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도 바쁜 황녀님-44화 (44/124)

?제44화. 7장. 반역을 막는 방법 (7)

내가 참석한 공연은 공연장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홀에서 진행되는 오페라였다.

가수들끼리 서로의 기교를 자랑하더니 점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마지막에는 결국 실수까지 나오고야 말았다. 순간 공연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깨기 위해 박수가 서둘러 나왔다. 다급하게 공연을 마무리한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른 귀부인들의 표정 역시 미묘했다.

이번 공연을 후원했으며 우리를 초대한 후작 부인이 민망한 얼굴을 감춘 채 미소를 띠고 다가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민망함에 상기된 얼굴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귀부인 중 한 명이 후작 부인에게 말했다.

“공연 잘 봤습니다.”

평상시라면 평범한 인사에 불과하겠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왠지 뼈 있는 말로 들렸다. 후작 부인 역시 그렇게 느꼈는지 살짝 헛기침을 했다.

공연의 내용이야 어찌 됐든 공연이 끝났다. 어차피 공연 내용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내용 따위 상관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귀가 좀 아픈 공연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웃음 띤 얼굴로 가식적인 인사를 몇 번이나 나누었을까. 어느새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헤레이스는 공연이 끝날 쯤에 데리러 오기로 했다.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리고 나는 헤레이스에게 공연장 안에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굳이 공연장 밖에서 기다려 달라는 말은 이상한 요구였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그러겠다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헤레이스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미리 돌아간 귀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혹은,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이미 공작가로 돌아가 버렸거나.

‘지금도 있으려나.’

시선이 바깥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오늘 공연을 초대한 귀부인이 나를 비롯해 아직까지 남은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오늘 와 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그녀의 감사 인사는 인제 그만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그 실력 없는 예술가와 즐거운 시간이라도 보내려고 하는 것이겠지. 다른 사람들 역시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비웃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나를 따로 불렀다.

“공작 부인.”

다른 귀부인들과 살짝 떨어진 채로. 그리고 내게만 들리게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녀가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내게 이렇게 인사하는 것은 공연 중 쉬는 시간에 그녀에게 살짝 흘린 말 때문이었다.

‘이 공연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배우는 조셉이란 소년을 한번 만나보세요.’

그 소년은 앞으로 천재라는 소리를 지겹도록 듣게 될 예정이었다. 귀부인이 귀를 쫑긋 세우며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더 빛나는 재능을 가진 예술가를 발굴해 내는 것. 그것이 취미이자 자랑거리인 부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앞으로 과거에 뛰어났던 예술가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는 아직 가난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하지만 2~3년 안에 갑자기 나타나 귀족들의 찬사를 받게 될 예정이었다.

내가 소개해 준 예술가를 만나고 온 부인은 잔뜩 상기된 채로 돌아왔다. 분명 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의례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녀는 화가, 음악가 가리지 않고 후원을 했지만, 그중에 걸출한 자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그녀의 안목에 대해 뒷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분명 초조해하고 있었겠지.

그녀는 분명 남들보다 뛰어난 안목이나 순발력은 없었지만, 예술가들을 아끼고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종종 후원하는 예술가들과 연애를 하는 게 흠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소개해 준 예술가 역시 그녀의 후원 아래서 보다 편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한 번 겪어 본 시간은 이럴 때 편리했다. 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적절한 타이밍에 내 존재감을 알릴 수 있었다.

그사이에 완전히 헤어지는 분위기가 됐다. 나는 마지막쯤에 공연장을 나섰다. 부인들을 데리러 온 마차들이 거리에 줄을 세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연이 끝난 지 이미 1시간이 지나 있었다. 내가 헤레이스에게 와 달라고 한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기다리고 있었다면, 공연장을 나서는 사람들을 모두 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일부러 그를 불러 세워 놓는다는 것을 눈치챘겠지.

그러고도 과연 기다릴까.

“부인.”

하지만 헤레이스는 아직까지 잘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귀족들의 흥미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태연하게.

헤레이스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불쾌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전혀 미안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일부러 기다리게 해 놓고 전혀 몰랐다는 듯이.

“이런, 기다리셨나요.”

헤레이스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럴 리 없었다. 헤레이스에게 와 달라고 한 시간에서 1시간이 넘게 지나 있었다. 하지만 헤레이스의 모습만 보면 그런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공연은 즐거웠습니까.”

“나쁘지 않았어요.”

헤레이스는 내 손을 잡은 채 마차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어 있는 게 느껴졌다.

마차 앞에 도착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죠.”

마차에 타기 전 뒤를 돌아보는데, 나와 헤레이스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귀부인들이 보였다. 분명 나보다 먼저 나갔을 텐데, 아직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귀부인들에게 가기 전에 인사를 하려고 할 때였다.

헤레이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부인.”

내가 고개를 살짝 들자 시야를 가리는 어두운 것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헤레이스도, 방금 전 정체불명의 무엇도 아닌, 귀부인들의 표정이었다. 경악, 놀람, 충격, 그리고 부러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와 헤레이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날씨가 많이 쌀쌀합니다.”

헤레이스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리고는 내 옆으로 와서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았다. 쌀쌀한 바람으로부터 지켜 주려는 것처럼.

헤레이스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도 귀부인들과 마찬가지로 당황한 채로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여전히 다정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나는 그대로 헤레이스에게 호응하듯 눈을 살짝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모습을 귀부인들에게 보여 주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니까. 헤레이스가 외투 위로 한쪽 팔을 감으며 나를 마차 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고개만 살짝 돌려 귀부인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우리는 곧장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나는 그에게 마중 나와서 기다리라고 하면서도 약속보다 1시간이 지나서 나타났다. 그런데 그는 전혀 불쾌한 모습 없이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공작가로 향하는 내내 헤레이스의 입가는 계속 올라가 있었다.

헤레이스가 뜬금없이 물었다.

“저 잘했습니까?”

“네…?”

헤레이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부인께서 원한 대로 됐는지 궁금해서요.”

이곳에 마중 나오는 것도 분명 헤레이스가 먼저 한 말이었다. 그는 이미 그 전에 내가 그 말을 할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어떤 의도로 이런 요구를 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 그저 내가 만족했는지만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 모르겠어.’

지금까지 강하게 부정해오던 것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헤레이스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로 헤레이스에게 잘해 주는 것을 이용할 수 있을까. 그의 반역도 막고 증거도 찾고. 아니면 반역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까. 헤레이스와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그에게 잘해 주며 다가가는 것이 반역을 막는 진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게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여전히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도 들었다.

헤레이스에게 잘해 주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한다. 그것은 마치 헤레이스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 놓는 것과도 같았다.

과거에 날 이용해서 공작가를 다시 세우고 반역을 일으켰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 반대로 내가 헤레이스의 반역을 막는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분명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올리비아가 내게 제안한 방법을 다른 말로 정리하면 결국 이런 뜻이었다.

헤레이스를 유혹해서 나에게 흠뻑 빠지게 만들어 내가 원하는 대로 휘두른다. 그게 그가 앞으로 하게 될 반역을 막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 * *

그날 이후 나는 헤레이스에게 잘해 주기로 결심했다. 어디 한번 해 보자,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어떻게?’

결심을 하자마자 난관에 봉착했다. 헤레이스에게 잘해 줘서 그를 내 손안에 쥐는 건 어디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생각해 보니 과거에 내가 헤레이스에게 잘해 줬던 것들은 물량공세였다. 그의 가문을 도와주고 헤레이스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했던 지원은 헤레이스가 반역을 일으킬 수 있는 토대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그 방법은 쓸 수 없었다.

별거 아닌 듯하면서도 신경 쓰이는 그런 게 좋을 텐데.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음…생각 안 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