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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55화 (55/124)

?제55화. 외전 2. 첫 만남 (헤레이스) (3)

그 모습이 당당해서 정말로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와 황가의 악연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해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닙니다. 폐하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황녀 전하와는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얘기한 겁니다."

내 말에 에일린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보는 게 마음 편할 리 없었다. 하지만 다가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바라만 보는데, 그녀가 말했다.

“……못하는 건가요, 싫은 건가요?"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할 때 다정하고 배려심이 있는 것은 독이다. 정말 거절하고 싶다면 차라리 잔인해야 한다. 아무리 굴하지 않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부정당하면 상처받고 돌아선다. 그러니 지금 그녀의 물음에 싫다고 대답하면 아마 다시는 이렇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다치는 것보다 지금 상처받는 게 나은 선택일 것이다. 그러니 싫다고 확실하게 말해 줄 생각이었다.

“저는 황녀 전하와 결혼하기 싫……,”

하지만 내 말과 함께 에일린의 고개가 아래로 조금씩 떨어지면서 드레스를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떨리는 게 보였다. 주먹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더니 고개를 숙여서 잘 보이지도 않는 얼굴에서 투명한 것이 순간 반짝하고 빛났다.

동시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때일수록 잔인하게 끝까지 말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입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세요.”

결국, 내가 먼저 돌아서 자리를 피했다. 이대로 같이 있다 보면 말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앨버트의 보고에 따르면 에일린 역시 얼마 있지 않아 에밀과 함께 공작가를 떠났다고 했다.

* * *

다음 날,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찾아왔다. 이사벨은 에일린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황녀가 찾아왔었다면서요.”

“네. 잠시 왔었습니다.”

“설마 황녀와 도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루이스가 아무리 소문을 막아 보려 해도 모든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밤에 있었던 납치와 관련한 일은 완벽하게 차단했지만. 나와 에일린이 며칠을 함께 돌아다닌 것은 알음알음 소문이 난 상태였다. 이미 목격자가 여럿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사벨은 그때부터 열을 내며 에일린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더 이상은 상관없다며 이사벨을 달랬지만, 어제 갑작스러운 에일린의 방문으로 이사벨은 더욱 격렬하게 반대했다.

“나는 반대에요! 황가와 우리는 결코 함께할 수 없어요!”

머리가 지끈거렸다. 솔직히 피곤했다. 어제의 일만으로도 아직 복잡한데, 이사벨까지 열을 올리니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이사벨은 계속해서 내게 확인 또 확인을 했다.

“다른 영애 누구와도 괜찮지만, 황녀는 절대 안 돼요! 인정할 수 없다는 내 말 유념하세요!”

한숨이 나오려 했다. 하지만 억지 미소로 어머니를 달래는 게 무의미한 대화를 빨리 끝내는 법이었다.

“저와 황녀라니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말…정말이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요, 당연한 일이죠. 제가 괜한 걸 걱정했네요.”

여전히 믿지 못하던 이사벨이 드디어 안심한 듯 활짝 웃었다. 겨우 납득한 이사벨이 돌아갔다. 밤새 걱정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하다는 말과 함께.

한바탕 태풍이 지나갔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앨버트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공작님.”

“지금은 좀 쉬고 싶군.”

“알겠습니다.”

앨버트가 물러났다.

도저히 오늘 업무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이사벨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이사벨 역시 그것을 느꼈기에 납득하고 돌아간 것이었다. 에일린과 나는 함께 할 수 없는 관계다. 에일린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와 그녀가 처음 만난 것은 이번이 아니었다.

‘그래, 말도 안 되지. 감히 무슨 자격으로…….’

내가 에일린을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그때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녀가 납치된 사건이 있었다. 그것도 황궁 안에 있던 황녀가 납치되어서 더더욱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다.

그녀가 납치되고 시간이 지나도 어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을 때, 사람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수록 수색은 힘을 잃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포기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때 황녀 에일린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것도 그녀의 두 발로 황궁 앞까지 직접 걸어서 온 것이다. 그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분위기였던 황궁은 발칵 뒤집어졌고,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에일린을 보호했다.

하지만 보름 만에 돌아온 그녀의 몰골은 처참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에일린은 한 달이 지나서야 의식을 찾았다. 그녀가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납치 당시의 기억만 대부분 잃었다. 범인을 잡을 유일한 희망이었던 에일린이 기억을 잃고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났다. 에일린은 그 사건 이후에 폐소공포증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다. 천하의 루이스도 모르는 진범. 어쩌면 그가 알면서도 잡을 수 없었던 범인. 그는 바로 선대 공작이자 이제는 세상에 없는 나의 아버지다.

나도 아버지가 어떻게 황궁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황녀인 에일린을 납치할 수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대담하게도 황녀를 납치한 뒤 다른 곳도 아닌 공작가의 뒤편에 있는 창고에 그녀를 가뒀다.

평소와는 다른 공작가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의심해서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에일린을 그때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에일린은 지금 살아 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에일린과 결혼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아니더라도 나와 에일린은 있을 수 없는 관계였다.

* * *

그래서 납치당한 에일린을 구하고 난 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녀를 연회에서 마주쳤을 때,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이제는 정말 괜찮은지. 혹시 그때의 사건으로 여전히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그것만 확인하고 다시는 에일린에게 다가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에일린은 내 생각보다도 더 끈질겼다.

그녀는 정말로 공작가에 청혼서가 담긴 봉투를 보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절대로 허락할 리 없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내고야 만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청혼서에는 황제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것이 기쁨인지 헛웃음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어쨌든 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일을 해내는 에일린이 감탄스러웠다.

8장. 소문 (1)

갑작스러운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작가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황녀 전하.”

익숙한 호칭이다. 나를 이렇게 부르는 부류는 정해져 있었다. 황궁 사람들.

문제는 이 호칭을 듣는 장소가 익숙하지 하지 않다는 거다. 왜 황궁 밖에서 신분도 밝히지 못한 채 나를 찾는 사람이 황궁 사람인 거지?

“무슨 일이지.”

루이스 옆을 지키고 있어야 할 시종장이 왜 공작가에 있는 거지? 순간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그것이…….”

“시종장, 무슨 일이야?”

시종장은 한눈에 봐도 곤란해 보였다.

많고 많은 황궁 사람 중에서 하필 시종장이 여기까지 왜 온 거지? 내가 추궁하듯 묻자, 시종장이 헐레벌떡 달려와 구원을 요청하는 얼굴로 고해바쳤다.

“마마!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시종장의 말에 두 가지 사실은 확실히 알게 됐다.

첫 번째, 나를 찾아온 이유는 아마 루이스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루이스가 곤란한 상황이라기보다는 루이스의 만행에 시종장을 비롯한 그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설마……. 폐하께서 황궁 밖에 나와 계신 건가.”

시종장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가능만 하다면 땅 안으로까지 들어갈 기세다.

“일단 앞장서.”

“마마…!”

나를 구원의 빛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종장이 두 눈을 크게 끔벅 끔벅거렸다.

“가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듣지.”

“예!”

나는 시종장을 따라 루이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아이고, 머리야. 시정을 살피겠다며 황궁 밖을 나와 돌아다니던 루이스가 상인과 싸움이 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일로 벌어진 입씨름이었다.

“도둑질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 거야?”

“죄송합니다. 저희도 전후 사정은 알지 못해서.”

루이스는 황궁 밖까지는 시종장과 호위 몇을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곧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시종장과 호위무사가 겨우 루이스를 찾아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벌어진 후였다고 한다.

루이스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도둑질을 했다며 다툼이 일어났다고 한다. 다툼 끝에 식당 위에 있는 방에 갇히는 신세까지 됐다는 것이 현재 상황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돈이라고 차고 넘치는 게 루이스인데.

“혹시 돈을 안 가지고 있었나?”

보통은 시종장이 챙길 테니, 갑자기 도망치면서 돈은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사태였다.

“아닙니다. 처음부터 빠져나갈 계획이셨는지, 분명히 돈을 직접 챙기셨습니다.”

“근데 왜?”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만약 돈을 내지 않고 도둑질한 게 사실이었다고 치더라도 왜 붙잡혔느냐 하는 것이다.

루이스라면 눈이 가려져 있어도, 양쪽 발이 묶여 있어도 충분히 싸워서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몸이 자유로운 상태였다. 저건 잡힌 게 아니라 잡혀 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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