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6장. 일단 나한테 잘 해 (9)
금 수입 및 유통 독점권이 위임되는 가문이 정해지는 날은 제국 최대의 이벤트 중 하나였다. 제국에는 금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귀족이 그 결과를 기다렸다.
금이란 불멸의 가치를 가지는 물질. 바다 건너 먼 나라에 다녀온 모험가의 허황한 말에 따르면 자신이 다녀온 나라에는 황궁 전체를 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말을 믿는 제국민은 없지만, 그만큼 금이란 존재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또한 금을 독점 수입 및 유통할 수 있게 되면, 그 과정에서 희귀한 보석들도 함께 수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제국에서는 보기 힘든 금과 희귀한 보석은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과거에는 이것을 사적으로도 할 수 있었지만, 루이스가 황제가 된 이후로는 황가에서 독점으로 관리하며 그 역할을 1년씩 위탁받아 관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게 되었다.
1년마다 바뀌지만, 귀족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그중 금 수입 및 유통에 관한 독점권을 가지고 다툴 수 있을 만큼 가문의 지위와 힘이 받쳐 줄 수 있는 귀족은 더욱 한정되어 있었다.
결국, 특정 몇 가문 간의 다툼이었다. 1년간 제대로 하기만 한다면 향후, 몇 년간은 루이스가 꾸준히 기회를 준다. 그 몇 년이 보장되는 것만으로도 가문은 헤아릴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과거에 헤레이스가 내 도움으로 가문을 일으킬 때, 바로 이 금 수입 및 유통 독점권이 가장 큰 몫을 했었다. 형식적으로 1년에 한 번씩 가문을 결정할 뿐, 결혼 후에는 언제니 공작가의 사업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번엔 어느 가문일까요?”
“글쎄.”
이것은 오로지 황제의 권한이었다. 재상을 비롯한 수많은 보좌관이 최적의 선택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살피고 각 가문의 동향을 살핀다. 그 후에 황제에게 관련 보고와 조언을 더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결국, 그것을 참고하는 것도 그러지 않는 것도 황제의 권한이었고, 최종 선택 역시 오로지 루이스의 몫이었다.
그러다 내가 결혼한 후에는 대부분의 사업이 공작가에 쏠리는 현상이 벌어졌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루이스가 누구를 선택하든 나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불가능하겠지.”
공작가가 이번 사업권을 따내는 것은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루이스가 자의로 그를 도울 일은 ‘절대’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 만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뛰어다니고 있는 보좌관들의 노력은 결국 헛수고로 끝날 것이었다.
그래도 헤레이스는 뻔히 아는 결과라도 시도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것을 위해 나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선물들을 급하게 바치기 시작했던 것처럼.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나는 루이스에게 어떠한 부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굳이 부탁이라고 치자면 어떠한 지원도 하지 말아 달라고 했었지. 그러니 헤레이스는 절대로 금에 관한 어떠한 사업도 얻지 못할 것이다.
* * *
사업권을 위임할 가문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당연하게도 공작가가 아니었다. 사업권을 위임받은 것은 뉴튼 백작가. 올리비아의 가문이기도 했다.
정신없이 분주한 공작가를 무시하고 아침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역시나 이사벨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저 멀리서 이사벨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언제나 연약한 척, 고상한 척 연기하느라 휘청거리던 평소의 모습은 전혀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저돌적으로.
그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다짜고짜 따지듯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무슨 얘기죠?”
이사벨이 감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씩씩거렸다.
“사업권이 어째서 공작가가 아니라 뉴튼 백작가에게 간 건지 묻잖아요!”
“그걸…왜 저에게 묻죠.”
“그게 무슨…!”
나는 이사벨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순간 벌겋게 달아올랐던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에일린…….”
나는 그에 딱딱하게 답했다.
“네, 부인.”
그녀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녀는 멍하게 바닥을 보며 말했다.
“혹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거라면……. 사과할 테니…….”
이사벨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말 한마디마다 심하게 떨려서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이러지 말아요….”
이사벨이 힘겹게 말을 마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이사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사업권을 선정하는 것은 황제 폐하의 몫이지,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냉정한 말에 이사벨의 눈이 커졌다가 좌절로 인해 점점 아래로 쳐졌다.
이사벨의 반응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지금까지 헤레이스의 이상한 행동들과 앞으로 그가 보일 반응들이. 나는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다 그대로 돌아섰다.
내 말을 그녀가 곧이곧대로 듣고 포기할 리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사벨 역시 알아들었을 것이다. 내가 더 이상 그녀에게 호락호락 휘둘려 줄 생각 따위 없다는 것과 나로 인해 황가의 덕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걸.
* * *
독점 사업권이 발표되자마자 찾아온 이사벨과는 달리, 헤레이스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와 만난 것은 하루가 지나고 후원에서 식당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헤레이스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이네요.”
헤레이스는 이사벨과 달리 속내를 숨기고 다가왔다. 어떻게 내게 접근할까. 사실 기대하며 지켜봤다.
“같이 걸을까요.”
“…그래요.”
헤레이스가 같이 걷자는 말에 ‘지금이구나.’ 알아차렸다. 이렇게 먼저 얘기를 시작하고 은근하게 물어보려는 거구나.
일단, 그의 대화에 응했다. 그런데 헤레이스는 평범한 안부 인사 후에도 일상적인 대화만 이어 갔다. 독점 사업권의 결과를 듣자마자 내게 따지러 온 이사벨과는 반대였다.
일단 언제 얘기를 꺼내나 더 기다려 보자.
“이렇게 걷는 건 오랜만인 것 같군요.”
“그동안 바쁘셨으니까요.”
헤레이스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감상하듯이.
“그동안 사업권 때문에 바빠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의 말에 순간 움찔했다. 헤레이스가 독점 사업권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이제 본론을 꺼내려는 거구나. 나는 앞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그
런데 긴장을 한 나와는 달리 헤레이스는 입매를 옆으로 늘이며 기분 좋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시간이 났습니다.”
“…….”
“좋네요.”
헤레이스는 다시 앞으로 걸어가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로지 지금 걷고 있는 것을 즐기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독점 사업권에는 흥미가 없는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헤레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신나 보이는 거지?
‘왜…….’
그런데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않는 거지.’
헤레이스는 여전히 아무래도 좋은 별것 아닌 얘기들만 이어 나갔다. 사업권에 대한 얘기를 꺼낼 기미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오히려 나였다.
내가 따라가지 않자, 뒤돌아본 헤레이스가 내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부인,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한 겁니까.”
나는 딱딱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이건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다. 어째서 헤레이스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계속 이러는 거지? 내게 원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는 건가?
이사벨 다음에는 헤레이스 차례였다. 분명 그럴 것이었다. 그런데 헤레이스는 그 얘기를 전혀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이번 독점 사업권은 뉴튼 백작가에 갔더군요.”
그가 그토록 원했을 독점 사업권. 하지만 내가 그를 농락하기만 했을 뿐, 결국 다른 사람의 손에 쥐여 준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분명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그를 비웃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작 헤레이스의 즐거워 보이는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당혹스러웠다.
헤레이스는 갑작스러운 내 말에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부분입니다.”
“…?”
그나저나 예상했다니. 나는 헤레이스를 떠보기 위해 물었다.
“…괜찮은 겁니까.”
독점 사업권을 위해 황궁 연회에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내건 조건들을 모두 따른 거였을 텐데. 그는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쉽긴 하지만…어쩔 수 없죠.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수밖에요. 그것보다 잠시 정자에서 차라도 마시는 건 어떻습니까.”
헤레이스는 독점 사업권에 대한 것은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미련 없이 화제를 바꿨다. 그의 말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헤레이스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인…?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나는 당황함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그게…차 마시죠.”
시녀들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헤레이스는 여전히 독점 사업권과는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에밀의 보고와 함께 앞에 준비된 찻잔을 잡으며 나는 생각했다. 혹시 이번 일은 대충 넘어가고 다른 걸 노리는 건가. 분명 황가에서 위임하는 독점 사업권은 그뿐이 아니었으니까.
할 수 없지. 헤레이스가 먼저 얘기하진 않으니, 내가 먼저 말하는 수밖에.
나는 준비했던 말을 헤레이스에게 꺼냈다. 그가 나에게 지금까지 열심히 맞췄던 이유, 그 기대감을 배신하는 말을.
“앞으로 황궁에서 공작님께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헤레이스와 이사벨은 나한테 얻어 낼 수 있는 수많은 이권을 노리고 나를 붙잡고 있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