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도 바쁜 황녀님-66화 (66/124)

?제66화. 8장. 소문 (12)

늦은 밤이었다. 카일라가 조용히 도착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그래요. 물어볼 게 있어서 늦은 시간이지만 실례를 무릅썼어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전부 대답하겠습니다.”

카일라는 이전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자세를 낮췄다.

“저는 지방에 있는 가문에 시집가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공작 부인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묻기도 전에 카일라는 열심히 스스로를 변호했다. 아마 누군가에게 경고나 협박쯤을 받은 것 같다.

“아뇨, 그런 걸 얘기하려고 찾은 게 아니에요.”

“그럼 무슨 일로…?”

카일라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어두운 밤에 아무도 모르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이다.

“이전까지 그대가 이사벨 부인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했던 것을 알고 있어요.”

“그, 그건…!”

카일라가 변명하려고 하자, 내가 가로막았다.

“아뇨.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에요.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 거니, 겁먹지 말아요.”

카일라가 드레스 자락을 꼭 붙잡았다.

“그때 금전적인 지원을 대가로 서로 어떤 거래를 했나요?”

“…저희 아버지는 높은 신분을 부러워했습니다. 공작님의 가문이 재정적으로 힘든 것을 알자마자 저에게 접근하라고 시키셨죠.”

“그래서요.”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사벨 부인께서 개인적인 빚을 많이 지고 다니신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카일라는 계속 내 눈치를 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에는 이사벨 부인이 곤란한 상황에 구해 드려서 환심을 사려고 했는데, 이사벨 부인께서 제게 제안을 하셨습니다.”

“…어떤 제안이죠?”

“앞으로 지속적으로 지원을 해 준다면 헤레이스 공작님과 잘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황녀 전하…와…….”

내게 말하면 곤란한 것인지, 카일라가 말을 늘이며 내 눈치를 봤다. 말을 늘이는 것을 보니, 내가 들으면 결코 기분이 좋을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괜찮으니까 얘기해요.”

“네……. 그게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와 결혼을 해도 곧 이혼하게 만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때 공작님과 이어 주겠다고.”

“고작 그런 말에 그 많은 금전적 지원을 해 주었다는 건가요?”

사업가는 결코 순진하지 않다. 그들은 모든 거래에 담보라는 것을 꼭 챙긴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말은 힘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가장 잘 알았다.

카일라는 순진하게 넘어갈지라도, 그녀의 아버지인 프랫 자작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별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에게 제가 임신을 했다는 소문을 내서라도 약속을 지키겠다는 각서를 쓰셨습니다.”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는 것 같았다. 회귀 전 카일라 영애의 임신 스캔들의 전말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되다니. 그때 내가 했던 마음고생이 떠오르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회귀 전 딱 한 번, 헤레이스가 내게 믿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카일라 영애의 임신 스캔들이 벌어졌을 때, 헤레이스는 절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수많은 소문 때문에 믿지 않았었다. 만약 그때 내가 헤레이스의 말을 믿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그보다 내가 그의 내연녀들의 등장에 바로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나를 무시하는 영애들을 제대로 상대했더라면,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것들을 그때에도 알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야.’

지금 후회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순간,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과거에 반역에 가담했던 자들은 대부분 헤레이스의 내연녀로 소문이 났던 영애들의 가문이었다.

‘만약 이 소문이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라면?’

결국, 과거에 카일라 영애가 행했던 일들도 그녀의 치기 어린 감정이 전부가 아니었다. 공작가에 원하는 것이 있는 프랫 자작가에서 계획한 일들이었다.

카일라의 경우처럼 이번에도 역시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면. 나를 공작가에서 밀어내고, 반역을 공모하는 이들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한 계획이라면.

하지만 그렇다면 헤레이스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이 이상했다.

‘헤레이스는 알지 못하는 계획인 건가.’

* * *

헤레이스는 적극적으로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여 주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나와 룩센이 아닌, 나와 헤레이스에게 집중되도록.

헤레이스가 소문에 콧방귀도 뀌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점점 소문을 믿지 않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게 연기라고 생각합니까.”

“연기가 아니면 제가 곤란하니까요.”

헤레이스를 보며 말했다.

“저는 공작님의 관심도 애정도 불편해요. 지금 이 상황도 소문이 아니었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헤레이스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보다…이런 것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나요.”

“…….”

“소문을 낸 범인을 잡는 게 가장 중요하죠.”

소문을 가라앉히는 것 역시 진범을 잡지 않는 이상,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하루라도 빨리 진범을 잡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이제 곧 초상화가 나올 겁니다.”

“부디 그 초상화가 단서가 되면 좋겠네요.”

그때였다. 노크와 함께 문밖에서 앨버트가 들어왔다.

“초상화가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순간 나와 헤레이스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곧바로 초상화를 확인했다. 역시나 초상화에는 익숙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레이스 영애네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사벨은 과거에도 헤레이스와 접점이 있는 영애들과 친분을 유지했었다. 헤레이스와 연관이 있는 여자 중 그녀가 싫어하는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 나였을 뿐이다. 게다가 나름의 동기도 있었다. 나에게 수모를 당한 이후,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과거에는 모를까, 지금은 헤레이스와 그레이스가 별다른 만남이 없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었을까?

“혹시 그레이스 영애를 최근에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아뇨, 없습니다.”

헤레이스도 그레이스 영애와 이사벨이 왜 함께 이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헤레이스 때문에 내게 골탕을 먹이고 싶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판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나는 헤레이스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그는 이런 소문에 있어서만큼은 나보다 한발 빨랐다. 게다가 잘못하면 스캔들 뒤에 또 다른 스캔들이 따라붙을 수도 있었다. 그건 스캔들의 진위를 밝히려다 더 큰 문제를 끌어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재밌어할 만한 것들을 보란 듯이 보여 줄 생각입니다. 그리고…….”

헤레이스가 초상화를 가만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가 초상화를 보면서 하는 생각은 그레이스가 아닌 자신의 어머니, 이사벨일 것이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의 어머니라고 해서 내가 참고 넘어가 주는 것은 이제 끝이었다.

“그렇게 하세요.”

헤레이스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의 반응에 놀란 것은 나였다.

“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심지어 헤레이스는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대상은 이사벨과 그레이스를 뜻하는 것이었다.

“네, 그래야 할 겁니다.”

그의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나 역시 더 이상 이사벨의 막무가내식 행동을 눈감아 줄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녀와의 질긴 악연을 끝내야 하는 것이 옳았다.

그때, 에밀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아기씨.”

“에밀. 중요한 일이 아니면 조금 있다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에밀은 잠시 헤레이스의 눈치를 보며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엇을 망설이는 걸까?

“이번 소문에 관한 거면 그냥 얘기해.”

“그래도…….”

“괜찮아.”

에밀이 하는 수 없이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지금 가 보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에밀의 선에서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인데?”

“폐하께서 현장을 덮쳤습니다.”

“!!!”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갑자기 폐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에밀이 설명을 이어 나가는 순간,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직감한 나는 그대로 튀어 올랐다. 에밀이 말한 현장이 어떤 현장인지 알 것 같았다.

바로 그쪽으로 가려고 할 때였다. 에밀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곳에 이사벨 님도 계십니다.”

그렇게 말한 에밀이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순간 헤레이스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확인 사살 당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빨리 가죠.”

나와 헤레이스는 곧바로 그 현장으로 향했다.

에밀에게 이사벨의 동향을 파악하라고 지시했었다. 에밀은 내 지시대로 에밀의 동향을 파악하던 중 그녀가 이상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에밀의 말에 의하면 이사벨은 허둥지둥하며 몰래 공작가를 벗어났다. 에밀이 이사벨을 쫓아갔을 때, 그녀는 누가 봐도 은밀한 공간으로 향했다. 수상한 걸음걸이,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확인하는 불안한 모습,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것까지. 은밀하게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 확실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나와 헤레이스가 초상화로 확인한 대로 이사벨이 만난 상대방은 그레이스 영애였다. 상황을 파악한 에밀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루이스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곳에 들이닥쳤다.

거기까지 확인한 에밀이 급하게 나에게 온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