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8장. 소문 (10)
“이상한 방향이라니.”
처음에는 그저 염문설이었다. 그런데 소문은 점점 구체화 되어 갔다. 그것도 저질스러운 방향으로. 사람들은 에일린과 룩센 황태자가 밤을 보낸 날을 마치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런 소문이 점점 퍼져 나간다면, 모두가 한 번씩 상상하게 될 것이다.
“끔찍하군.”
소문의 내용과 파장이 끔찍한 만큼 이 소문을 내는 놈들이 용서가 안 됐다.
보좌관이 소문을 정리해서 보여 준 문서를 읽어 내려가는데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뭐지, 이 께름칙한 기분은. 소문의 내용을 다시 한번 읽었다. 역시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을 읽었을까, 어느새 소문이 적힌 내용을 읽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공작님. 왜 그러십니까.”
“이게 저절로 퍼져 나간 소문이라고?”
“네. 소문에 살이 조금씩 붙으면서 이렇게까지 변질된 것 같습니다.”
내 물음에 보좌관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확인한 사실이 아니라 추측이었다.
“…아무리 소문이란 게 입을 타면 탈수록 자극적으로 변한다고 하지만, 이건 이상하지 않나?”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소문이란 것이 아무리 사람들의 입을 오갈수록 그 내용이 달라진다고 해도…지금의 소문은 너무나 작위적인 면이 있었다.
“입으로 옮기는 소문은 보통 자극적인 문장 한두 줄에 불과하지. 하지만 이건 마치 한 편의 짧은 소설처럼 묘사까지 되어 있군. 이런 소문이란 게 있을 수 있나?”
보좌관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했다. 그때였다.
“…실은 이런 것도 함께 돌아다녔습니다.”
보좌관이 일부러 내게 보고 하지 않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 종이에는 에일린과 룩센 황태자를 떠올리게 하는 두 남녀가 밤을 함께 보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거기에 덧붙여 이야기를 만든다. 이건 소문이 자연스럽게 변질됐다고 보기에는 너무 복잡한 과정이다. 소문을 내기 시작한 주도자가 추가로 소문에 살을 덧붙이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다른 자극적인 소문으로 덮는 것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려고 하면 더 자극적인 소문을 퍼트리려 할 테니까.
차라리 가장 좋은 방법은……. 이깟 소문 따위 사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이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 이런 소문 따위에 재미를 갖지 않고 새로운 현상에 떠들 수 있게 하는 것.
소문을 낸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든, 절대 그렇게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소문은 대처가 빠를수록 좋았다. 머뭇거릴수록 소문은 더러워지고 에일린의 이름은 진창에 구를 것이다.
“…거슬리는군.”
생각할수록 불쾌했다. 에일린이 스캔들에 휩싸인 것도, 지금 황궁에 가 있는 것도. 그 황궁에 스캔들의 상대방인 룩센 황태자가 있는 것도, 그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거슬리는 것은 이 상황에서도 에일린이 나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내게 해명도 변명도,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는다는 것. 그것이 못 견디도록 화가 났다.
역시 스캔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황궁으로 가지.”
“네?”
“부인이 거기 있다니, 내가 직접 가야지.”
황궁으로 출발하려다 돌아섰다. 그대로 앨버트에게 몇 가지를 지시했다.
이미 그동안 에일린과 나의 관계는 제국민과 귀족들에게 큰 호기심 거리였다. 그러니 에일린과 룩센 황태자가 아닌 에일린과 나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면, 새로운 소문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것이다.
“황궁에서 공작가까지 이어지는 길에 레드 카펫을 깔아.”
“레드 카펫…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지나가던 사람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하고 싶을 만큼.”
“예, 알겠습니다.”
내 지시에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앨버트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기대감에 들뜬 듯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모두의 이목을 받으면서 에일린을 기다렸다. 그녀가 황궁에서 나오며 놀란 얼굴을 하는 것이 보였다. 동그랗게 커진 눈, 살짝 벌어진 입술.
그 뒤로 룩센 황태자가 보였다. 에일린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룩센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향해 보란 듯이 웃어 보였다.
* * *
나는 눈앞에 펼쳐진 레드 카펫과 꽃을 든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헤레이스는 나를 향해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드 카펫은 공작가까지 이어진 것처럼 눈으로 그 끝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이어져 있었다.
꽃을 든 헤레이스와 레드 카펫. 마치 프러포즈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하지만 어쨌거나 레드 카펫을 따라 수많은 사람이 나와 헤레이스를 구경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소란스러운 이벤트라니.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시선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헤레이스는 내게 소문의 진실 따위 상관없게 만들어 버린다고 했다. 지금 이걸로 그런 게 가능하다는 걸까.
“소문이 변질되고 있는 것은 그냥 변한 게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냥 변한 게 아니라뇨? 그럼 그것도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는 건가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정도로 끝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내 물음에 헤레이스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계속 놔두다가는 손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사람들의 시선을 이쪽으로 쏠리게 한 겁니다.”
대체 내가 아직 파악하지도 못한 것을 헤레이스는 어떻게 알았을까.
헤레이스가 나를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부인.”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손을 잡지 않자, 헤레이스가 이어 말했다.
“우리가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야 소문이 힘을 잃습니다.”
헤레이스의 말이 맞았다.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가 공고할수록, 안 좋은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는 소문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에 대한 분위기 역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가 불편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헤레이스가 내민 손은 잡는 것이 맞았다. 나는 헤레이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우리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나란히 마차 앞까지 걸어가자, 사람들이 급격하게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커졌다. 간혹 환호성과 박수 소리도 들렸다.
마차에 타기 전에 옆을 돌아봤다. 헤레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것이었다.
마차를 타고 공작가로 향하는 길. 그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솔직히 공작님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사전 얘기 없이 갑자기 이런 성대한 이벤트를 벌인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내 말에 헤레이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헤레이스가 말했다.
“그럼 저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겁니까?”
“그게 아니라.”
하지만 화가 난 것 같았던 헤레이스의 얼굴이 어느새 불쌍한 척 처연해졌다.
“제 부인이 다른 남자와 소문이 났는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나와 룩센 황태자의 스캔들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과거에 내가 아무리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그와 관련한 소문을 접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신경 쓸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헤레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믿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 말이 어쩐지 그가 이런 일을 벌인 진짜 이유인 것 같았다.
헤레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어쩐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그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번 일로 저를 다시 봐 달라는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제가 하자는 대로 해 주세요.”
그는 물러날 생각도, 가만히 있을 생각도 전혀 없어 보였다.
황궁에서 공작가로 향하는 내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나는 그 시선이 따가워서 부담스러웠지만, 헤레이스는 중간중간 마차의 창문을 열어 구경하는 사람들을 향해 보란 듯이 고개를 들고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그들을 쭉 둘러보았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저택에 가면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부인이 원한다면야.”
최근에 보지 못했던 헤레이스의 능글거림이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능청맞은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헤레이스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나를 불렀다.
“저는 부인을 돕고 싶습니다.”
단호한 말투가 마치 통보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는 이미 나를 돕고 있었다. 물론 내가 원한 적이 없기는 하지만. 지금 이 시끄러운 이벤트를 통해서 사람들의 관심은 나와 룩센이 아닌, 나와 헤레이스에게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헤레이스가 말을 이어 나갔다. 어쩐지 그 목소리에는 속상함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부인이 제 도움 따윈 필요 없다고 해도.”
그때 내가 거절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상했었나 보다. 헤레이스는 어쩐지 화가 난 사람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부인의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도 가만히 놔두지도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단호하게 말하는 헤레이스에게 어쩐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열어 두었던 마차의 창문은 닫았다. 사람들의 감탄이 섞인 함성 소리가 여전히 마차 안까지 들렸다. 그래도 창문이 닫혀 있으니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마차를 타고 어느 정도 이동했을까. 이미 공작가에 도착할 시간인데 마차는 멈출 생각 따위 없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오래 걸리는 거 같네요.”
헤레이스가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다.
“사람들이 많아 조금 걸리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