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6장. 일단 나한테 잘 해 (7)
꽃은 한 번 꺾이는 순간 시들어 결국 죽는다. 누군가가 단 한 순간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죽어 가는 생물이라니. 차라리 후원에 나가서 살아 있는 상태로 다른 꽃들과 함께 만발해 있는 꽃의 모습을 보는 게 훨씬 좋았다.
“아…….”
헤레이스가 짧게 신음했다. 미처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선물은 그래서 어려운 것이었다. 상대방의 사소한 취향을 알아야 한다. 상대에 대해 평소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선물에서 드러난다.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을 가져와도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이렇게 내 취향과 한참 벗어난 선물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그를 돌려보냈다.
“그럼 이만.”
그는 돌아갔지만, 그가 남기고 간 꽃들이 내 방에 쌓여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골치였다. 시녀 한 명이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건 어찌할까요.”
“그러게. 어떡할까.”
꽃은 한 번 꺾어 버리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데. 이미 꺾어 버린 꽃들을 바라보았다.
“버릴까요…?”
그렇게 물어본 시녀는 내가 싫어하니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 버리는 게 가장 낫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글쎄.”
나는 꽃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 *
얼마 후, 헤레이스는 한 번의 실패 따위는 전혀 굴하지 않는다는 듯이 쉬지 않고 다른 선물을 내게 가져왔다. 이번에는 내가 헤레이스에게서 처음 받은 선물이었던 마담 세실 의상실에서 맞춘 드레스와 주얼리였다.
“저는 더 좋은 드레스가 이미 넘치도록 있어요.”
이건 내 드레스룸에 진열되어 있는 많은 드레스 중 하나에 불과했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그만큼.
“이건 최근에 나온 디자인입니다. 기존에 있던 것들과는 다른…….”
“그런 디자인의 드레스 또한 많이 있답니다.”
내가 에밀을 힐끔 쳐다봤다. 당장 연회나 사교계 모임이 없다고 해도 언제 어떤 상황이 생길지 모를 것을 대비해서 에밀은 내 드레스룸과 진열장에 최신 스타일을 모두 구비해 놓았다. 물론, 헤레이스가 고심해서 골랐다고 하는 드레스와 비슷한 것들도 이미 충분히 있었다.
이번에는 나름 고심을 했는지 내 반응에 헤레이스가 실망하며 고개를 떨궜다. 헤레이스의 뒤에 있는 앨버트로부터 그래도 일부러 준비한 선물인데 나에게 제발 한마디라도 해 달라는 애원이 가득한 시선을 받았다. 의기소침한 헤레이스의 모습이 알 수 없는 압박으로 느껴졌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선물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꽃, 두 번째는 드레스와 주얼리. 내게 잘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 거라면, 그냥 한 번 받아 주면 끝나는 걸까. 그럼 그냥 받을까…생각했다.
그런데 순간, 과거에 헤레이스와 내연녀들에 관한 소문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모두 과거에 내가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것들. 그리고 그레이스나 카일라가 숱하게 받았을 것 같은 선물들이었다. 역시 이건 받고 싶지 않았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에밀이 말했다. 지켜보다가 답답해서 튀어나온 말 같았다.
“선물은 받는 사람이 좋아야 진짜 선물이죠. 상대방을 향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선물은 결국 자기만족이랍니다.”
에밀의 거침없는 말에 당황했는지, 앨버트가 헤레이스의 눈치를 보며 다급하게 불렀다.
“…에밀!”
앨버트는 나와 헤레이스의 눈치를 보며 차마 에밀을 부른 뒤에 뭐라 말은 하지 못한 채 눈빛과 손짓으로 에밀에게 그만하라고 바쁘게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에밀은 보고도 못 본 척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앨버트가 절망하는 모습이 보였을 때였다. 에밀은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는지, 한 발짝 앞으로 나서 내 앞에 섰다. 이제 내 시야에 보이는 건 에밀의 뒷모습뿐이었다.
그나저나, 에밀의 등이 언제 이렇게 든든해졌었지. 아니, 원래부터 든든했었나. 에밀은 언제나 내가 위기에 빠진 순간이면 나를 대신해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듯 내 앞에 위풍당당하게 서곤 했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나를 지켜 주는 에밀이라니, 루이스보다 더 멋있다. 고 울컥할 것 같았다.
‘역시 내 유모! 에밀!’
속으로 에밀을 응원하는데 순간, ‘어라, 근데 에밀이 지금 날 왜 지켜 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게 위기라고는 단지 헤레이스가 가져온 선물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뿐인데.
“이런 일로 괜한 부담을 주지 마세요.”
에밀은 자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볼일이 끝났다는 듯 문을 닫아 버렸다.
대체 에밀이 내 앞에서 어떤 얼굴을 했기에 헤레이스와 앨버트가 순식간에 문밖까지 쫓겨난 거지? 에밀의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는 내가 답답해서 움찔거리자 기척을 느낀 에밀이 뒤돌아 나를 봤다.
“이제 편히 쉬세요.”
와……. 이렇게 자애로운 미소일 수가. 몸을 돌려 나를 보는 에밀의 표정은 자애로움으로 가득한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대체 좀 전까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으, 응……. 고마워.”
에밀의 미소는 나를 지켜 주고, 그녀의 등은 누구도 넘을 수 없는 벽처럼 헤레이스를 차단했다.
* * *
그 후, 헤레이스는 한동안 조용했다. 뒤죽박죽 정신이 없을 만큼 시끄러웠던 헤레이스의 선물 소동(?)이 갑자기 멈추니까 오히려 조용함을 넘어서 적막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포기했나.”
문제는 내 혼잣말을 에밀이 들었다는 것이고. 에밀이 물었다.
“서운하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눈을 흘기는 것으로 대신 대답하며 부정했다.
제발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소모전이었다. 어차피 그가 내게 어떤 선물을 해도 나는 기쁘지 않을 테니까. 선물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그게 무엇인가 보다는 누가 어떤 마음으로 주는 것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까.
그런데 나는 애초에 헤레이스가 왜 갑자기 내게 선물 공세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가 순수하게 주는 선물인지. 뭔가 속셈이 있는 것인지. 뇌물의 한 종류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헤레이스에게 요구했던 것은 내 말을 잘 들으라는 것이었다. 내가 필요하다고 여길 때만 대외적으로 사이좋은 부부인 척, 내게 잘하는 척하는 것이지. 내가 요구한 적도 없는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은 덧없었다. 헤레이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새로운 선물을 준비했다.
“이게 다 뭐죠.”
이번에는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 평소처럼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왔을 뿐이었다. 식당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맛있는 냄새와 풍미를 자랑하는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냄새는 평소와 비슷한데, 내 눈앞에 보이는 음식의 비주얼이 평소와는 사뭇…, 아니 너무 많이 달랐다.
하나의 예술작품인 것마냥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주방장의 플레이팅 실력은 어디로 가고. 채소는 너무 크고 고기는 탔고, 그릇 위에서는 마치 찌그러진 그림 같이 플레이팅 한 이 괴상망측한 요리는 뭐지?
“보기에는 좀 그래도 맛은 괜찮습니다.”
“…공작님께서 전부 다 직접 하신 건가요?”
이번에 헤레이스가 준비한 선물은 직접 만든 요리였다.
“주방장이 만든 요리는 어쩌고…….”
나도 모르게 진심부터 새어 나왔다.
“저번에 식당에 갔을 때 부인이 좋아하던 음식이 생각나서. 직접 배웠습니다.”
“황궁 출신 주방장이 하는 그 식당에서요?”
“네, 주방장한테 직접 배웠습니다.”
헤레이스는 ‘직접’ 배웠다는 것을 강조했다.
직접 배웠다라……. 근데 왜 비주얼이…제대로 못 배운 거 같지?
이전까지 가져온 선물을 모두 거절한 것도 있고, 어차피 저녁은 먹어야 하니 그의 말대로 맛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맛이 어떤가요?”
분명 맛있을 거라는 확신에 찬 헤레이스의 눈빛이 부담스럽게 빛났다. 나는 음미하는 척 눈을 감고 씹고 또 씹어도 삼켜지지 않는 고기를 씹었다.
“이번에는 부인이 어떤 걸 좋아할지 열심히 고민해서 준비했습니다.”
“…….”
“부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 드리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꿀꺽. 겨우 삼켰다. 열심히 내게 이것저것 설명하던 헤레이스를 빤히 바라봤다. 그가 이 요리를 만드는 데 든 정성은 알겠다. 하지만…….
“공작님.”
“예. 부인.”
헤레이스는 이번만큼은 자신 있다는 듯,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분명 회귀 전이었더라면, 나는 이 요리에서 흙보다 더 지독한 맛이 난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맛있는 척하며 전부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요리는 너무 맛이 없었다. 아직도 목에 고기가 걸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선물을 위장한 복수가 아닌가 싶을 만큼.
나는 헤레이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으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누가 한 요리든 맛있는 요리를 좋아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주방장에게 요리하게 하세요.”
그리고 헤레이스는 좌절한 듯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나름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큰 것처럼. 결국, 그는 이번에도 실패했다.
* * *
헤레이스의 선물은 모두 엉망이었지만, 그와는 관계없이 그의 선물 공세로 인해 소문은 더욱 더 확고해졌다. 티파티 때까지만 해도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를 반신반의했던 사람들 역시 점점 소문을 믿기 시작했다. 그것도 헤레이스가 내게 열렬하게 구애 중이라는 소문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레이스와 카일라를 비롯한 헤레이스의 내연녀라고 소문이 돌았던 영애들은 더더욱 패배감을 느낄 것이다. 헤레이스와 영애들의 관계가 나빠질수록, 영애들을 연결 고리로 반역을 도모해 오던 가문들 간의 관계 역시 틀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헤레이스가 내게 빠져 있다는 소문이 돌수록 나의 입지는 강해지고, 그가 반역을 도모할 때 나와의 소문이 발목을 잡는 역할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에게 열렬한 구애를 하던 헤레이스가 반역을 도모한다고 하면 귀족 중에 의심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 역시 자연스러우니까.
게다가 소문이 이 정도로 확산 되었으니 사람들에게 그 소문을 믿도록 하는 수고스러움을 피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