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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49화 (49/124)

?제49화. 7장. 반역을 막는 방법 (12)

처음, 황궁에 간 에일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녀가 제시하는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을 때,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일린이 시킨 일이었지만 내심 즐거웠다. 처음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사람들 앞에서 과시해 보기도 했다. 이 조건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단순한 심술은 아니었나 보다.

‘깊은 배신감이라…….’

헤레이스는 배신감은 들지 않았다. 다만 상처 입었을 뿐이었다.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져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헤레이스는 다짜고짜 에일린의 방으로 향했다.

에일린과 올리비아의 대화를 아는 척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척 지나갈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는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그것만큼은 원하지 않았다.

아직 누군가를 이기거나 지키기에 헤레이스가 가지고 있는 힘은 너무 약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에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괜찮다는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다. 헤레이스는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에일린을 보러 향했다.

빼도 박도 못 하게 만들 구실이 필요했다.

* * *

올리비아가 돌아가고 어느새 밤이 됐다. 에밀은 잠자리를 정리해 주고 방을 나갔다.

인제 그만 침대 위에 누우려고 하는데, 에밀이 갑자기 다시 들어왔다. 어쩐지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야?”

“…헤레이스 공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에밀의 뒤로 헤레이스가 들어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나는 태연함을 가장한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내 물음에 헤레이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심각해 보였다.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을 때였다. 헤레이스가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왜 온 거지? 헤레이스는 뻔뻔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문 앞에 서 있던 그가 점점 내게 다가왔다. 나는 침대에 누우려다가 일어나서 그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다가와서 뭘 하려는 거지?’

나는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졌다. 어느새 내 앞까지 온 헤레이스가 씨익 웃으며 내 옆에 섰다.

왜 옆으로 오는 거지? 나는 이게 무슨 의도인지 묻는 시선으로 헤레이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헤레이스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듯 자연스럽게.

“오늘부터 함께 자려고요.”

“네…?”

나는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이 너무도 진지한 만큼 진심으로 느껴져서 더욱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지?

“앞으로 매일 밤 올 겁니다.”

“왜요?”

헤레이스는 심지어 한술 더 떴다. 그래서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헤레이스가 왜 매일 밤 내 방에 와서 같이 잔다는 거지? 그것도 이제까지 이런 말이나 행동을 한 적 없다가 갑자기.

헤레이스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마치 회심의 미소처럼.

“제가 계속 생각해 봤는데 말입니다.”

그 모습이 나는 어쩐지 불안했다.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내가 썩 반길만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아무리 남들 앞에서 부인에게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해도, 부부가 함께 자지 않으면 사람들이 저희 관계를 믿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은 맞지만, 그래도 과거에도 공유하지 않았던 침대를 함께 사용하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더 말을 하려고 할 때, 헤레이스가 내 침대 한쪽에 자리를 차지했다.

“부인도 이리 오세요.”

헤레이스는 능청맞은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서 눕지 않고 뭐하냐는 눈빛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뭐라고 해야 할지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로 여기서 잘 건가요?”

“네. 여기서 부인과 함께 잘 생각입니다.”

헤레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그럴수록 말문이 막히는 것은 나였다.

헤레이스는 어느새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절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희는 부부가 아닙니까.”

부부는 맞긴 하지만, 최소한 남들과 같은 부부 사이라고 할 수도 없는 관계 아니었던가.

게다가 헤레이스는 모르겠지만, 그가 지금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에게 충실한 척, 진심인 척 연기하면서. 그 사실을 모두 알고 난 후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대체 왜 이러세요?”

헤레이스는 마치 우리가 서로 호감을 가져서 결혼한 부부인 것처럼 행동했다. 헤레이스가 이상하게 달라졌다는 걸 떠나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부인의 조건에 최선을 다해서 협력하는 겁니다.”

헤레이스는 여전히 이전에 내가 얘기했던 것을 핑계로 삼았다.

“제가 말한 건 그런 척해 달라는 거지, 그렇게 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어차피 척할 거면 좀 더 그럴싸한 게 좋지 않나요?”

헤레이스가 뻔한 말로 자신의 행동을 포장했다.

과거의 나였다면 그의 행동이 진심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연기라고 해도 황홀해하며 그의 진짜 목적 따위에는 눈을 감았을 것이다. 오로지 이 순간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서만 노력했겠지.

“연기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요. 그러기엔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습니까.”

헤레이스는 말도 행동도 거침없었다. 헤레이스가 내게 손을 뻗었다.

“아무리 좋은 관계인 척해도 잠자리도 갖지 않는 부부를 누가 진짜라고 믿겠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방금 헤레이스의 말은 허를 찔렀다. 나 역시도 마음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경 쓰여도 이것만큼은 거부 반응이 나왔다.

헤레이스는 내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아무 짓도 하지 않겠습니다.”

왜 침대에 오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보고 있는데, 차마 그 옆에는 갈 수 없었다. 나는 옆으로 물러나며 말했다. 헤레이스에게 이대로 나가달라는 것을 명확하게 표시하면서.

“저는 이런 것까지 요구한 적 없으니까 이만 돌아가세요.”

하지만 헤레이스는 움직일 생각이 추호도 없어보였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헤레이스를 향해 외쳤다.

“제가 요구하는 것을 충실히 해 달라고 했지, 이렇게 선을 넘으라고 한 적은 없어요!”

헤레이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부인, 우리는 부부이고 부부가 함께 자는 일은 당연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문제입니다.”

헤레이스의 목소리가 너무 단호하면서도 진지해서, 순간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헤레이스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부인이 시킨 대로 결혼생활에 충실히 할 겁니다. 부인이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

“물론, 부인이 보기에 만족스러울 만큼 가문도 일으켜야겠죠. 결혼도 일도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헤레이스는 내게 맹세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제게 잘 보여서 뭔가 얻어 내려는 거면 포기하세요.”

헤레이스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제 힘으로 할 겁니다.”

나는 그런 헤레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헤레이스가 나와 이혼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내게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물질적인 조건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여전히 많았다.

‘아니, 이제 그것도 아닌가.’

생각해 보면 지금의 헤레이스는 분명 그 말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공작가에 대부분이 내가 도와준 것들이었다. 별 노력 없이 가만히 있어도 공작가는 나날이 번성했다. 하지만 정작 내 도움이 없는 공작가는 더디기는 하지만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오로지 헤레이스의 실력만으로.

헤레이스가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에일린, 저는 그대의 남편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인의 마음이 제게 가까워질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겁니다.”

헤레이스는 분명 내게 고백하고 있었다. 과거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저 표정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었나. 나는 간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헤레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헤레이스는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모두 끌어모아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그대를 힘들게 한 것은 앞으로 갚아 나가겠습니다. 이젠 그때와 다릅니다.”

그가 말한 그때는 결혼 전을 얘기하는 거겠지.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결혼 전의 기억이 전부가 아니었다.

고백한다. 아니, 자백한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5년 전인 지금 이 순간으로 회귀하고 난 뒤 헤레이스에게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루이스와 나를 죽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 다짐한다. 더는 단 한순간, 일말의 감정마저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는 없어.’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나는 기억뿐만이 아니라 이 심장에 박혀 있어서,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심지어 이런 목소리로 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고백을 하면서도 그는 루이스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반역을 준비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를 용서할 수는 없다.

나는 중얼거렸다.

“그런가요. 무엇이든 하겠다고요….”

헤레이스의 말을 한마디씩 되짚어 보았다. 그는 내 남편으로서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고, 그걸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다.

‘무엇이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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