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8장. 소문 (2)
루이스가 꼼짝도 안 하니, 지키고 있던 호위들도 어쩌지 못하고 건달에 가까워 보이는 상인들과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인들 해결은?”
“그것이…….”
돈이 문제라면 돈을 주고 해결될 문제였다. 그런데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거지?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저희가 돈을 더 주고 해결을 하려 했는데, 폐하께서 막으셨습니다.”
“뭐?”
시종장은 난처해 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루이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돈을 쥐여 주거나 허락 없이 멋대로 합의를 하면 나중에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습니다.”
“…어째서?”
천하의 루이스가 갇혀 있다니,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차마 이 상황에서 황제라는 신분을 밝혀지면 앞으로 어떤 소문이 어떻게 돌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던 끝에 시종장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루이스는 방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쉬고 있는 것처럼 여유로웠다. 루이스 때문에 모두가 걱정인데 정작 본인만 태평하다니, 살짝 화가 나려 했다.
“폐…, 오라버니.”
“여긴 어쩐 일이냐.”
혹시라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일부러 에밀의 옷을 입고 왔다. 머리도 말아 올려서 두건 안에 넣었다. 그러니 온전히 오라비와 누이의 관계였다.
“여기서 뭐 하세요?”
내 핀잔에 루이스가 움찔했다. 본인도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긴 한가 보다.
“이만 돌아가요.”
루이스의 팔을 잡아당기는데, 꿈쩍도 안 한다.
“그만 가자니까요.”
루이스는 눈치를 보면서도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 계속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예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에 계속 있기에는 불안 요소가 너무 많았다.
“좀만 기다려. 곧 나갈 거니까.”
하지만 루이스의 기준에서 ‘조금’은 내 기준과는 너무 달랐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는 지금까지 우리는 방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루이스가 언제 나가나 하고.
결국, 루이스를 데리러 여기까지 와서 내가 하는 일이라곤 이것뿐이었다.
“왜 나왔어요? 황궁 나오는 거 안 좋아하잖아요.”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러.”
“설마요. 오라버니가 백성들을 걱정했다고요?”
“누가 그래?”
루이스가 오히려 되물었다.
“아니, 방금. 백성들 사는 모습 보러 왔다고…….”
“응.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구경하러 나왔어.”
이 사람이 진짜! 궁금하고 걱정스러워야지. 구경하러 나왔다니.
그래도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루이스를 살살 구슬려 가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구경은 잘 했어요?”
“뭐. 별거 없더라고.”
“구경 다 했으면 그만 황궁으로 돌아가셔야죠.”
“…그래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열심히 입을 조잘거리지 않으니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루이스는 여전히 미동조차도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거예요.”
“글쎄.”
루이스의 ‘글쎄.’라는 말은 지금 일어나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긴, 지금 일어날 거였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설마 하루 종일 이러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결국, 루이스를 움직이게 하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일어날 생각을 할 때까지 그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해가 저물어 까마득한 밤이 되었을 때였다. 어쩌면 이 상태로 하룻밤을 지새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아저씨! 저 왔어요!”
“이 꼬마가! 뭐해! 저 꼬마 잡아!”
“놔요! 아저씨 저 왔어요! 저 왔다고요!”
밖에서 소녀가 어떤 아저씨를 찾으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아저씨! 저 늦지 않고 약속대로 왔으니까. 그만 나와요. 나와도 돼요!”
문 사이로 바깥 상황을 보니 9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이쪽을 향해 몸부림쳤지만, 상인들에게 붙잡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저 애가 말하는 ‘아저씨’가…….”
오라버니인 거예요? 내 물음에 대답하듯이 루이스는 바위가 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던 몸을 박차고 일어나 발길질 한 번으로 문을 열었다,
“왔구나.”
루이스는 무심하게 말하면서 어린 소녀의 몸을 잡고 있는 상인들의 손을 친히 하나씩 떼어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감사해요.”
“필요 없어.”
루이스가 무심하게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래서. 다녀왔니?”
답지 않은 다정한 목소리였다.
“네. 덕분에 다녀왔습니다.”
어린 소녀가 루이스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동생은.”
“밥 먹고 약 먹는 것까지 보고 왔어요. 죄송해요. 너무 늦었어요.”
“오늘 안에만 오라고 했는데 아직 달이 중천에 있으니 일찍 온 거다.”
“너 이 쪼그만 게!”
상인의 거대한 손바닥이 어린 소녀의 머리 위로 날아왔을 때였다. 루이스가 어느새 상인의 허리춤에 있던 검집에 검을 빼내어 손잡이 부분으로 상인의 손목을 세게 눌렀다.
“으아악!!”
상인은 그대로 멀쩡한 반대쪽 팔로 40도 이상 꺾인 자신의 팔목을 붙잡았다. 보기에는 손잡이로 툭 하고 누르는 것 같았지만, 엄청난 체중이 실린 것이었다. 아마, 그 팔은 다시 쓰지 못할 것이다.
“어디다 곰 발바닥만 한 것을 갖다 대.”
그렇게 말하면서 루이스는 방금 전 상인의 팔을 아작낸 손으로 어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마야, 약속을 지켰으니 나도 선물을 하나 주마.”
“정말…이에요?”
“그래.”
어린 소녀에게 다정하게 웃어 주던 루이스는 언제 그런 미소를 지었냐는 듯이 상인들을 향하자마자 싸늘한 얼굴로 돌변했다.
“내놔.”
하지만 상인들은 공포에 떨면서도 바로 뒤에 벽이 있는 곳으로 의미 없는 뒷걸음질을 칠뿐이었다.
그 순간 루이스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지루한데 잘 만났다는 듯이 그대로 검을 상인들의 앞으로 내밀어 몸통을 그대로 망설임 없이 베어 버렸다.
“폐하!!”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시종장이 루이스의 앞에 팔을 뻗으며 막아섰다.
“비켜.”
“폐하! 안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재판 없는 처형은 불가합니다!”
시종장은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루이스를 향해 눈을 똑바로 들었다.
“건방지게 나를 노려볼 눈이 있으면 돌아서 저것들도 똑바로 봐.”
시종장에게까지 검을 휘두르면 내가 나서서 막으려고 드레스 자락을 꽉 붙잡고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종장이 몸을 돌려 뒤를 본 순간,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시종장과 내 신경이 탁하고 풀렸다.
루이스가 검으로 몸을 두 동강 낸 것 같았던 상인의 몸은 그에 비해서는 멀쩡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옷이 완전히 두 동강 나고 장기가 훼손되지 않을 정도로 살집이 배어서 피가 많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툭-. 상인의 정확히 반 갈라진 옷 사이로 루이스의 검에 함께 베어져 두 동강 난 종이가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꼬마야, 가져가라. 이제 넌 자유다.”
어린 소녀는 바닥을 기어 루이스가 가리킨 두 동강 난 종이를 주워 입안에 넣어 잘근잘근 씹다가 꿀꺽, 삼켰다.
대충 무슨 상황이었는지 알겠다. 루이스가 훔쳤다는 게 아마 저 어린 소녀였나 보다. 아마 빚 때문에 팔려갈 뻔한 상황에 오라버니를 만난 거겠지.
“…화, 황제?”
“설마……. 그…황제…?”
아차, 방금 전에 상인을 죽인 줄 알고 시종장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모두의 이목이 루이스에게로 집중되었다. 애써 숨긴 신분이 허무하게 드러나 버렸다.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 시종장과 바쁘게 눈빛을 교환하는데, 루이스는 지금의 상황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지나쳐 가게를 나갔다.
“폐, 폐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지금 겁을 먹고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빌고 있는 저 상인들이 루이스의 앞에 있었으면 아마도 그 등을 사뿐히 밟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 뒤를 나와 시종장이 따랐다. 일부러 루이스와 거리를 둔 후, 나는 시종장을 은밀하게 불렀다.
“시종장.”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시종장의 목소리도 은밀하게 작아졌다.
“오늘 일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
“최대한 소문이 나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하겠습니다.”
시종장은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문을 내야지.”
“소문을 내다니요?”
‘제국의 폭군이란 악명이 자자한 황제가 반나절 동안 상인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붙잡혀 있었다는 이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말입니까?’라고 시종장은 입술 한 번 안 열고 이 긴 말을 눈빛만으로 표현했다.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보기 위해 황제가 직접 거리에 나와 살폈다. 그러던 중 불의에 처한 어린 소녀를 발견한 황제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도와줬다. 어린 소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한 상인들을 황제는 관대하면서도 공명정대한 처벌을 내렸다.’ 정도의 이야기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소문을 내라는 겁니까?”
“뭐, 대부분은 사실이지 않나.”
“그렇긴 한데. 느낌이 뭔가…….”
‘오늘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은 그렇게 따뜻하고 훈훈한 분위기는 아니지 않았나요?’라는 뜻이다.
“미담에는 꼭 사실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니까.”
걱정이든 궁금증이든 백성들을 생각해서 나온 것은 맞고. 그러던 중 어린 소녀를 구해 준 것도 맞다. 그 과정이 어처구니없긴 했어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감동받고 잊지 못한다. 전쟁에서 아무리 많이 이겨도 불의에 닥친 어린 소녀 한 명을 구하는 것만큼 강한 울림이 되지 못한다.
이런 소문들이 하나씩 쌓이다 보면 루이스를 응원하는 백성도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