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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38화 (38/124)

?제38화. 6장. 일단 나한테 잘 해 (10)

“결혼 후에 공작가의 채무 관계는 이미 해결이 된 것을 알고 계시지요. 저와 황궁에서 공작가를 위해 지원하는 것은 그게 전부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이 가문을 일으키는 것도 지금보다 더 위태롭게 만드는 것도, 공작님의 능력이겠죠.”

이 말을 들었을 때, 헤레이스가 분명 당황하며 나를 설득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담담함을 유지했다.

“네. 알겠습니다.”

너무 쉽게 나온 대답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다시 한번 확인하듯 말했다.

“앞으로 사업에 어떤 도움도 없을 겁니다. 추후 생기는 빚 또한 물론이고요.”

“네, 이해했습니다.”

헤레이스는 모든 것을 이해한 얼굴이었다. 내게서 가장 원하는 것을 주지 않겠다는데, 어째서 태평스러운 거지. 나는 순간 또다시 혼란스러울 뻔했다.

“정말 괜찮습니까.”

“네, 애초에 그런 건 제가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내가 가문에 갖다 바칠 사업권과 혜택 때문에 나와 결혼하고, 황궁에 있는 나를 데려오려고 애쓴 사람이라고 보기에 너무도 담백한 모습이었다. 헤레이스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태연했다.

마치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7장. 반역을 막는 방법 (1)

금 독점 사업권이 발표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사실 발표 전부터 다음 날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예측과 소문들은 이미 돌고 있었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공작가는 금 독점 사업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보좌관들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고군분투했다. 그들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앞으로도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간절했다. 지난 일주일은 힘겨웠고, 마지막 하루는 처절했다.

하지만 결과는 당연하게도 공작가가 아니었다. 금이 또 다른 금을 낳는, 그야말로 손에 닿기만 해도 돈이 되는 사업을 루이스가 헤레이스 공작인 내게 줄 리가 없었다.

“하아…….”

“공작님.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보좌관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사업권을 놓치고 가장 크게 실망하고 좌절한 것은 내가 아니라 보좌관들이었다.

“당장 수익을 내는 사업을 찾아야 합니다.”

“우선 장기전으로 생각해서 투자한 사업에 손을 떼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공작가를 유지하는 것조차도 힘들어질 겁니다.”

“그건 좀 더 기다려 보지. 지금 당장은 아쉬워도 시간이 지나면 분명 엄청난 돈이 될 거야.”

보좌관들의 쏟아 내듯 얘기했지만, 나는 지금 침착해야 했다. 내 말에 보좌관들이 모두 반대했다.

“그러기엔 위험이 너무 큽니다!”

“공작님! 제가 보기에 그건 투자가 아니라 모험입니다. 모험의 끝엔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처럼 위험하기에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쫓기듯 내린 성급한 결단은 공작가를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몰아갈 수 있었다.

“성공했을 땐 그 어떤 투자보다도 더 큰 이익이 돌아오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결국, 보좌관 중 한 명이 폭발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공작가는 그동안의 부채와 사업 실패로 인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웠다. 그야말로 무늬만 공작일 뿐. 가문의 힘이나 실속은 사실상 자작 가문에 불과한 카일라 영애의 가문보다 결코 더 낫다고 할 수 없었다.

결국, 가문의 힘과 권위를 결정짓는 것은 허울뿐인 작위가 아니라, 작위를 전제로 한 돈과 재물이었다. 그러니 공작 가문의 보좌관들이 그동안 당한 수모와 고생을 모르지 않는다.

모두가 억지로 하는 결혼이라고 수군거리며 비아냥거림이 섞인 동정을 표할 때도, 보좌관들의 반응만큼은 달랐다. 그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했다. 그것이 나와 에일린을 위한 축하가 아니긴 했지만. 황녀가 공작 가문에 오게 되면 앞으로 가문은 탄탄대로가 될 것이고, 다른 가문에서도 다시는 업신여기지 못할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렇게 못 돼서 안 됐군.’

각각 의자나 책상에 쓰러져 있는 보좌관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니 이제 슬슬 구제도 해 줄 겸 고생 좀 시켜야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그래서 이번 사업 독점권은 어디로 갔지.”

“뉴튼 백작가입니다.”

내 물음에 답하는 보좌관의 목소리는 축 늘어져 있었다. 공작가가 아니라면 다른 어느 가문이든지 느끼는 상실감은 똑같은 거다. 하지만 분명 이건 희소식이다. 뉴튼 백작가라니.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덕분에 나는 계획대로 진행해도 되는 거군.

“그럼 앞으로 공작가의 주요 사업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지.”

보좌관 중 한 명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주요 사업이라고 할 만한 게 있습니까.”

나에 대한 불만 표시였다. 보통 이런 경우 보좌관은 불경죄로 문책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그 역시 공작가와 내가 걱정돼서 이러는 것을 아니까.

나는 당장 죽을 것처럼 안색이 어두운 보좌관들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금을 수입해 파는 것만큼이나 돈이 될 사업이지.”

이전부터 금 사업권이 내게 오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사업을 찾고 있었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의욕을 상실하고 온몸이 바스스하고 부러질 것 같던 보좌관들의 눈빛이 서서히 살아났다.

“그게 무슨 사업입니까.”

“확실한 겁니까.”

돈이 된다면 보좌관들은 당장이라도 일을 시작할 기세였다. 모두가 내 입술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오늘은 이만 퇴근하지. 사업 이야기는 내일 설명할 테니.”

그러자 보좌관들이 재빨리 일어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지금 일할 수 있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당장이라도 준비하겠습니다.”

보좌관들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들은 내가 사업에 대해 얘기하자마자 바로 착수할 생각이었다.

“내가 피곤해서 안 돼.”

이미 만 하루를 쪽잠도 자지 않고 뜬눈으로 지새웠다. 엄청난 집중력으로 공작가가 사업권을 얻을 때 다른 가문에 비교해서 더 나은 이유를 찾고, 그것을 뒷받침할 증명을 대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공작가에게 사업권이 오지 않을 걸 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일말의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다른 가문들이 어떤 조건을 내걸었는지. 혹시 새로 생긴 정보는 없는지. 첩보와 눈치도 능력이었다. 그렇게 계속 날이 서 있는 상태로 있다가 결과가 나오고 모든 긴장이 풀렸을 것이다.

‘괜찮을 리가 없지.’

억지로 보좌관들을 퇴근시키고 집무실에 혼자 남았다.

텅 빈 집무실은 난장판이었다. 하루 동안 정신없이 자료를 찾고 또 다른 자료를 찾는 일을 반복했다. 그사이에 종이들은 바닥에 떨어지기도 하고 다른 서류와 섞이기도 했다. 이미 다른 서류와 뒤섞인 자료가 뒤늦게 필요해지면 바닥에 뒹구는 서류 더미에서 보물찾기라도 하듯이 찾아냈다. 그럴수록 집무실은 점점 엉망이 됐다.

사람 간의 전쟁이 일어난 장소에는 시체가 널려 있듯이 펜으로 하는 전쟁에는 종이가 널브러져 있는 모양새였다.

‘내일 저걸 정리하는 것도 일이겠군.’

모든 것이 끝난 전쟁터는 공허하다. 그것이 펜으로 하는 것이든 검으로 하는 것이든. 그 한복판에 서 있으면 자꾸만 과거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전쟁이 끝나면 참혹한 현장에서 장군이든 일개 병사든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한다.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현장에 남아 음미할 사람은 없다. 수없이 벌어지는 전쟁의 피에 미쳐 버린 광인이 아닌 이상.

검보다 더 치열한 펜의 전쟁이 끝나면 집무실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취하도록 맡은 잉크 냄새였다. 피 냄새처럼 잉크 냄새에도 중독이 되어 미칠 수 있을까. 문서에 남아 있는 잉크 냄새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게 되면 결국 검을 들고 피까지 흘리는 걸까.

하지만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결말은 둘 중 하나일 뿐이다. 검을 들어 상대방을 죽이느냐. 죽이는 데 실패해 본인이 죽느냐. 나의 아버지는 후자였지.

“밖에 사람이 있나.”

“예. 공작님. 있습니다.”

나의 부름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를 좀 마시고 싶군.”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시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가지고 왔다.

“…….”

차의 물줄기가 찾잔 안으로 안정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찻잔 안에 차가 반 이상 차오르자, 손목을 뒤로 살짝 꺾었다. 물줄기가 점점 얇아지더니 더는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차를 마시기 위해 손을 뻗는데 시녀가 “잠시만.”이라며 찻주전자 옆에 있는 통의 뚜껑을 열더니, 작은 집게로 그 안에 있는 것을 집어 찻잔 위에 떨어트렸다.

찻잔 안에는 방금 전 시녀가 떨어트린 말린 꽃이 수면 위에서 작은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꽃인가.”

“예. 피로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은은하게 풍기는 꽃의 잔향이 입안에 머무는 느낌이 들었다. 피로 회복에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고작 말린 꽃 하나 올렸을 뿐인데 기분이 좋아지다니. 웃기면서도 신기했다. 찻잔 안에 있는 말린 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익숙한데…?’

찻잔 안에서 수영을 하듯 흐르는 말린 꽃은 왠지 눈에 익었다. 이전에 에일린에게 선물했다가 퇴짜 맞았던 꽃 중에 이런 모양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말린 꽃에 눈길이 갔다. 결국,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시녀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꽃이지.”

물어보면서도 역시 아닐 거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괜한 미련이라고 생각하면서 시녀의 대답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였다. 시녀가 대답했다.

“공작님께서 사 오신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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