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7장. 반역을 막는 방법 (5)
여전히 헤레이스의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 확인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계속 속이 꽉 막힌 기분이야.’
결국,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계속 이런 상태라면 곤란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올리비아가 찾아왔다.
“에일린!”
“올리비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어제 우리 부모님이 왔었다면서.”
올리비아는 백작 부인에게 내 얘기를 듣고 찾아온 것 같았다. 근데, 어째서인지 요즘 공작가를 찾아오는 손님이 많은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일까.
그래도 올리비아의 방문은 반가웠다. 그녀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또 다른 방문(?)이 있었다. 헤레이스가 내 방에 찾아온 것이다.
“손님이 왔다는 소식에 잠시 인사하러 왔습니다.”
“공작님…?”
잠시라며 자리를 잡더니,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헤레이스는 친절한 얼굴을 하고 간단한 안부 인사와 함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번에도 나와 친밀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헤레이스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와 헤레이스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러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가 얼굴에 미소를 유지한 채로 정중하게 말했다.
“지난번 티파티 때 보고 처음인 것 같군요.”
올리비아 역시 사교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땐 제대로 인사하지도 못했습니다.”
“부인과 가장 절친한 사이인데 인사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인사라도 할까 싶어 들렸습니다.”
헤레이스와 올리비아의 대화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원래 두 사람이 이렇게 잘 맞았나 싶을 정도로. 그럴수록 나는 헤레이스의 행동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헤레이스가 나를 빤히 보며 안색을 살폈다.
“얼굴이 별로 안 좋습니다. 혹시 어디 안 좋은 겁니까.”
“아뇨…괜찮아요.”
“혹시 모르니 진료를 받아보세요.”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헤레이스의 걱정은 올리비아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올리비아 앞에서까지 이런 연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헤레이스가 이럴수록 올리비아가 나와 그를 관찰하듯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올리비아와 헤레이스의 대화는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럴수록 헤레이스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 있으면 끝까지 함께 있을 것 같았다.
“공작님.”
내가 그를 부르자, 헤레이스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예, 부인.”
“올리비아와 단 둘이 대화하고 싶어요. 오랜만에 만나서 할 얘기도 많고요.”
그러니 인제 그만 빠져 달라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올리비아 앞에서마저도 이해할 수 없는 헤레이스의 행동에 협조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제가 너무 오래 있었군요.”
헤레이스는 가만히 나를 보더니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아쉬운 척하면서.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올리비아 역시 화답하듯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 헤레이스가 나가고 난 후, 올리비아와 나 사이에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에일린, 요즘 돌고 있는 소문 알고 있어?”
나와 헤레이스에 관한 소문을 얘기하는 것이다.
“어제 어머니가 여기 왔다가 돌아오시더니 너와 공작님의 사이가 좋아 보이더라고 한참을 얘기하시더라고.”
그래서 올리비아가 아침부터 달려온 거였구나.
어제 헤레이스는 뉴튼 백작 부부 앞에서 유난히 친밀한 척했었다. 그 모습을 올리비아에게 했나 보다. 올리비아는 그 말을 듣고 걱정 반 호기심 반 찾아온 것이고.
올리비아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갑자기 나를 돌아보았다.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했다.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별로 안 믿었는데.”
올리비아는 헤레이스가 나간 문에 시선이 고정된 채로 중얼거렸다.
“정말…너한테 진심이구나.”
올리비아마저도 그렇게 보일 정도라는 건가.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럴까.”
나도 모르게 비꼬는 듯한 말이 나왔다. 원래라면 올리비아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역시나 눈치 빠른 올리비아. 내 말투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냥…진심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거지. 뭐….”
나는 말끝을 흐렸다. 올리비아가 얼굴을 괴더니 “흐음….” 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나를 샅샅이 핥는 것 같아 부담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으로.
“왜…그렇게 봐?”
내가 그렇게 묻자, 올리비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진심 같은데…정작 당사자인 너는 모르겠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순간 나를 보는 올리비아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괜히 물어봤나.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올리비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흥미가 생겨서.”
이미 여러 번 언급했었지만, 올리비아는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렸다. 그녀는 끝까지 비혼을 유지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연애는 그 누구보다도 많이 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동안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올리비아였다. 아무리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말한다고 해도 쉽게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올리비아의 얼굴에 걱정이 드러났다.
“무슨 일은.”
“에일린.”
올리비아가 의미심장하게 나를 불렀다. 왠지 긴장됐다.
“확인해 보고 싶지 않아?”
뭘 확인하고 싶냐고 묻는 거지? 하지만 올리비아는 왜 모르는 척하냐는 얼굴을 하며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공작님의 행동이 진심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건지.”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멈칫했다.
“…그런 방법이 있어?”
하지만 나는 올리비아의 말을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말 때문에 시작한 행동이긴 하지만, 헤레이스의 행동은 분명 어딘가 이상했다. 이미 독점 사업권은 뉴튼 백작가에게 갔다. 나는 공작가에 그 무엇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거지?
만약 올리비아의 말대로 헤레이스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도 알 수 있게 될까.
올리비아는 대답 대신 내게 물었다.
“있다면…해 볼래?”
하지만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입꼬리를 옆으로 늘리며 나른하게 입술을 뗐다.
“먼저 다가가 봐.”
먼저 다가가라니. 나는 올리비아의 의도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회귀 전, 5년 동안 나는 수없이 헤레이스에게 먼저 다가갔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런 걸 다시 반복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다는 거지.
“공작님이 너를 정말 좋아한다면, 네가 보여 주는 아주 작은 표현에도 반응할 테니까.”
“…그럴 리가.”
올리비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부정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내 말을 받아치며 말했다. 오히려 나를 더 등 떠미는 듯했다.
“그러니까 한 번 확인해 봐.”
“다른 방법은 없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자 내 말에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 없진 않지.”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확인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그게 뭔데?”
“지금까지 해 온 행동을 보고 판단하는 거지.”
“행동…?”
“보통 정말 좋아하면 뭐든 해 주고 싶어 하니까. 그게 선물이든…….”
올리비아가 선물이라는 말을 하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헤레이스가 갑자기 내게 선물을 주기 시작했던 것이 떠올라서.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든…무조건 들어주고 싶지.”
그러면서 올리비아가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마치 너처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가장 확실한 건…….”
올리비아가 말끝을 늘이더니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도망치듯 물러났지만, 올리비아가 좀 더 빨랐다. 이미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상체를 숙여 한순간에 내 얼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역시…….”
마치 입술이 닿을 것처럼. 올리비아의 숨결이 전부 느껴졌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올리비아가 뭘 하려는 건지 기다릴 뿐이었다.
“이때 반응이지. 이런 데서 드러나는 반응은 진짜야.”
올리비아는 딱딱하게 굳은 나를 보더니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숙이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멀어졌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
결국, 처음에 했던 말과 똑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더 나갔다! 나는 무척 당황했다. 특히, 올리비아가 한 행동을 내가 헤레이스에게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말도 안 돼!
하지만 올리비아는 내 반응과는 상관없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에일린, 만약 공작님이 너를 좋아한다면 좋은 일이잖아.”
과연, 그게 좋은 일일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올리비아가 말을 덧붙였다.
“만약 공작님이 너를 정말로 좋아한다면…네 마음이 보답받는 거잖아. 게다가 더 좋아하는 사람이 결국 휘둘리는 법이니까.”
올리비아가 나를 보며 눈을 찡긋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공작님이 진심인 것 같거든.”
그럴 리 없었다. 올리비아는 지금까지 퍼진 소문과 오늘 헤레이스의 모습만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한번 잘 생각해 봐.”
말도 안 되는 소리. 올리비아의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나는 그대로 올리비아가 한 말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거부 반응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