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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53화 (53/124)

?제53화. 외전 1. 첫 만남 (에일린) (4)

나는 평소에 잠을 잘 때는 꼭 침대 맡에 불을 켜 놓아야만 안심하고 잠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불을 켜놓은 채의 수면은 선잠에 불과했다. 깊은 숙면을 취하지 못해 자고 일어나도 언제나 피곤했다.

그런 나를 걱정한 시녀들이 예전에 내가 잠이 든 후에 모든 불을 끈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중간에 깨어났었다. 그리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질겁한 내가 소리를 지르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 일로 황녀궁의 시녀들은 루이스에게 크게 문책을 당했고, 그다음부터는 낮이나 밤이나 황녀궁은 밝은 상태를 유지했다.

헤레이스와 함께 오래된 창고에 갇혔다 돌아온 날, 밤사이 열어 둔 창문 너머로 불어온 바람 때문에 켜 놓았던 불이 꺼졌다. 새벽녘에 무심코 눈을 떴을 때 그날처럼 어둠이 나를 덮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칠흑 같은 어둠이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창문이 열려 있는 것도 그 순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온전한 사각 틀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귓가에 환청이 들려왔다.

‘들이쉬고-. 내쉬고-. 후우- 하아-’

살랑대는 바람 소리와 섞여서 귓가에 들어오는 환청 소리를 따라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를 반복했다. 그러니 이전까지 나를 엄습해오던 공포가 온데간데없이 평온해졌다.

헤레이스와 함께 오래된 창고에 갇혔던 그날 이후, 나는 어두운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외전 2. 첫 만남 (헤레이스) (1)

함께 납치당했지만, 에일린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나는 루이스에게 취조에 가까운 추궁을 받아야 했다.

“이런 일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루이스의 싸늘한 음성이 울렸다. 못마땅함, 불쾌함, 그리고 살의가 전혀 숨길 생각 없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에게는 나 역시도 가해자 중 한 명으로 보이는 것이다.

“헤레이스 공작. 어떻게 된 일이지 어디 한 번 설명을 좀 들어 볼까.”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자신이 어떻게 할지 결정하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심사가 뒤틀린다면 나 역시도 책임을 지게 만들 것이다.

“황녀 전하를 잠시 돕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제 실수입니다. 좀 더 주위를 살피고 조심했어야 하는데, 황녀 전하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황녀의 일이 뭔데.”

루이스는 지금 나를 떠보고 있었다.

“황후 후보를 찾는다는 일? 그 얘기를 보고받았을 때 그냥 놔두는 게 아니었어. 이상한 게 꼬일 줄 알았으면.”

역시나 루이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조소를 머금은 채 말을 잔뜩 비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 입 다물어. 감히 에일린에게 접근할 생각을 하다니, 겁을 상실했군.”

루이스에 의해 가차 없이 차단당했다. 어차피 내 사과나 변명 따위는 들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에일린에게 왜 접근한 거지?”

“…….”

“헤레이스 공작.”

“예, 폐하.”

루이스가 나를 찍어 누르듯이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냈다. 혹시라도 내가 에일린에게 위험 요소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루이스는 대놓고 적대심을 드러내며 경고했다.

“황녀에겐 다시는 얼씬거리지 마라. 그대의 가문은 벌써 작위고 뭐고, 모든 권한과 신분을 박탈당하고도 남는다. 내 인내심을 자만하지 마라. 지금까지 참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의가 치밀어 오니.”

“…….”

“지금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라. 이미 네놈과 네놈 어미를 살려 놓은 것만으로도 나의 관용이 넘쳐흐른다. 그러니 지금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라.”

“…명심하겠습니다.”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나는 어떤 반론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제국의 황제였고, 나는 그의 신하였다. 황가와 공작가는 사이가 나빴다. 그가 나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가 나를 이토록 싫어하는 이유는 그게 다가 아니지만.

“피차 보기 싫은 얼굴, 더 이상 내가 그 면상을 봐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루이스가 냉담하게 말을 한 후, 손을 내저었다. 인제 그만 꺼지라는 뜻이었다. 나는 정중하게 예를 갖춘 후 물러났다.

* * *

에일린과 내가 조금이라도 엮이는 것을 가만두고 보지 않을 황제는 그날 있었던 일을 철저히 은폐시켰다. 나와 있었던 일을 마치 세상에 존재한 적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은 것 같았다. 황제의 그런 행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다.

황제는 멋대로 황궁을 나간 에일린에게 5일이라는 시간 동안 궁 밖으로의 출입을 금했다. 하지만 사정을 알 리 없는 귀족들은 황제가 아끼는 여동생에게 왜 갑자기 벌을 내렸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대외적으로 내게 내려진 별다른 처벌은 없었다. 하지만 나 역시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숨죽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서신이 와 있습니다.”

귀족들의 연회 초대장이나 업무에 관련한 것이 아닌 개인적인 서신은 모두 처리하라고 명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앨버트가 이렇게 보고하는 거라면. 일반적인 서신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서신?”

“황녀 전하께서 보낸 서신입니다.”

앨버트에게 서신을 건네받은 후 집무실에서 혼자 있을 때 서신을 확인했다. 서신에 담긴 내용은 짧고 간단했다. 조만간 한번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서신을 보고 한참을 고민했다. 만나지 못한다고 답변을 하는 게 좋을까.

굳이 에일린이 아니어도 다른 귀족들에게서 온 서신에 답변을 하는 것은 예의였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앨버트나 다른 보좌관들이 대신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이것도 같은 차원에서 해도 되지 않을까.

펜을 손에 쥐고 쓰려고 할 때였다. 막상 쓰려고 하니 뭐라고 써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종이에 잉크만 계속 떨어진 채 결국 한 글자도 쓰지 못했을 때였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앨버트가 들어왔다.

“공작님께서 지시한 조사 결과가 도착했습니다.”

앨버트에게 지시한 조사. 그것은 나와 에일린이 납치를 당한 그 날에 대한 것이었다.

이미 결과는 나왔고, 조치까지 취해진 후였다. 금품을 노린 멋모르는 강도들의 소행.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분명 나와 에일린을 알고 일부러 노린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앨버트에게 은밀하게 알아볼 것을 지시했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나왔지?’ 묻자 앨버트의 안색이 나빠졌다. 결코 좋은 내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저 운이 나쁜 단순한 해프닝…일 리 없었다.

“공작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황녀 전하를 노린 거 같습니다.”

“누가 그런 짓을 한 건지는 알아냈나.”

갑자기 앨버트의 말이 끊겼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그는 지금 대답하기 곤란해하고 있었다. 순간 불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공작님의 예상대로입니다.”

앨버트의 말에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했던 ‘설마’가 맞았다는 소리였다.

귀족 연합의 소행. 단순한 귀족들 간의 친목 도모가 아닌 황권에 반기를 드는 자들의 은밀한 모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황녀가 폐소공포증이 있는 걸 어떻게 알고 그런 거였지?’

황녀가 폐소공포증에 걸린 계기는 이전에 있었던 사건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제국의 내정은 불안하게 흔들렸고 그 와중에 황궁 안에서 황녀가 납치당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었다. 황궁은 발칵 뒤집혔고, 아주 약간의 의심이 가는 자들은 모두 잡혀 와 심문을 당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소용없이 에일린은 납치 후 보름이 지나도록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 에일린에게는 폐소공포증이 생겼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극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황녀는 황궁 안에서 철저하게 보호받았고, 단 한 번의 불상사를 제외하고는 어떤 위험에도 노출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실을 눈치챌 수가 있었던 거지?

‘아니,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다른 사람도 알고 있을 확률이 있는 건가.’

내가 에일린의 폐소공포증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제는 에일린이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하지만 에일린이 폐소공포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아져서는 안 된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소문이 새어 나가는 건지, 모든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또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확실하지 않아서 확인하려 한 건가.’

에일린에게 폐소공포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가지만 확신이 없어서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이번 납치의 목적은 어떤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어쩐지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결국……. 내게 상의 한마디도 없이 멋대로 저지른 건가.”

내가 못 미더운 거겠지. 그래서 나를 감시하다가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노린 것이다. 결국, 나 때문인 건가.

“공작님과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아무래도 미끼가 된 것 같습니다. 만약에 범인이 잡히면 공작님도 공범으로 몰릴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겠지.”

갑자기 피곤해졌다. 눈 사이가 뻐근했다.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 얼굴에서 멈췄다. 그대로 생각했다.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군.’

행동 하나, 말 한마디까지 모두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결심하고 있을 때였다. 앨버트가 물었다.

“어찌할까요.”

누가 이런 일을 벌인지는 알았다. 그러니 이 사실을 알리던지 그들에게 이번 일을 추궁하든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냥 조용히 묻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선대 공작 때부터 관계를 유지해 오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나를 의심하고 감시한다고 해서 대립할 수 없었다. 귀족 연합은 벌써 3대에 걸쳐 내려오는 관계였다. 서로 혼인으로 관계가 연결되어 있었고, 상대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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