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8장. 소문 (13)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와 헤레이스가 에밀이 안내해 준 길을 따라 현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곳은 이미 황궁 근위대로 완벽하게 포위되어 있었다. 밖에서 안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나를 발견한 병사가 공간을 만들어 줬다. 그 틈으로 나와 헤레이스가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루이스의 뒷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다. 나는 바로 달려가면서 루이스를 불렀다.
“폐하!”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루이스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그레이스와 이사벨 앞에 있었다. 거기에 에밀이 미처 보지 못한 룩센이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드디어 잡았군, 쥐새끼들을.”
루이스는 검을 빼든 채 이사벨과 그레이스를 죽일 듯이 사나운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손을 대지는 않은 것 같았다. 흥분한 루이스를 룩센이 말렸다.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기 전까지 죽이시면 안 됩니다.”
“어차피 벌어진 일, 그딴 걸 알아서 뭐하게?”
그 모습을 보니 지금까지 두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은 전부 룩센의 공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룩센의 말에 루이스가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려고 할 때였다. 룩센이 루이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른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럼 저희 황후 마마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저는 사건의 진상을 알아서 보고를 해야 합니다.”
룩센의 말은 효과가 있었다. 루이스의 행동이 멈췄다.
룩센의 존재 때문에 이번 사건은 오로지 제국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었다. 루이스 멋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루이스는 가까스로 이성을 잡았는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다시 루이스에게 다가가며 그를 불렀다.
“폐하.”
그제야 루이스가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돌아봤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내게 아는 척을 하며 동시에 에밀을 힐끗 쳐다보았다.
“벌써 온 거냐.”
루이스는 에밀이 이곳에 있었던 것도, 나를 부르러 간 것도 모두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내 옆에 있는 헤레이스의 존재도 함께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공작이 이 상황을 해명해 보겠나?”
루이스의 갈 곳 잃은 검이 나침반 바늘처럼 헤레이스의 목으로 향했다. 헤레이스는 자신의 목에 칼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저 둘의 공통점은 공작 그대인 것 같은데.”
“…….”
“아, 혹시 공범이 더 있는 건가?”
누가 들어도 루이스가 말하는 공범은 헤레이스를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헤레이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이거였다. 대체 누구를 책임지겠다는 건가. 루이스도 나와 생각이 같았는지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이사벨은 네놈의 어미라고 치고. 저 멍청한 계집도 책임지겠다는 건가?”
“어떤 식으로든 책임지겠습니다.”
“…왜. 법대로 하려고 할 생각인데. 너희 귀족들이 환장하게 좋아하는 그 법이라는 거, 그대로 해 주지. 재판까지 다 해서.”
루이스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귀족들이 틈만 나면 재판으로 결정하라고 입에 달고 사는 말을 그대로 써먹으려는 것이다. 체면과 품위가 생명과도 같은 귀족에게 이런 소문을 내다 걸렸다는 꼬리표는 치욕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루이스가 다시 이사벨과 그레이스를 봤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직접 들어야겠지. 뭐, 곧 돌아갈 룩센 황태자에게 선물로 줄 게 필요하기도 하고.”
루이스가 갑자기 검을 크게 휘둘렀다. 이사벨과 그레이스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그레이스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너부터 말하면 되겠네.”
그레이스가 말하지 않으면 다음엔 머리카락이 아니라 머리가 될지도 모른다. 루이스는 가만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그레이스가 말하기 전에 이사벨의 눈치를 봤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거래의 시작은 이사벨이 먼저 그레이스에게 손을 뻗은 것이었다.
루이스가 그레이스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검을 내리쳤다. 검은 바닥에 찍혔지만, 순간 그레이스의 어깨를 찍는 줄 알았다. 그레이스와 이사벨이 루이스의 발밑에서 어깨를 떨고 있었다.
“에일린을 흠집 낼 생각이었나?”
“…….”
“아니면 공작을 사이에 둔 치정 싸움이었던 건가?”
루이스가 헤레이스를 비꼬았다.
“아직도 대답할 생각이 들지 않는 건가.”
루이스가 다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그때 그레이스의 아버지인 백작이 나타났다.
“호오, 이건 뭐지?”
백작이 루이스의 앞에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루이스가 백작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백작이 이렇게 부성애가 넘치는 사람이었나?”
하지만 백작은 어떤 모욕도 참을 준비를 하고 왔는지 더욱 고개를 숙일 뿐이다.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일단 그레이스를 데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게 어떤 대가가 될 줄 알고?”
루이스가 백작을 도발했다. 분명 백작이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할 생각인 거다.
“네. 무엇이든 치르겠습니다.”
“그게 백작의 목이 될지도 모르는데?”
백작이 움찔하는 모습을 보며 루이스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배를 부여잡고 소리까지 내면서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크큭. 일단 데려가도 좋아.”
“감사합니다.”
제국에서도 콧대 높기로 유명한 백작이었다. 그런 백작이 루이스의 말에 바로 그레이스를 데리고 얌전히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도 백작의 모습은 이상했다. 자신의 딸이기는 하지만, 모든 귀족가가 그렇듯이 자신의 안위가 중요하지 가족에 헌신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백작이 이렇게까지 하다니.
자리를 떠나는 백작과 그레이스를 보면서 루이스가 여유롭게 인사했다.
“대신 기대하라고.”
하지만 두 사람이 사라졌다고 해서 이 상황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룩센 황태자. 그대는 황궁에 먼저 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것은 권유가 아니라 압박이었다. 그것을 알아들은 룩센은 루이스의 말에 흔쾌히 웃으며 물러났다. 어차피 제국의 일, 그들에게 외국인인 자신이 깊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룩센 황태자가 돌아가자마자 루이스의 검날은 이사벨을 향했다.
“그럼 이제 이사벨 부인에게서 답을 들어야겠지.”
어쩌면 루이스는 이사벨을 혼자 남겨 두기 위해서 일부러 그레이스를 보내 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벨은 루이스의 말에 고개를 홱 들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표독스러웠다.
“나는 처음부터 그대가 공작가에 오는 것 자체가 싫었어요!”
이사벨이 나를 싫어한다는 것쯤은 과거에도 진절머리나도록 알고 있었다. 이사벨은 이미 공포를 벗어 넘은 것 같았다.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헤레이스, 나는 황가와 얽힌 사람은 끔찍합니다. 제발 저런 여자 따위 쫓아내 버리세요!”
이사벨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갑자기 악을 쓰기 시작했다. 더 이상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나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황제가 우리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데!!”
“어머니!”
“공작가가 왜 이렇게 무너졌는데요!”
헤레이스가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나는 내 앞을 지키고 있는 헤레이스에게서 벗어나 이사벨의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마주했다.
“왜 제 탓이라고 하는 것처럼 들리죠?”
“그럼 누구 탓이야!”
내 한마디가 그녀를 건드린 건지, 이사벨은 누가 봐도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헤레이스가 이사벨을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황제가 내 남편을 죽였어!!”
“어머니!!”
갑자기 터진 이사벨의 한마디에 모두가 경악했다. 그녀는 이제 더는 거리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과거에도 직접적으로 한 적 없는 말을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토해 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의 말대로 공작가와 황가는 질긴 악연이었다.
“그 일만 없었으면 공작님도 여전히 살아계셨을 거야. 공작가도 이렇게 안 됐을 거라고!! 감히 공작가와 결혼하겠다고 했으면 보상이라도 제대로 했어야지! 뭐든 다 갖다 바칠 것처럼 굴더니 결혼하자마자 태도가 변해서는, 누가 황제의 여동생 아니랄까 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황실을 모독하고 있었다. 심지어 루이스 앞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사벨의 내뱉는 한마디까지 모두 즉결처분으로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원래라면 당장 검을 뽑아서 이사벨의 목에 겨눴을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 루이스는 이사벨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었다.
“난 관대한 처결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군.”
루이스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이사벨의 말을 끝까지 들은 루이스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좀 전까지 몰아치던 분노와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위화감이 느껴져서 나는 그게 왠지 더 불안했다.
이사벨이 루이스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불가능하지만 마치 가능하다면 루이스를 죽이고 싶다는 듯, 분노로 들끓는 눈이었다.
“우리 가문을 일부러 무너뜨린 게 바로 황제, 당신이잖아!”
루이스는 조소를 띄며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모든 책임이 공작가에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될 텐데.”
이사벨은 루이스의 말에 억울한 얼굴을 했다. 소리를 지르고 서럽게 눈물을 터트렸다.
“공작님은 아무 잘못도 없었어!!”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나?”
루이스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계속 참는 게 보였다. 헤레이스 역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