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외전 1. 첫 만남 (에일린) (2)
“뭐……?”
전략과 전술 앞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냉혹한 에밀에게서 나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내가 들은 게 맞나. 귀를 의심하며 에밀을 봤지만, 그녀는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맞구나. 내가 제대로 들은 게.
에밀에게도 이런 말랑한 면이 있었나 신기했다가도 사실 내 앞에서는 ‘말랑’을 넘어서 주책맞은 유모니까. 유모가 내게 쏟는 사랑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후 마마가 생기면, 아기씨의 결혼도 한결 수월해질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좋아. 결정했어!”
시녀들이 문밖에 있어서 다행이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면 분명 비웃음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에밀과 나는 굉장히 진지했다.
루이스가 나에게 보이는 이상한 간섭을 떼어내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루이스를 결혼시키는 거다! 원래 결혼하면 그때부터 각자 사는 거라 그랬다.
가장 먼저 루이스 신붓감, 즉 황후에 어울리는 영애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이번에 열리는 연회가 제격이었다. 황궁 안에서 열리는 연회였지만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의례적으로 행하는 친목을 다지는 차원의 연회였다.
루이스는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연회가 아니면 얼굴도 잘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황후 후보감을 물색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 * *
고대하던 연회 당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괜찮은 영식들을 만날 목적으로 아름답게 치장한 영애들이 곳곳에 보였다.
이 중에서 찬찬히 고르면 되겠다. 편한 생각을 했을 때였다. 정작…신붓감을 찾으려고 열심히 둘러보니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엉뚱한 인물이었다.
헤레이스 공작. 루이스의 신붓감을 찾아야 하는데 헤레이스는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후보가 있어야 그중에서 루이스가 좋아할 만한 영애를 선별해서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게 할 텐데. 루이스와 황후 후보의 첫 만남부터 사랑에 빠지는 순간까지 에밀과 모든 순간을 계획했지만 정작 계획을 실행할 대상이 없었다.
결국, 삽질만 하고 연회 내내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채 지나치게 돌아다녀 다리까지 퉁퉁 부었다. 이번 연회는 허탕이다. 에밀과 눈빛을 주고받은 후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폐하의 짝을 찾고 계신 겁니까.”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어느새 헤레이스가 내 뒤에 서 있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헤레이스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 봐도 떠보는 듯한 그의 말에 그대로 넘어가 줄 수는 없었다.
“연회 내내 얼굴이 너무 따가워서요. 대체 왜 저를 그렇게 노려보는지 궁금했습니다.”
영애들을 관찰하는 곳엔 언제나 헤레이스 공작이 옆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연회 내내 가장 많이 보게 된 존재 또한 그였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지켜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연회 내내 신경이 쓰였다는 것을 어필하듯이 한쪽 뺨을 손으로 매만졌다. 내가 계속 노려본 시선 때문에 얼얼하다는 듯이.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이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적당히 형식적인 사과를 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내 생각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저를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지기에 살펴보니, 황녀 전하께서 영애들을 살피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저도 좀 관찰했습니다.”
헤레이스가 능청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관찰했다는 사람은 분명 나였다. 하지만 나 역시 영애들을 살피며 그를 계속 봤으니 무례하다며 따질 수도 없었다.
헤레이스가 나에게서 다른 영애들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이렇게 지켜만 봐서는 황녀 전하께서 원하시는 괜찮은 영애를 선별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지금 내가 사람 볼 줄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욱한 내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자, 헤레이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게 아니라 이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도움이라뇨?”
“황녀 전하께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지금 하나였다. 황후 자리에 어울리는 후보. 내가 그를 바라보자 헤레이스는 씨익,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헤레이스. 그는 황가와 결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가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주는 정보가 과연 도움이 될까.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닐까. 온갖 의심이 들었다.
괜찮은 황후 후보를 찾는 데 도움이 되진 못해도, 걸러야 하는 황후 후보는 알 수 있겠지. 그가 알려 주는 정보를 걸러 듣고, 그의 주위에 있는 영애들을 확인하면 절대 황후가 되어서는 안 되는 영애들을 배제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결국, 나는 미심쩍은 헤레이스의 손을 잡았다.
결과적으로는 헤레이스는 사교계의 영애들에 대한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에밀이 알아내지 못하는 정보까지도 알고 있었다.
따로 정보를 얻는 것인가 의심했지만, 그와 몇 번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타고난 눈치와 센스가 독보적인 사람이었다. 상대방의 한마디로도 그의 의중을 파악해냈다.
그는 내가 원하는 조건을 듣고는 곧 영애 몇을 특정해 냈다. 그리고 그녀들이 많이 다니는 곳을 함께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는 생각보다 객관적인 사람이었고, 내가 의심했던 수상한 행동 없이 정말로 황후에 어울릴 만한 영애들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아무라 의심해 봐도 그의 정보에 속임수는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하고 보니 헤레이스가 소개한 영애 중에서도 괜찮은 영애들이 눈에 띄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 중에 누가 좋을지 결정하는 것은 이제 에밀과 할 일이었다.
그때였다. 헤레이스가 뜬금없이 물었다.
“그런데 올리비아 영애는 왜 포함시키지 않은 겁니까.”
헤레이스의 말에 가장 당황한 것은 나였다. 갑자기 올리비아가 왜 튀어나오지?
나는 헤레이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아는 올리비아를 말하는 건가요.”
“뉴튼 백작가의 영애 말입니다.”
올리비아 뉴튼. 뉴튼 백작가의 영애이자 사교계의 중심. 그리고 나와 오래된 관계를 유지해 온 절친한 친구. 헤레이스가 말한 올리비아는 분명 그녀가 맞았다.
루이스와 올리비아라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피식, 웃음이 터졌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네요.”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엔 가장 적합한 것 같은데.”
“…진심입니까.”
“네. 당연하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도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올리비아가 황후로서 잘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루이스와 올리비아의 조합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된다니.
나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금까지의 영애들로도 충분합니다.”
“황녀께서 그러시다면야.”
헤레이스는 더 이상 올리비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루이스의 배우자이자 제국의 황후. 만약 이번에 헤레이스의 도움을 받아 선별한 영애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에 어울릴 만한 영애들은 찾으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굳이 거기에 가까운 관계인 올리비아를 끼어들어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헤레이스 공작에게서 볼일은 끝났다. 그러니 지금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가 어떤 목적으로 협조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분명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니까.
“그동안 고마웠어요.”
“별말씀을.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헤레이스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어쩐지 그럴 때마다 불편했다. 그래서 일부러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가 하는 모든 것을 거래로 상대했다.
“혹시 보상을 원한다면 따로 서신을 보내세요. 제 선에서 해 드릴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와 드리겠습니다.”
최대한 적당한 선에서 끊어 내는 게 좋을 거라는 판단에 먼저 며칠간의 도움에 대한 대가를 얘기했다.
헤레이스는 내 말에 그렇게 하겠다는 말도. 괜찮다는 말도 딱히 하지 않은 채 미소만 지었다.
“냉정하시네요.”
헤레이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표정은 떫어 보였다.
“뭐, 덕분에 저도 즐거웠으니 괜찮습니다.”
얼핏 보였던 씁쓸한 표정은 착각이었는지, 그는 어느새 능청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함께 다니는 동안 항상 저런 모습이었다. 언제나 웃고, 능청스럽고, 유희를 즐기는 듯한. 그래서 내가 불편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만 돌아가죠. 시간이 늦었습니다.”
“…네. 제가 황궁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 외출은 에밀도 호위기사도 없이 혼자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늦은 밤이었다. ‘시간을 지체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를 해도 이미 늦었다.
나는 헤레이스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였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암흑 속이었다. 주위에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
그제야 의식을 잃기 전에 느꼈던 둔탁한 감각이 떠올랐다. 나는 납치를 당한 것이다. 그것도 밤길에 기습으로.
문제가 일어난 것은 황궁에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에밀에게만 언질하고 몰래 빠져나온 거라 지키는 호위도, 준비시켜 놓은 마차도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 날 갔던 곳은 황성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 지역이었다.
헤레이스와 걷고 있을 때였다. 탁-! 그대로 뒷목을 누군가가 내리쳤다. 둔탁한 감각이 느껴졌고…그 이후로 기억이 끊어졌다.
‘나가야 돼…!’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닫자마자 오로지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바닥을 짚어 가며 기다시피 벽으로 향했다. 벽을 따라서 두드린 끝에 문을 찾았지만, 역시나 잠겨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나갈 수 있을까. 오히려 위험에 빠질 확률이 더 높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빛이 차단된 공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어둠이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그건 내가 견디지 못하는 공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