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7장. 반역을 막는 방법 (3)
에밀은 이사벨이 얌전해지는 게 아니라 더 날뛸 것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녀의 걱정에 동의했다. 아마 이사벨은 내가 그녀를 압박하면 할수록 뒷감당은 생각하지도 않고 더 많은 빚을 질 수도 있고, 혹은 나를 향한 불만이 터져 이성을 상실하고 내게 직접적으로 해코지를 하려고 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이사벨이 그렇게 폭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씨익, 웃으며 에밀에게 말했다.
“성격대로 날뛰어도 상관없어.”
“네?”
나도 이사벨이 얌전히 주는 대로 만족해서 받아들일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현실을 받아들이게 해 줘야지.”
내게 와서 패악질을 부리든 나를 거치지 않고 멋대로 돈을 끌어다 쓰든, 우선 기다린 후 결과가 나왔을 때 확실하게 잡아 알려 줄 생각이다.
이제 공작가의 모든 재산을 이사벨 당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현실을. 한 푼이라도 스스로 벌지 않는 이상 모든 재물은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이사벨도 결국엔 인정하고 체념할 수밖에 없게 될 거다.
이사벨의 지출 관리 말고도 확인해야 할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내 책상 위에 서류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에밀이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하나씩 가리키며 말했다.
“최근 오 년 동안 사용된 공작가의 주요 예산안입니다. 이건 저택에 수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초대장하고 서신이 계속 오고 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 5년간의 예산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알아야 앞으로의 예산안을 짜는 데 참고할 수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수리가 필요한 곳이 딱히 없지만, 그 뒤편에 있는 마구간과 금고는 당장 수리가 필요해 보였다.
“초대장하고 서신은 에밀이 먼저 거르고 중요한 것만 나한테 보여 줘.”
“네, 이미 그렇게 했습니다.”
에밀이 1차로 선별한 것들을 내밀었다. 그런데 선별했다고 해도 양이 너무 많았다.
“이게 전부 중요한 거야?”
이걸 다 확인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중요한 연회 초대장만이라도 내가 직접 답신을 보내려고 했는데, 에밀에게 맡기는 수밖에.
“어차피 당분간 연회에는 참석할 생각이 없으니까. 적당히 거절해 줘.”
초대장은 모두 제외하고 서신만 골라냈더니 양이 확 줄었다. 서신을 보낸 사람 중에 눈에 띄는 인물들은 올리비아, 루이스, 그리고………. 룩센?
룩센 황태자?
“연회 때 와서 아직 안 돌아간 건가?”
“룩센 황태자께서는 현재 황궁에 머물고 있습니다.”
아직 제국에 머무르고 있었구나. 룩센은 어렸을 때 제국에 몇 년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그때 루이스와 함께 셋이서 자주 놀곤 했었는데.
서신이 담겨 있는 봉투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마 돌아가기 전에 한번 보자는 내용이겠지. 봉투를 열어 서신을 확인하려는데, 옆에 문서가 한 뭉치가 추가로 쌓였다.
아직도 처리할 일은 산더미였다. 아무리 해도 한 만큼의 서류가 곧바로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서신 확인은 잠시 미뤄 두고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근데, 뭔가 좀 이상한데. 잘못 본 건가 싶어 두 번 세 번 확인했지만, 내가 본 게 맞았다. 그럴 리가. 장부를 보는데 저택에 쓸 수 있는 비용이 전보다 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에밀. 앨버트 좀 불러 줘.”
얼마 지나지 않아 앨버트가 도착했다.
“찾으셨습니까.”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나?”
“정확히 어떤 부분인지 얘기해 주시면 제가 답하는 게 쉬울 것 같습니다.”
“공작가의 경제 상황이요. 최근에 수입이 들어올 만한 게 있었던가.”
“아. 그 부분이군요.”
앨버트는 명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라면 설명하기 어렵지 않다는 뜻이었다.
“최근 뉴튼 백작가에서 금을 수입해 제국에 많은 양의 금과 보석들이 들어왔습니다.”
그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올리비아의 가문인 뉴튼 백작가가 이번에 금 수입 및 유통에 관한 독점권을 얻었으니, 이맘때쯤이면 금을 수입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뉴튼 백작가의 수입원이지 공작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앨버트의 말에 내가 더욱 강한 의문을 품자, 그 의미를 이해한 앨버트가 다시 한번 미소를 방긋 지었다.
“귀족들은 금이든 다른 보석이든 그냥 보관하지는 않으니까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내가 재촉하는 시선을 보내자 앨버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제국에는 금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상당한 양의 금을 수입해 오는데, 대부분 귀족의 과시와 사치를 위한 용도였다.
금 수입을 자유경쟁으로 두었다가는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서 금의 가격이 무섭도록 상승하고 시장 가격이 불안정해지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금 수입은 제국에서 직접 관리하며 황가를 대리하는 자격으로 금 수입과 유통을 독점하는 가문을 매년 선정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다른 가문에 그 독점권이 가 있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헤레이스가 그 독점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수입을 낸 거지?
내가 의문을 가졌을 때였다.
앨버트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헤레이스는 최근 금을 세공하는 인력을 대량으로 모집했다. 세공업. 금을 모아 놓는 게 목적이 아닌 사람들은 금과 다른 보석들을 모두 감히 누가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우면서도 정교한 세공을 하기를 원했다.
“금 수입권은 매년 경쟁해야 하지만, 실력 있는 장인들을 확보하고 있으면 누가 금을 수입하든 제국 내에 들어오기만 해도 수입원이 되어 줄 테니까요.”
“…하지만 사업권 발표는 얼마 전이었는데.”
어떻게 벌써 일이 이렇게 빨리 진행된 거지? 내가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앨버트는 막힘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공작님께서는 사업권 발표 이전부터 이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뉴튼 백작가와 사업 협력을 약속한 것도 그 전이었고요.”
물 흐르듯 이어진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헤레이스는 공작가가 사업권을 가져오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는 거다.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금 세공업이었고, 사업권 역시 뉴튼 백작가에게 갈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이미 물 밑에서 협상을 해 왔던 것이다.
금이 사람들에게 가기 전에 중간에 꼭 거쳐야 하는 것이 세공 작업이었다. 금은 사치품이었다. 그럴수록 단순한 세공업자보다는 실력 있는 자들을 찾는 수요가 높았고, 그런 그들을 고용한다면 짧은 시간 안에 이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충분한 수입을 내는 세공업자들을 설득한 것도. 뉴튼 백작가를 설득해서 손을 잡은 것도. 이렇게 빨리 이 모든 것을 추진한 것도. 모두 헤레이스의 능력이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 헤레이스가 직접 준비한 사업이라니. 과거에는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분명 그가 내게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게 단순히 검술 실력 정도는 아니었구나.
지금 이 상황이 나에게 이득인지 손해인지 당장 계산할 수는 없었다.
과거에는 내가 먼저 헤레이스에게 사업권을 갖다 바쳤기에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사람들 역시 공작가는 아무 능력도 없이 나의 도움으로 호의호식한다며 조롱하곤 했고, 헤레이스의 능력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나와 루이스를 방심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 차라리 아무 능력도 없는 것처럼 발톱을 숨기는 것보다 드러나는 것이 낫다. 그럴수록 루이스도 헤레이스와 공작가를 경계할 테니까.
‘내 도움이 없어도 공작가는 곧 일어서겠군.’
방금 접한 헤레이스의 수완이라면 시간문제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에게 독일지 득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 * *
헤레이스가 금 세공업자들을 고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귀족에게 사치란, 기호가 아닌 필수품이었다. 이 정도는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품위가 유지되고 위상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뿌리 깊은 의식을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사치품이 필요했고,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얼마나 정교한 세공이 된 것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도에서 유명한 세공업자들을 보유하게 된 헤레이스를 건너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귀족들은 공작가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공작가는 짧은 시간에 수익을 내는 것과 동시에 귀족들에게 존재감을 제대로 보여 주게 되었다.
당연히 헤레이스에 대한 평가 역시 달라졌다.
“부인.”
목 끝까지 차오른 비명 소리를 겨우 삼켰다. 최근 헤레이스를 둘러싼 여러 가지 일들을 정리하며 산책하고 있었다. 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헤레이스가 눈앞에 나타났다. 깜짝 놀라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한 나를 태연하게 잡아 주면서!
“저 왔습니다.”
헤레이스는 어느새 뻔뻔한 미소를 흘리며 서 있었다.
‘이게 뭐하자는 수작이지?’
가장 처음 든 생각이었다. 나는 다시 중심을 잡고 헤레이스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요.”
여기는 공작가에서도 내밀한 곳에 있는 후원이었다. 하녀들도 잘 지나다니지 않아, 생각할 게 있으면 내가 찾아오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리 없었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네…?”
손님이라니, 오늘 찾아올 사람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다. 나는 다시 헤레이스를 보았고,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계속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래도 함께 손님을 맞이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헤레이스의 말이 맞았다. 아직까지는 헤레이스와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