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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54화 (54/124)

?제54화. 외전 2. 첫 만남 (헤레이스) (2)

귀족 연합이 이런 짓을 하기 시작한 것은 제국의 현 황제, 루이스가 태자이던 시절 때부터였다. 그 당시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했다. 황제파와 귀족파의 대립이 극도로 심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두 세력의 대립은 한쪽이 무너지지 않으면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았고, 당시 황제였던 선황제가 잠시 주춤했던 틈을 타서 귀족 연합은 반역을 시도했었다. 1년간의 내전이 일어났고, 그사이에 엄청난 피와 희생이 뒤따랐다.

그 당시 공작가는 귀족 연합의 핵심 세력으로, 선황제와 가장 큰 대립을 이루었다. 그때 함께 같은 파벌을 이루었던 귀족들은 여전히 물밑에서 현 황제를 꺾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공작가도 있었다.

그러니 지금 그 범인이 루이스에게 잡힌다면, 이 일에 대한 책임 소재뿐만 아니라 과거의 일과 현재 하고 있는 모든 일까지 모두 잡힐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일을 덮고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못마땅하고 불쾌할지라도. 나에게는 처음부터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약점을 잡힌 쪽이었으니까.

결국, 이 일을 저지른 자를 잡아내기는커녕 황제가 잡지 못하게 방해하고 범인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 돼 버린 거다.

“그럼 관련 문서는 모두 폐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앨버트가 물러나고 나는 그가 오기 전까지 보고 있던 에일린의 편지를 다시 한번 읽었다. 그날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 들어간 간결한 내용이 전부인데도, 나는 수차례 반복하며 읽었다.

하필 같이 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 혹시 그 일 때문에 폐소공포증이 더 심해진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잘 지내는 모습을 한번 확인하면 좋을 텐데.’

그녀의 편지에 답신을 쓰려 하는데 펜을 쥔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루이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다신 거슬리지 말라는 말은 에일린 주위에서 멀어지라는 뜻이었다.

나는 답신을 쓰려던 종이를 한 손에 쥐고 그대로 구겼다. 답신은 보내지 않을 것이다. 에일린과 만나지 말아야 했다.

괜히 루이스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 잘못 움직였다가 그들에게 에일린의 상황에 대해 어떤 단서를 남길지도 몰랐다. 에일린의 폐소공포증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할 비밀이었다.

* * *

그날 이후로 에일린과는 우연히 마주치지도 않았다. 연회가 있을 때는 에일린이 참석할 경우를 미리 확인해서 피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나고 나면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아무렇지 않겠지. ‘그런 일도 있었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겠지.

‘그건 좀 섭섭할지도.’

하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황제가 황녀의 남편을 진지하게 알아보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황녀의 짝을 찾는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때는 루이스가 온갖 이유로 퇴짜를 놓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청혼서를 보낸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여 시끄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시비 역시 없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어쩐지 나와 엮일 바에는 빨리 결혼을 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제국 밖은 안 된다는 조건도 바꿔서 다른 나라로 보낼 수도 있겠군.’

황녀의 결혼식이 제국에서 열린다면, 그때가 마지막 만남이 되려나. 차라리 그게 더 깔끔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곧 이어질 일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후원을 거니는데, 분명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의나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기척이 가벼운 게 앨버트나 보좌관들 중에 한 명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시녀인가.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명을 어기고 들어온 시녀에게 한마디를 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 모든 예상이 깨져 버렸다.

“그날 감사했어요.”

뒤를 돌아보니 서 있는 사람은 역시나, 내 예상대로 에일린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의 등장에 내 눈이 저절로 커졌다.

후원에 들어서는 입구를 보니 멀찌감치 떨어져 앨버트가 눈치를 보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 에밀도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에일린이 갑자기 찾아와 막무가내로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냉담하게 물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입니까.”

하지만 에일린은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상처받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서신을 보내도 돌아오는 게 없어서요.”

그녀가 보낸 서신을 무시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직접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인가. 갑자기 방문이라는 명목으로 들이닥치는데 막을 수 없었겠지.

“그날 고마웠다는 인사를 제대로 하고 싶은데 기회를 도통 주지 않아서요.”

지금 이대로 무시하고 돌려보내려고 하면 분명, 인사를 핑계로 몇 번이고 다시 찾아올 것 같았다.

그녀가 입술 끝만 올렸다. 웃는 얼굴이지만, 정말 웃는 게 아니라는 것쯤 느껴졌다. 나는 에일린을 보며 의례적인 미소로 화답했다. 차라리 지금 제대로 얘기하고 마무리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아닙니다. 저 때문에 괜한 위험을 당하신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아무도 예기치 못한 일인걸요. 분명히 제가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그래도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이네요.”

그날 밤에 달빛 아래에서도 하얗게 질려 있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창백했던 낯빛은 불그스레한 색이 물들어 있었고, 질려 있던 얼굴은 생기가 돌았다. 에일린의 본래 씩씩하고 당찬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덕분이랍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미소로 감사함을 전달했다. 에일린의 뒤편에 서 있는 앨버트의 안절부절못한 채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보였다.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는 몸짓이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래 마주하고 있었다.

공작가를 감시하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들은 분명 에일린이 이곳에 들어오는 모습을 봤을 것이고 그녀가 공작가에 얼마나 머물렀는지 시간까지 보고할 것이다. 한쪽은 루이스에게. 한쪽은 귀족 연합에게. 괜한 빌미를 만들어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적당히 헤어져야 했다.

에일린을 그만 돌려보내려고 할 때였다. 에일린은 내 의도를 알면서도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곧 공작가로 봉투 하나가 갈 거예요.”

“네…?”

갑자기 봉투를 보낸다니. 내가 이해가 안 되는 얼굴로 에일린을 보자 그녀가 씨익, 웃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이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제 청혼서에요.”

에일린이 너무 담담해서 순간적으로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그녀가 말하는 청혼서라는 것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는 건가 싶었다.

“그게 무슨….”

하지만 아니었다. 에일린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공작님께 보내는 제 청혼서예요. 부디 받아 주시기 바랄게요.”

너무 놀라면 굳어 버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지금 내가 그러니까. 아무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에일린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청혼서라니.

“근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

“네…?”

“아, 아닙니다.”

에일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아직 황제가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가 안다면 에일린이 태연하게 말할 리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청혼서를 보낼 수 없을 것이다. 보내기 전에 루이스에게 가로막힐 테니까.

그제야 놀랐던 머리가 차분해지고 미친 듯이 뛰었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한순간에 끓어올랐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 청혼서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차피 황제에게 가로막혀 보낼 수도 없겠지만, 그녀가 괜한 무리를 하지 않도록.

“이만 돌아가 주세요. 청혼서도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왜요?”

에일린이 고개를 다시 한번 갸웃거리며 물었다.

여기서 만약 그녀가 내게 청혼서를 보내는 날에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나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뗐다.

“어차피 보낸다 해도 제가 거절할 거니까요.”

“그렇게 하세요. 그건 공작님의 선택이니 아쉬워도 어쩔 수 없죠.”

“어차피 거절할 게 정해져 있는데, 괜히 보내실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이쯤 말하면 알아들었겠지.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에일린 역시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뇨, 그래도 저는 보낼 거예요.”

“어째서 이러십니까.”

“저는 공작님께서 거절하시더라도 청혼서를 보낼 거예요. 만약 거절하신다면 또다시 보낼 겁니다.”

“그래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그러니 불필요한 일이다. 내가 다시 한번 설득하려고 할 때였다. 에일린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그땐 어쩔 수 없죠.”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뜻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거절당하더라도 청혼서를 보낼 거예요. 그러니 그때 다시 고려해 주세요.”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더 얘기하다가는 오히려 내가 에일린에게 말릴 것 같았다. 에일린은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에밀에게 그녀를 데려가라고 말했다.

“에밀, 황녀 전하를 그만 모셔 가세요.”

에밀이 에일린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에밀을 뿌리치며 말했다.

“폐하 때문에 그런 건가요?”

순간 멈칫했다. 그녀 역시 황제가 반대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일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그거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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