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7장. 반역을 막는 방법 (13)
나는 헤레이스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의 각오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
“하지만 제가 보기엔 아무것도 바뀐 게 없군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가 바뀌었다고 해도. 내 앞에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말을 내가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기 원한다면, 무엇이든 증명해 보이라고.
“저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나요.”
내 물음에 헤레이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과연 그것을 행동으로도 옮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비뚜름하게 웃음을 지었다. 어디까지 그리고 얼마나 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이라는 기준은 과거의 헤레이스가 나에게 했던 일들이 기준이 될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헤레이스는 그저 단순하게 진심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거겠지.
“그럼…어디 한번 해 보세요.”
당신이 과거와는 다른 이유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든, 아니면 과거처럼 나를 믿게 하고 배신하기 위해서든. 당신이 정말로 어떤 계기로 과거와는 다르게 변했다고 해도. 그대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모두 진심이라고 해도.
이제 헤레이스 당신의 진심 따위는 필요 없어.
“기회를 주는 건가요.”
내 대답에 헤레이스의 눈빛에 희망이 감돌았다. 그 눈빛이 과거의 내 모습과 순간 겹쳐 보였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헤레이스를 보며 나는 잠시 대답할 것을 골랐다.
약점이 잡힌 사람이 얼마나 쉽게 휘둘리는지 나는 경험했다. 약점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과 나 사이의 관계에서 더 낮은 위치를 자청하는 쪽이다.
내가 바친 맹목적인 사랑을 이용해 공작가는 다시 일어났고, 내가 황녀라는 지위로 공작가를 위해 한 일들이 반역을 도모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 결과, 나와 루이스는 죽었다.
이 모든 끔찍한 결말의 시작은 내가 헤레이스에게 낮은 위치에서 퍼부은 헌신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 나를 돌아봐 줄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은 헌신이 헌신짝이 되어 내게 절망이 되는 순간, 그 감정을 헤레이스도 알게 될까. 알게 해 주고 싶다.
“글쎄요. 기회가 될지 시험이 될지는.”
기회라는 희망보다는 시험이라는 절망이 될 거다.
헤레이스에게 빠져 눈앞을 가리고 있던 장막들이 걷어 나니까 세상이 또렷해졌다. 잊고 있던 내 모습 역시도.
세상에 복수는 내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아냐. 진짜 복수는 내가 당한 만큼 갚아 주는 거지. 내가 휘둘린 만큼 헤레이스도 나 때문에 철저하게 휘둘렸으면 좋겠다. 그러다 예기치 못한 배신을 당했던 것처럼 헤레이스가 배신감에 처절하게 아파했으면 좋겠다.
나를 좋아하게 된다면 가장 좋고, 좋아하지 않더라도 내게 원하는 게 있는 이상 잘 보이려고 애쓸 테니까.
“공작님이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헤레이스가 애를 쓰면 쓸수록 내가 그에게 희망을 주는 척 하나씩 뺏어 갈 것이다. 그가 앞으로 일으킬 반역을 미리 알아내 막는 순간,
“저희의 앞으로의 관계도.”
우리의 관계는 끝이 날 것이다.
“그러니.”
침대 등받이에 기대 있는 헤레이스에게 다가가 그가 무릎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 냈다. 그리고 헤레이스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이만 나가 주세요.”
이 안에 당신이 쉴 수 있는 공간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이불을 한쪽으로 치운 채 그를 향해 문 쪽을 가리켰다.
‘나가!’
내 따가운 시선을 받은 헤레이스가 나를 불렀다.
“부인?”
방금 전까지 앞으로의 관계에 대해 말하던 내가 갑자기 쫓아내자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몰아붙일 뿐.
“시녀들을 부를까요?”
헤레이스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내가 당장이라도 시녀들을 부를 기세로 문 쪽으로 향하기 시작할 때였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헤레이스는 순순히 문 앞으로 향했다. 그가 나가는 모습을 봐야 안심하고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헤레이스는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내게 다시 다가왔다.
그가 내 어깨를 살짝 잡으며 시선을 내게 고정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헤레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인을 불편하게 만들려고 찾아온 게 아닙니다.”
헤레이스는 왠지 억울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의 방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했다.
“그럼 왜 오셨나요.”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연기하는 척해서라도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가짜가 진짜가 되기도 하니까.”
헤레이스는 혹시라도 내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할까 봐 말 한마디마다 꼭꼭 씹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말했다. 내가 도저히 흘려 넘길 수 없도록.
“…저는 부인과 그렇게 진짜가 되고 싶었습니다.”
헤레이스는 차분하지만 뜨거웠다. 뜨거운 것이 그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절대 흥분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헤레이스는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 옷 위로 닿는 체온이 뜨거웠지만, 잡고 있는 힘은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약했다.
헤레이스는 그러고도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입을 열었다. 한숨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저…부인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린 채 살짝만 들어서 내 표정을 확인했다. 하지만 내 얼굴에 어떤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는지 내 얼굴을 더욱 빤히 보며 확인하려 하는 것이 보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헤레이스는 방을 나섰다. 점점 작아지던 소리가 어느새 들리지 않았다.
“에밀.”
“네.”
에밀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내 시선이 침대로 향해 있었다. 방금 전 헤레이스가 있었던 침대는 이불이 한쪽으로 구겨져 있었다.
“이불 좀 바꿔 줘.”
방 안에는 헤레이스와 나. 단둘이었지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녀들에게까지 우리의 목소리가 전부 다 들렸을 것이다. 무슨 대화를 나눴고 왜 실랑이를 벌였는지 아는 에밀이 군말 없이 이미 좀 전에 한번 교체했던 이불들을 전부 꺼내서 새것으로 교체했다.
하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갑자기 헤레이스가 찾아왔던 것이 계속 신경 쓰였다. 그가 나를 완전히 믿을 때까지는 최대한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었는데…그건 이제 힘들어졌다.
마치 내 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헤레이스가 침대에 누웠을 때, 나는 동요하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결국 거부했으니까.
지금까지 그의 마음에 믿음을 주기 위해 했던 모든 일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헤레이스가 무엇이든 하겠다고 한 것일까. 순간 헤레이스가 마지막에 한 말이 떠올랐다.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라…….’
헤레이스와 함께 있어도 그의 행동 어떤 것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웃는 얼굴로 다정한 목소리로 꾸민 채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해야 했다. 그 시간이 결코 편할 리가 없었다.
분명 한때는 헤레이스와 함께 있는 것을 그 무엇보다 원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던 적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외전 1. 첫 만남 (에일린) (1)
‘황녀 에일린, 헤레이스 공작에게 한눈에 반해 열렬하게 구애하다.’
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히 내가 어떤 상황에서 헤레이스를 만나 어떤 모습에 반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나의 오라버니 루이스와 오랜 친구 올리비아와 내 곁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는 유모 에밀까지도.
* * *
나에게 청혼하는 남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내가 사교계에서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은 루이스가 8할 이상의 역할을 차지했다.
“뭐? 누가 청혼서를 보냈다고?”
나에게 오는 청혼서는 하나같이 루이스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문제는 그 검열에 통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루이스가 청혼서를 퇴짜 놓는 이유는 그야말로 가지각색이었다.
“제국 밖은 안 돼.”
그 한마디로 내 남편 후보감은 절반 이상 떨어져 나갔다.
“비리비리하게 생긴 게 명이 짧아 보여.”
대체 어디가! 루이스보다 작은 거지, 절대 비리비리하다는 표현에 어울리지 않았다. 허우대만 멀쩡하구먼.
“지금 장난해? 못생겼잖아.”
아뇨, 이만하면 준수한데요. 괜찮은데요. 멀쩡하게 생겼는데요!
“그냥 마음에 안 들어.”
결국엔 이럴 거면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질이 나쁘다는,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
루이스의 만행에 가까운 행패에 좌절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에밀이 물었다.
“결혼이 하고 싶으세요?”
그야…결혼이 하고 싶어 미치겠고 그런 건 아닌데. 문제는 계속 이대로라면 나는 분명…….
“노처녀로 늙어 죽고 말 거야!”
나는 최근 진지하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외모도 신분도 어디 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내가 설마 하던 노처녀가 될 지경이라니! 이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루이스가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내가 혼기를 놓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 더는 이대로 둘 수 없었다. 내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 중대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대체 어떻게 해야 저 말도 안 되는 퇴짜를 그만둘 거냐고.”
내가 루이스의 방어 경계선을 뚫고 제대로 된 남편감 후보를 만나 보기라도 하기 위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자, 에밀이 방법을 하나 알려 주었다.
“아기씨. 제가 방법을 하나 알려 드릴까요?”
“방법? 있어??”
내가 열렬한 구원의 눈빛을 발사하자, 에밀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고로, 지나치게 쏠려 있는 관심은 분산시키는 방법이 최고입니다.”
“그걸 누가 몰라…….”
근데 도저히 다른데 딱히 관심이 없는 게 문제지.
그럼 그렇지, 내가 실망을 하면서 다시 고민에 빠지려고 할 때였다. 에밀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고로 사랑 앞에서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