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6장. 일단 나한테 잘 해 (6)
‘대체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어!’
결국, 그 상황에 가장 분노하고 표출한 사람은 올리비아였다.
‘거기서 네가 머리채를 잡아당기든 손가락질을 하든, 누가 감히 너에게 뭐라고 해! 그냥 저지르면 될 일을 왜 가만히 당하기만 하는 거야? 어우, 속 터져!’
그렇게 말하면서 올리비아는 얼음물을 입안으로 벌컥 들이부었었다.
그날이 헤레이스의 본처인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정부인 그레이스를 사실상 실세로 사람들에게 인식을 심어놓는 계기가 되었었지.
그러니 부부관계에서 내가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얼마나 당당한지 보여 주는 것은 결혼한 여자라면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아무리 잘난 가문 출신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는 다른 곳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회귀 전, 반역이 일어났을 때 헤레이스과 그레이스는 연인 관계였다. 그렇기에 그레이스의 가문은 반역의 중심에 함께 있었다. 나라는 존재 따위는 없는 것처럼. 하지만 그게 가능했던 것은 결혼생활 내내 헤레이스는 나를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와 헤레이스의 다정한 모습과, 더 나아가 헤레이스가 내게 적극적으로 애정 표현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과거와는 다른 관계를 만들어 놓는다면, 반역을 하게 되더라도 그레이스의 가문은 이전처럼 중심에서 활약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 전에 헤레이스와 그레이스의 가문 사이에 관계가 완전히 깨지면 물론 더 좋고.
헤레이스는 내가 미리 얘기한대로 철저하게 그레이스를 외면했다. 시선은 오로지 내게 고정된 채 누가 봐도 사랑하는 여자를 보는 눈빛이었다. 사랑하지 않아도, 단지 역할인데도 이런 눈빛을 할 수 있구나. 하지만 덕분에 영애들에게 효과는 확실해 보였다.
카일라는 신기할 정도로 헤레이스가 들어온 순간부터 뻣뻣하게 굳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난 거라고 생각해도, 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카일라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무시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헤레이스가 영애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하고 마지막으로 내 어깨를 감싸며 다시 인사한 후 떠났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영애가 중얼거렸다.
“…역시 소문이 맞나 보네요.”
그와 동시에 자리에 있던 모든 영애의 시선이 그레이스에게로 향했다.
“그럼…그레이스 영애는…….”
어디선가 짧은 비명 같은 소리가 모이지 못한 채 공기 중에 흩어진 상태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그레이스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무섭게 노려봤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상황을 그저 방관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흥미진진한 것이 팔짱을 낀 채 관람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카일라 영애. 지금 그대가 말했나요?”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살얼음 같았다. 오늘 티파티 내내 가장 구석 자리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던 카일라가 놀란 듯 말을 더듬거렸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감히. 자작가의 영애 주제에…….”
그레이스가 입술을 씹으며 카일라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노려볼 때였다. 순간 그레이스에게 고정되어 있던 올리비아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레이스 영애. 조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네? 그게 무슨.”
답지 않게 흥분한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이런,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지. 그레이스.’
내가 짧은 비소를 짓자 그레이스가 움찔하며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 내 앞에서 시건방지게 굴던 여자가 겁을 먹고 긴장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황녀이며 공작 부인인 내 앞에서 백작 영애 주제에 언성을 높이는 건 무슨 무례인가요.”
그렇게 말하는 내 눈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것은 경고였다.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 내 한마디에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는 기분 좋은 티파티는 무리겠군요. 오늘은 이만하는 것이 좋겠어요.”
화기애애하게 시작한 티파티는 결국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몇몇 영애들이 억지로 미소를 짓다가 끝이 났다.
티파티 내내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웃은 사람은 올리비아가 유일했다.
* * *
내가 기대했던 얼굴을 하고 돌아간 그레이스와 다른 영애들과는 달리, 헤레이스는 지나치게 의욕적이었다. 티파티에 잠시 들렸을 때도 그가 엄청난 연기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즐기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마저도 그의 모습에 이 상황이 진짜라고 속아 넘어갈 만큼. ]
티파티가 끝나고 헤레이스가 찾아와 물었다.
“괜찮았습니까.”
“나쁘진 않았어요.”
결과적으로 티파티는 원하는 방향으로 끝났다. 내 대답에 헤레이스가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말했다.
“다음엔 더 만족스럽게 해 드리겠습니다.”
“네…?”
다음이라니, 헤레이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내가 그를 돌아보자 그는 마냥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왠지 헤레이스가 의욕이 가득해 보이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이겠지.
이번 티파티로 내가 원했던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과거에 내가 느껴야 했던 질투심과 좌절감을 그레이스와 카일라 영애가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들이 헤레이스를 포기하고 앞으로 반역에 관한 지원을 해 주지 않는다면 더더욱 좋은 일일 테지만.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균열은 생기겠지. 그들 사이에 공고했던 관계에 생긴 균열이 점점 벌어지고, 나중에는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면 그때 내가 파고들 수 있는 틈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꼭두각시가 되어 내가 만든 판에서 움직여야 하는 헤레이스가 느껴야 할 수치심. 과거에 내가 그에게 휘둘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최소한의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티파티는 내 목적대로 잘된 것 같았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레이스와 카일라는 내가 원하던 대로 된 것 같은데, 티파티 내내 내가 시킨 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여야 했던 헤레이스는 어쩐지…즐거워 보였다. 마치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처럼.
‘뭐지…이 애매하게 찝찝한 느낌은.’
헤레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가며 활짝 웃었다. 너무 해맑아 보여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반쪽짜리 통쾌함이었다.
* * *
최근 헤레이스 공작가는 제국 내, 특히 사교계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고 있었다.
과거에 헤레이스가 새로 만나는 영애들, 여전히 멍청하게 순정을 바치는 황녀에 대한 이야기가 일상처럼 떠돌았던 것과는 다른 온도였다. 그 관심의 중심은 결혼 전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헤레이스에 관한 소문이었다.
하지만, 헤레이스의 변화를 둘러싼 소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각종 추측으로 인해 여러 가지 가설들이 생겨났다. 대부분 이런 내용들이었다.
소문 하나, 헤레이스 공작이 에일린 황녀에게 푹 빠졌다.
소문 둘, 에일린 황녀가 변심해서 헤레이스 공작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소문 셋, 한밤중에 헤레이스 공작이 에일린 공작 부인에게 쫓겨났다.
소문 넷, 황녀에게 고백한 헤레이스가 지금까지의 뿌리고 다녔던 염문설에 등장하는 영애들을 모두 정리했다.
소문 다섯, 헤레이스 공작가가 갑자기 황녀를 좋아하게 된 건 협박당해서다.
분명, 내가 헤레이스 공작에게 반해 억지로 강행한 결혼이었고, 결혼 후에도 밖으로 나돌던 헤레이스 공작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헤레이스 공작이 갑자기 나에게 푹 빠진 것처럼 행동하는지, 그가 더 이상 다른 여자를 만나지는 않는지. 모든 것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티파티 이후, 최근 헤레이스의 행동 때문에 그 관심은 더욱 커져 가고 있었다.
내가 최근에 느낀 찝찝함의 원인은 바로 헤레이스 때문이었다. 티파티는 내가 헤레이스와 그의 내연녀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해 준비한 자리였다. 당연히 헤레이스는 싫어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어쩐지 헤레이스는 티파티에 그것들을 즐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내게 푹 빠졌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내가 시켜서 억지로 한 일로 인해 퍼진 소문이었다. 사실이 아닌 소문을 들었으면 싫어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헤레이스는 정반대였다. 그것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가 헤레이스에 ‘저한테 잘하세요.’라고 말한 이후, 내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오해하기 딱 좋게. 게다가 그는 티파티 이후, 내가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선물을 가져왔다.
하루는, 헤레이스가 내 침실로 갑자기 온갖 종류의 꽃을 한꺼번에 보내왔다. 꽃을 받자마자 나는 경악했다.
“이게 다 뭐야…?”
이 야만적이고 비효율적이면서 사치스러운 선물은. 꽃 중에는 현재 계절에는 피지 않아서 제국과 다른 기후인 나라에서 수입해 와야만 하는 것까지 있었다. 이 꽃들을 사기 위해서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싼 가격으로 사야만 했을 것이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나는 다시 그가 가져온 꽃을 바라보았다. 내가 원한 적 없는 꽃을 좋아할 리 없었다. 이건 감동이 아니라 너무 비효율적이라 한숨이 나왔다. 이 꽃을 내가 미치도록 좋아한다면 모를까. 심지어 나는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저는 꺾인 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