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7장. 반역을 막는 방법 (6)
올리비아는 돌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게 잘 생각해 보라고 말하며 떠났다.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올리비아의 등을 떠밀었다. ‘생각은 무슨 얼어 죽을 생각!’ 하고 속으로 외치면서.
올리비아는 얘기하다 보면 가끔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헤레이스의 행동도 헷갈리는데 거기에 나보고 잘해 주라니, 그런 다음 어쩌라고…!
하지만 가장 미심쩍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
‘헤레이스가 나에게 반했다…?’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그건 헛웃음이었다. 그리고 비웃음.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웃기네.’
올리비아가 한 말보다 더 말이 안 되는 말이었다. 더 이상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헤레이스의 행동이 달라진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가 내게 반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가 내게 잘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필요가 있었다.
그게 혹시라도 반역에 무슨 연관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무슨 속셈인지 알아내야 해.’
하지만 올리비아가 얘기한 방법은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문제였다. 올리비아의 말을 무시하자고 하면서도 자꾸만 생각하게 됐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마음이 흔들릴 때였다. 올리비아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걸 내가 헤레이스에게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엔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 * *
산책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헤레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
하필, 헤레이스와 바로 마주쳤다. 올리비아의 얘기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져서 기분 전환 겸 생각을 하려고 나온 건데. 하필 문제의 중심인 헤레이스랑 마주치다니.
“올리비아 영애는 돌아갔습니다.”
“그렇군요.”
헤레이스는 내게 그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이 물어봤으니 나 역시도 여기엔 무슨 일인지 물어보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헤레이스의 뒤를 힐끔 보는 것으로 넘어갔다. 그 뒤에는 보좌관들이 있었다. 아마 서고에 들렸다가 집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헤레이스는 어느새 나와 발걸음을 맞추고 나란히 걸었다. 후원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헤레이스가 걸음을 멈췄다.
“할 얘기가 많았었나 봅니다.”
올리비아는 오전에 방문에서 늦은 저녁에 돌아갔다. 거의 하루 종일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렇군요.”
왠지 헤레이스의 목소리가 점점 무겁게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살짝 고개를 돌리는데, 헤레이스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함께 차라도 마시고 싶지만…….”
헤레이스가 뒤에 있는 보좌관들을 힐끗, 보며 말했다.
“아쉽게도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헤레이스가 돌아서 가려고 할 때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극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헤레이스가 아쉬워하며 이만 가 봐야겠다고 할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머릿속에 올리비아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만약 올리비아의 말대로라면 확인해 보자. 이것으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다짜고짜 등을 보인 채 멀어지고 있는 헤레이스를 불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공작님.”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었다. 헤레이스가 돌아서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나는 눈을 사르르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헤레이스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헤레이스와 시선을 마주한 채 좀 더 방긋 웃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잠시 멈춘 채로 나를 보더니 돌아설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괜히 엉뚱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으려고 할 때였다. 헤레이스가 다시 보좌관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나를 돌아볼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괜히 창피한 짓만 했다. 나도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뭔가 이상하지 않았나…?’
나는 다시 몸을 돌려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헤레이스는 여전히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어설프다?
헤레이스는 몸이 불편한 것처럼 경직된 채 걷고 있었다. 보좌관이 부르는 소리에 살짝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의 옆모습이 보이는데,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헤레이스는 어느새 보좌관들과 함께 떠났다. 이곳에는 나 혼자 남았다. 나는 방금 전 보았던 헤레이스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분명…얼굴이…붉어졌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분명, 방금 저의 헤레이스의 얼굴이 옅었지만 달아올랐었다. 잠깐 사이에 얼굴이 붉어질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없었다.
그럼 혹시 내가 그를 부르며 미소를 지은 것 때문에 얼굴이 그렇게 된 건가?
지나친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것 외에는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이거 설마 진짜로 효과가 있는 건가?’
헤레이스가 나를 좋아하는 게 맞다면. 그걸 이용해서 반역을 막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올리비아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회귀하기 전의 내가 떠올랐다. 헤레이스를 좋아한다는 그 순진한 마음 하나만으로 뭐든지 잘하고 싶고, 하나라도 더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던 나. 그때의 나는 조건 없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방심했었던 것이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올리비아의 말이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만약 운이 좋아 정말 헤레이스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이용해 헤레이스가 앞으로 반역을 함께 도모할 사람들 혹은 증거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헤레이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잘해 줘서 그가 방심하게 되면, 앞으로 그가 반역을 위해 손을 잡을 사람, 준비 과정들을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반역 당시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사병의 존재 역시도.
만약 그가 나를 믿고 방심해 준다면 좋은 일이었다. 물론, 매우 낮고 극히 희박한 확률이지만. 가능성만으로도 해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하루가 지나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올리비아가 한 말이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일단 가능성을 열어 놓고 생각하자, 여러 가지 방안이 떠올랐다.
그 전에 확인이 먼저지. 결국, 모든 것은 헤레이스의 반역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어떤 확신도 없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데 에밀이 식탁 위에 올려놓은 초대장 중에 한 장이 눈에 띄었다. 결혼 후에 오기 시작한 초대장이었다.
‘때마침 괜찮은 미끼가 오긴 했는데.’
내 손위에는 있는 것은 후원하는 공연에 참석해 달라는 어느 후작 부인의 초대장이었다.
‘어떻게 할까.’
나는 초대장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보통 공연 후원을 매개로 사교 활동을 하는 경우는 귀부인들이었다. 영애들은 데이트를 하러 오는 경우는 있지만, 후원하는 예술가를 따로 두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귀부인이 할 수 있는 후원은 한정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특정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이 유행처럼 돌고 있었는데. 누가 더 뛰어난 예술가를 후원해 주고 있느냐가 자신의 안목과 품위를 과시하는 일이기도 했다. 덕분에 귀부인들의 예술가 후원 활동도 점점 경쟁이 과열되고 있었다.
‘그래서 귀부인들의 참석률도 높지.’
상대방이 후원하는 예술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기 위해. 혹시 그곳에서 유능한 예술가를 자신이 발굴할 수 있을 가능성 때문에라도 많은 영애와 귀부인들이 참석하곤 했다. 체면이 목숨과도 같은 사람들. 일종의 보여 주기 식 사교 활동이라 원래는 갈 생각이 없었지만, 그의 마음을 확인한다면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 좋을 것 같았다.
그가 나를 정말로 좋아하는지, 그래서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 그리고 만약 정말 그가 나를 좋아한다면 올리비아의 말대로 한번 해 볼까.
‘가 볼까.’
나는 참석하겠다는 답신을 썼다. 그리고 헤레이스를 찾아갔다.
“공작님.”
“부인. 어쩐 일입니까.”
헤레이스는 집무실에 있었다. 갑자기 찾아오자 놀랐는지 헤레이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내가 소파에 앉자, 책상 앞에 있던 헤레이스도 다가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제가 초대를 받아서 내일모레 저녁에 공연장에 가려고 합니다.”
“저녁에 시작하는 겁니까.”
“네. 공연이 끝나면 아마 밤이 될 듯싶습니다. 그러니…….”
헤레이스에게 공연장에 나를 데리러 오려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헤레이스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미간이 좁아지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부인, 그럼 제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네…?”
내가 하려던 말을 헤레이스가 먼저 가로챘다.
“끝날 시간에 맞춰 제가 공연장으로 가겠습니다. 많이 늦은 시간일 테니, 그게 좋을 듯합니다.”
“…….”
헤레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싫으십니까.”
딱히 싫을 이유는 없었다. 다만 내가 할 말을 헤레이스가 먼저 다 해서 조금 당황했을 뿐.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주세요. 기다릴게요.”
그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획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날 헤레이스를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올리비아의 말대로 만약 그가 정말 나를 좋아한다고 판단이 든다면.
‘올리비아의 말대로 해 볼까.’
나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떠올리며 헤레이스에게 공연장에 참석하는 날에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했다.
별로 올리비아의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확한 게 좋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