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도 바쁜 황녀님-68화 (68/124)

?제68화. 8장. 소문 (14)

황가와 공작가. 그사이에 존재하는 질긴 악연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두 가문에 골이 점점 깊어진 것은 황녀 납치 사건. 즉, 내가 납치되었던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황가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었다. 내가 갑자기 헤레이스와 결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전까지.

그날의 일은 어느 순간부터 금기어가 되어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를 납치한 주범은 끝까지 잡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공개적으로 잡아서 벌을 묻지 못했을 뿐,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루이스는 선대 공작이 배후라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내가 끝까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어쩌지 못했을 뿐.

나는 잠시 망설였다. 입술이 마른 것 같았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숨과 함께 말을 삼켰다. 그러다 루이스를 봤다.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살짝 벌리고 말을 내뱉었다.

“알고 있어요.”

“!!”

“그게 무슨……?”

헤레이스가 딱딱하게 굳은 채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루이스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아는 걸까. 루이스는 놀란 얼굴로 나를 볼 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헤레이스는 사실 확인을 하려는 듯 내게 물었다.

“알고 있다니요?”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지켜보고 있었다.

“폐하께서 선대 공작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그래서 공작님과 이사벨이 황가를 원망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헤레이스가 그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사벨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전에도 지금도 오로지 자신만이 피해자라고 믿고 있는 그녀를 향해서.

“또한, 과거에 저를 납치했던 것이 선대 공작이었다는 것을요.”

결국, 이 말까지 내뱉었다. 그러니까 알 것 같다. 내가 느낀 알 수 없는 불안감의 정체를.

이 지겨운 악연을 더 이상 잇지 않고 끊어 낼 마지막 순간을 위한 준비였다.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척, 그러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완벽하게 나쁜 사람이 되기는 싫었던 그녀와의 마지막을.

외전 3. 황녀 납치 사건 (1)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5년 전, 내가 납치를 당했던 날은.

* * *

오늘도 루이스에게 한 방 먹었다. 황태자는 분명 바쁘다고 했는데, 어째서 루이스는 한가해 보이는 거지? 요즘 따라 틈만 나면 와서 괴롭히고 가는 루이스 때문에 피곤해 죽을 것 같다.

내가 투덜거리면서 방에 들어오자 루이스가 쫓아왔다. 방 안에는 루이스와 나, 그리고 에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오라버니는 앞으로 제국의 황제가 되셔야 하잖아요. 제발 책임을 다하세요.”

“무슨 소리야.”

“이렇게 나오는 거, 몰래 빠져나오시는 거죠? 저 다 압니다.”

루이스가 나를 빤히 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황당한 얼굴로 보자 루이스가 나를 비웃으며 자신만만한 얼굴을 했다. 팔짱까지 꼈다.

공부도 안 하고 빠져나왔으면서. 내가 불퉁한 얼굴을 하면 할수록 그의 광대는 점점 더 위로 올라갔다.

“누가 그래?”

“뭘요.”

“누가 내가 몰래 빠져나오는 거라 누가 그래? 데려와 봐.”

“누가 말 안 해도 압니다! 지금 시간에 오라버니가 계셔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내가 능력이 너무 좋아서 빨리 끝났다고는 생각 안 하고?”

“…네?”

루이스가 더욱 뻔뻔한 얼굴을 했다. 말도 안 된다. 나한테 주어진 일정도 매일 벅찬데, 루이스가 아무리 날고뛰어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증명해 줄까?”

“네. 어디 한번 해 보세요.”

루이스의 명령으로 그의 수업을 총괄해서 담당하는 책임자가 왔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오늘 하셔야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루이스는 기세등등해 하고 있었다. 책임자는 할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돌아갔다.

“그럼 이 귀한 시간에 다른 일을 하세요. 매일 여기 오지 마시고.”

“왜, 뭐 켕기는 거라도 있어?”

루이스가 눈빛을 반짝였다. 뭐라도 하나 걸리면 물고 늘어지면서 괴롭힐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것도 없었다. 다만 이렇게 찾아와서 내 일을 훼방 놓는 게 싫을 뿐이다.

게다가 요즘 루이스는 뭔가 이상했다. 원래도 자주 오는 편이긴 했지만, 요즘에는 유난히 심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왔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에밀에게 물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같지?”

에밀은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최근 외출을 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가로막더니, 그때부터 이런 식이었다. 마치 내가 어디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아왔다. 덕분에 나는 꼼짝없이 황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루이스를 설득해 보려고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 * *

오늘은 일도 일찍 끝났다. 수업도 끝났다. 이제부터 온전히 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뭔가 허전했다. 왜 이렇게 허전하지? 에밀도 있고, 늘 마시던 차도 눈앞에 있고. 부족한 게 없는데.

‘대체 뭐지…?’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다가 깨달았다.

“아…!”

오늘은 루이스가 오지 않았다. 요즈음 단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찾아왔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순간 눈이 빛났다. 좋은 생각이 났다.

“에밀.”

“네, 아기씨.”

“나 오늘은 일찍 잘래.”

“아직 낮인데요?”

“요즘 이상하게 피곤해서 그래.”

“그러면 주치의를 부를까요.”

에밀이 걱정하며 물었다. 나는 재빨리 웃으며 말했다.

“아냐, 그냥 쉬면 될 것 같아. 그니까 얼른.”

내가 계속 쉬면 된다고 얘기하자, 에밀은 걱정되는 얼굴을 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침대 정리를 하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동안 루이스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동안 답답했는데 오늘이 기회였다.

조금만 더 가면 황궁을 벗어날 수 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옷소매 사이에 넣었던 종이를 꺼내 확인했다. 올리비아가 그려 준 약도다. 이곳에 가면 올리비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전부터 올리비아가 황궁 밖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루이스가 매일같이 찾아오는 바람에 시도조차 못 했다. 오늘 가지 않으면 당분간 기회는 없을 것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멀리 돌아가야 하지만 경계도 허술하고 사람들 눈에도 잘 띄지 않는 문이 있다. 주로 시녀들이 출입하는 문인데, 그곳으로 통하면 분명 들키지 않을 것이다.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빨리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가 나를 덮쳤다.

“읍! ……으읍…!”

발버둥을 쳐 봤지만, 소용없었다. 천 같은 것으로 내 입을 막았는데 그 안에 약이 있는 것 같다. 어느새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이상하다. 분명 여긴 황궁 안인데…….’

황궁 안에서 내가 납치를 당하는 건가. 믿을 수 없었다.

* * *

정신을 차려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눈이 가려진 것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깜깜하다는 감각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흔들리면 안 된다. 보이지 않는다면 생각하면 된다.

내가 납치를 당한 것은 황궁 안이었다. 비록 내가 혼자였고 황궁 안에서도 외곽에 있었다고 하지만, 그곳에서 나를 납치할 정도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했을 것이고.

황녀를 황궁에서 납치할 정도로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이런 일을 감행해야 할 만한 명분이 있는 사람. 그중에 범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역시 황가와 대립하고 있는 가문이 가장 유력하겠지.

게다가 지금 주위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인기척을 숨기고 있을 확률도 있지만 아마도 아니, 분명히 주위에 나를 감시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이토록 고요한데 아주 작은 숨결조차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나를 납치하고도 가까운 곳에 감시를 붙이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이곳에서 절대 도망칠 수도, 누군가 와서 나를 빼돌릴 수도 없을 거라는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굳이 문 앞을 감시하지 않아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주변의 보안이 철저하다는 것이고, 외부인의 출입이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외곽 지역에 있는 은신처이거나 누군가의 개인 사유지일 확률이 높았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답답했다. 당장 몸을 조금씩 이동해서 벽을 찾았다. 벽으로 가서 조금이라도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것이 있는지 찾았다.

사방의 벽을 더듬어 봤지만, 물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평평한 벽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팔과 다리가 묶여 있는 상황에서 눈가리개를 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려고 할 때였다.

“……앗.”

등에 뭔가 걸렸다. 툭 튀어나온 게 약간 날카로운 것 같기도 했다. 조금씩 천천히 그게 무엇인지 만져 봤다.

‘못이다…….’

아무것도 없는 벽 한쪽에 못이 걸려 있었다. 등 뒤 정도 높이에 있었다. 몸을 조금 밑으로 내렸다. 머리의 조금씩 위치를 조정하면서, 못이 눈가리개에 걸리도록 했다.

‘걸렸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살짝 흔들면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 끝에 시야를 가리던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하지만 눈가리개를 벗어도 보이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단 한 줄기의 빛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사방이 막혀 있었다. 창문도 없었다.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내가 의식을 차린 것이 반나절만인지, 하루인지, 아니면 며칠이 지난 건지조차도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