계에 그레이스와 헤레이스의 내연 관계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던 시기였다.

나는 과거에 철저하게 황녀가 아닌 헤레이스 공작 부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공작가를 위해 도움을 요청할 때 빼고는 황궁으로부터의 개인적인 지원은 모두 끊으려고 했었다. 헤레이스와 나를 둘러싼 소문의 질이 나빠질수록 더는 참지 못하고 날뛰려는 루이스를 뜯어 말려 가며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공작가의 일원이 되고자 했었다.

하지만 그런 내 저자세가 결과적으로는 영지도 없는 자작가의 영애인 카일라를 비롯해서 그레이스까지 나를 무시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그 중심이 된 것은 역시나, 친목 도모를 명목으로 종종 열리는 티파티였다. 티파티가 열릴 때마다 황녀였던 시절과는 다른 내 위치를 뼈저리게 느꼈다. 사교계는 어느새 그레이스의 중심으로 옮겨 가 있었다. 내 초대가 없어도 그레이스는 공작가에서 여는 티파티에 당당하게 참석하곤 했었다. 하지만 다른 영애까지 있는 곳에서 헤레이스를 대동한 채 내게 위세를 부린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미 레이스가 유행했던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왔을 때도 드레스에 레이스를 조합한 스타일은 유행을 끌고 있었다. 그레이스 역시 자신의 몸매를 자랑하듯이 체형이 드러나는 드레스에 가슴 라인이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레이스를 걸치고 있었다.

그때, 여자들의 티파티에는 관심도 없던 헤레이스가 지나가던 길이라는 핑계로 들린 것은 분명 그레이스와 이미 입을 맞춘 계획적인 방문이었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헤레이스에게 다가가 격식에 맞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레이스가 떨어져 버렸네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숙여 레이스를 줍는 척하더니, 곧바로 몸을 일으키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드레스 때문에……. 힘드네요.’

그레이스의 말은 가슴 라인의 노출이 심한 드레스 때문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힘들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다른 여자의 남편에게 말하는 속셈은 너무도 뻔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영애들이 나와 그레이스를 번갈아 보며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굴하지 않고 헤레이스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데……. 이걸 어쩌죠.’

내가 당장이라도 다른 레이스를 준비해 주겠다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헤레이스가 고개를 숙이더니 레이스를 주워 그레이스에게 둘러 줬다.

내가 주최한 티파티에서 내 남편이 다른 여자와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것도 이미 내연 관계라고 공공연하게 소문이 다 나 있으면서, 뻔뻔하게!

나는 분노했지만, 그 분노를 풀 상대는 없었다. 헤레이스는 그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그레이스는 어디까지나 친절한 배려를 받아서 감사한 마음을 표하는 영애의 행세를 하고 있었으니까.

더욱 황당한 건,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레이스가 귀족 여성들이 좋아하는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스타일로 더욱 더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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