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도 바쁜 황녀님-46화 (46/124)

?제46화. 7장. 반역을 막는 방법 (9)

그 이후로, 나와 헤레이스는 최근 매일 얼굴을 보고 뭔가를 함께했다.

나는 일단 그의 행동에 대부분 맞춰 주었다. 그가 하는 것이라곤 내게 선물을 가져오거나 함께 있으려 눈에 보이는 핑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헤레이스는 내게 뭔가를 가져올 때마다 내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면 당장 꼬리라도 흔들 것처럼 좋아했다. 그럼 나는 선물은 보지도 않고 좋다고 했다.

그가 말도 안 되는 온갖 핑계로 찾아와 함께 산책을 하고 외출을 하려고 할 때는 티가 나는 거짓말을 모른 척 그를 반겨 주었다.

일단 그에게 잘해 주기로 결심한 이상, 나는 그에게 어느 정도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가 점점 나에게 빠져서 경계심이 허물어지도록.

덩달아 나와 헤레이스의 소문 역시 견고해졌다.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소문이 나자, 아직까지 남아 있던 그의 내연녀에 관한 소문들 역시 사라졌다. 나를 찾아와 도발하는 영애가 없어진 것도 그 사실을 증명했다.

* * *

오랜만에 마담 세실의 의상실에 방문했다. 드레스를 새로 맞추기 위해서였다.

최근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는 순조로웠다. 내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 전부였는데도 불구하고 헤레이스는 그때부터 내게 최선을 다하려는 것이 보였다. 헤레이스는 내가 외출할 때마다 따라 나와서 에스코트를 해 주었다. 오늘도 역시 나를 의상실까지 에스코트한 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구경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물론, 마담 세실 역시도 헤레이스가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들어오라고 그녀가 권유했지만, 헤레이스가 거절했다.

나는 의상실에서 여유롭게 드레스를 골랐다. 드레스의 디자인과 치수 등 확인을 마치고 마담 세실이 말했다.

“완성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사람을 따로 부르도록 하지.”

이제 그만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인사하기 위해 문 앞까지 따라온 마담 세실이 나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기 좋으십니다.”

마담 세실의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띤 채 흐뭇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보기 좋다는 거지? 내가 의아해하자 마담 세실이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말했다.

“얼굴이 편안해 보이세요.”

나는 순간 마담 세실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저 그림에 그릴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눈인사 정도만 해도 충분할 텐데. 어째서인지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내가 충격 받은 듯 굳어 있자 마담 세실이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마님…?”

혹시 자신이 말실수를 했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만 가 보겠네.”

“아…네. 오늘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도망치듯이 의상실을 벗어났다. 뒤에서 마담 세실이 내게 인사를 했지만, 뭐라고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허둥지둥 의상실을 나오는데, 하필 그 앞에 나를 기다리는 사림이 보였다. 지금은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헤레이스가 내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부인의 안색이 안 좋습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대충 상황을 넘어가고 싶었다. 얼른 저택으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방 안에 들어가 혼자 있고 싶었다.

보기 좋다니, 편안해 보인다니. 이 모든 건 헤레이스를 이용해 반역을 막으려고 하는 짓인데. 설마 나도 모르게 안심하고 있었던 건가.

모든 것이 불안해졌다.

내가 그에게 잘해 줄수록 헤레이스는 기뻐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를 따라 웃고 있었다. 억지로 지어 낸 미소가 아니라.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불에 댄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헤레이스가 방심하게 하기 위해 좋아하는 척하는 거지, 정말로 좋아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단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하지만, 머뭇거림을 모르고 다가오는 헤레이스를 상대로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웠다.

* * *

자꾸만 그에게 말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헤레이스와 마주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헤레이스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방에서 나가지도 않았다. 손님이 찾아오거나 하면 오늘은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 다음에 찾아달라고 말하라고 미리 전해 놓았다.

방에서 쉬고 있는데 에밀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올리비아 님께서…….”

올리비아가 왔다는 건가. 그녀를 돌려보내기는 미안한데. 하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는데 에밀이 말했다.

“이것을 보내오셨습니다.”

“올리비아가…?”

올리비아에게 편지가 왔다. 에밀에게 받은 편지를 열어 보았다.

[에일린, 혹시나 해서 해 두는 말이지만.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해. 너무 깊게 빠진 상황에서 느끼는 배신감은 때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거든. 그럼 골치 아파져.]

짧은 충고였다. 아마 지난번에 나누었던 대화가 신경 쓰여 보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올리비아는 단순한 마음에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치명적이었다. 올리비아는 혹시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가 위장된 것이란 걸 알고 있는 것일까. 의심이 들 만큼 적절한 타이밍에 온 편지였다.

올리비아의 말이 맞았다. 나는 과거에도 적당한 거리감을 몰랐다. 무조건 다 주고 싶었을 뿐이다. 돌려받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저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니까.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마지막은 철저한 배신이었다. 그때 느낀 뿌리 깊은 절망과 분노는 아직까지도 내 몸속에 깊게 박혀 있었다.

차라리 헤레이스에 대한 마음과는 별도로 그의 이상한 행동을 의심하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했다면. 그럼 그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테고 갑자기 찾아온 일에 그토록 괴로워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자.’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한발 다가가면 헤레이스는 다섯 걸음을 다가왔다. 그것을 대놓고 밀어내지 않으면서 거리를 유지하는 것. 결국, 나는 헤레이스의 행동에 자꾸만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나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헤레이스에게 말려서 휩쓸리는 경우가 많았다. 헤레이스는 사람을 흐물흐물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안 돼, 거기에 홀리면 안 돼. 몇 번이고 나를 다잡았다.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을까.’

내 거짓된 행동에 기뻐하는 헤레이스를 보면서 과거에 그의 관심을 바라던 내가 떠올랐다. 처음엔 그 모습이 떠올라 그를 속인다는 생각에 왠지 통쾌하기도 했다. 하지만 통쾌한 것은 잠깐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불안한 마음까지 생겼다.

아닌 척,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심장 언저리가 쿡쿡 찔렸다. 이게 양심이란 거겠지.

그를 회유하는 것. 어쩐지 이 방법이 더 어려운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설픈 것 같았다. 아무리 마음을 강하게 먹어도 헤레이스 앞에서 흔들리는 내가 있었다. 그러고 돌아서서 후회하고.

역시 이런 상황에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올리비아.

“에밀, 올리비아 보고 공작가를 방문해 달라고 연락해 줘.”

“네.”

에밀이 올리비아에게 연락하기 위해 나갔다. 그리고 혼자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헤레이스가 들어왔다.

“부인. 몸이 안 좋다고 해서 가져왔습니다.”

“…잘 먹을게요.”

헤레이스가 약을 가져왔다. 헤레이스를 만나지 않으려고 핑계를 댄 거였는데, 그 이유 때문에 헤레이스가 찾아왔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다정하게 말했다.

“아프지 마세요.”

최근 헤레이스는 언제나 나를 빤히 바라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지금도 역시나 걱정하는 얼굴을 하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모습을 보니 다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는 억지로 헤레이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얼굴 근육이 굳어서 어색해 보일 것 같았다.

* * *

헤레이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것에 올인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에밀에게 계속해서 여러 가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었다.

나는 회귀 전, 반역에 주축으로 움직인 가문들에 대해 꾸준히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다른 점이 보이는 순간, 그들이 반역을 도모하는 증거 역시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에밀이 내가 지시한 것들을 정리해서 보고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달라진 부분이 있어?”

이제까지는 별달리 이상한 점이 없었다.

“프랫 자작가는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레이스 영애 쪽은?”

“…있습니다.”

에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은밀하고 보완이 필요한 내용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시선으로 그녀에게 다음을 재촉했다.

“최근 크레톤 왕국의 상단과 거래가 늘었습니다. 그곳은…….”

“무기가 유명한 곳이지.”

“네.”

크레톤 왕국은 무기와 용병이 유명한 나라였다. 물론, 크레톤 왕국의 상단은 큰 규모의 상단이기에 무기 거래만을 취급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다른 것을 거래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거래가 늘어날 만큼 특별한 것은 역시 무기였다.

무기가 대량으로 들어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법이었다. 만약 백작가가 크레톤 왕국의 상단을 통해 정말로 무기를 들여오는 거라면, 거래 현장을 잡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