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외전 3. 황녀 납치 사건 (2)
내가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반복되는 일이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추측들을 정리해 봤다. 사실,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일단, 그들은 당장 나를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매일 한 번씩 두 끼 정도 되는 양의 식사가 왔다. 언제 넣어 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넣어 두는 것 같은데. 문제는 내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려 봐도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정신을 잃었을 때 온다는 것이다.
잠을 자지 않고 끝없이 버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어둠밖에 없는 이곳에서는 잠시 긴장을 푸는 순간 그대로 잠에 빠져 버렸다. 지금 내 눈앞에 식사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면 아마 하루가 지났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를 납치한 목적이 단순히 몸값을 얻기 위한 납치 혹은 협박을 위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정말 그런 것을 원한다면, 벌써 누군가 찾아오거나 내게 무언가를 물어봤어야 할 것이다. 원한 관계 역시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고문하든 다른 방법을 찾든 분풀이를 했을 것이다.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목적이어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를 납치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뭐가 남았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뿐이겠지.’
정치적인 이유.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제국의 정세가 불안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를 비롯한 황가와 척을 지고 있는 가문들이 떠올랐다. 이곳이 그들 중 하나와 연관되어 있는 곳인 건가. 하지만 이 이상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내 추측이 맞는다고 해도 그들이 나를 납치해서 얻어 내려고 하는 이득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의 목적을 모르니 이곳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왔네.”
이런 식의 반복이었다. 이 안에서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내가 이곳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모든 추측과 예상도 결국엔 아무 소용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나는 지쳐 갔다.
어딘가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은, 어떻게 아는 건지 내가 잠들었을 때 안에 들어와 있는 음식뿐이었다. 그 때문에 대강의 시간의 흐름도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곳은 끔찍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위협하는 적도, 나를 괴롭히는 문지기도. 하지만 이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고, 오로지 언제 발견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내 목을 조금씩 조여 올 뿐이었다.
타닥-. 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 분명한 소리가 들렸다. 몸이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살폈다. 그래 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사람의 발소리였다.
소리가 들린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눈물이 흘렀다. 저 소리가 나를 죽이러 오는 사람일지도 모르는데도 기뻤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 이 고요한 적막이 더 미치도록 괴로웠다.
문 앞에 사람이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이상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왜지? 설마 다시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나는 순간 문 앞에 있는 상대가 문을 열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보다 저렇게 가만히 있다가 돌아가 버릴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며칠인지 몇 달인지 모를 시간만큼 침묵하고 있어 메마르고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
“…저, 저기…….”
덜컹-. 내가 부르자, 놀랐는지 상대방이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에 걸린 것 같았다. 그동안의 적막을 개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다시 오겠습니다.”
남자가 한마디를 남기고 멀리 사라졌다. 정확히는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사라진 후, 여러 발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왔다.
“이 근처에서 소리 나지 않았어?”
“잘 살펴봐.”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는데…….”
아마 이 근처를 지키는 사람들인가 보다. 좀 전과는 달리, 나도 모르게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부디 좀 전의 남자가 다시 찾아와 주기를 바라면서.
* * *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식사가 눈앞에 그대로 있었다. 온기를 잃고 차가워진 음식, 딱딱해진 빵. 무엇하나 쉽게 삼키기 힘들었다. 그래도 먹었다. 살기 위해서 눈앞에 있는 식사를 꾸역꾸역 먹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어제 왔던 그 사람이 오늘도 와 주기를 바라면서. 그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나를 방심시켜서 뭔가를 얻어 내려는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나의 유일한 희망인 것만은 분명했다.
타닥-. 탁-.
나는 움찔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발소리가 들렸다. 분명 어제 그 남자다. 왠지 발소리만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게 들렸다.
발소리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나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꺼내 주기를 기다렸다. 아니면 내가 먼저 말을 해야 하나 싶었을 때였다.
“저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만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막상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남자가 말을 이어 나갔다.
“어제 그 사람입니다.”
“…….”
이상하게도 심장이 뛰었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드디어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생긴 것이다. 계속 밖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누구…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만약 이 사람이 연기하는 거라면 어떡할까. 아무것도 모른 척 이렇게 다가와서 의지하게 만들어 놓고, 알고 보니 나를 납치한 자들과 공범이라면? 위기감이 들었다.
내 경계심을 느꼈는지 남자가 나를 달랬다.
“걱정 마세요.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 때문에 희망이 생김과 동시에 위기감도 느껴졌다.
“그럼 이거라도 알려 주세요. 벌을 받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납치인 겁니까?”
남자는 지금 내가 이곳에 왜 와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누구지? 이곳에 일하는 사람인 건가? 하지만 내가 납치당한 것과는 연관이 없는 그런 건가?
“…납치에요.”
남자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게 느껴졌다.
나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순간적인 본능이었다. 사람에게 매달려야 한다는 본능에 머리보다 몸이, 몸보다 입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저를 구해 주세요…! 그럼 보답은 반드시 하겠습니다.”
초조했다.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 남자가 물었다.
“그러려면 제게 누구인지 정도는 알려 주셔야죠. 아무 정보도 없이 도와드리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남자가 일어나서 돌아가려는 게 느껴졌다.
“…가, 가지…허억…허억…하………마…….”
입을 열어 남자를 붙잡으려는데, 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졌다. 숨을 쉬기 괴롭다.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낮게 웅크렸다. 당황한 그가 다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괜찮으세요?”
“허억…허억…허…억…….”
괜찮냐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제대로 답하기가 힘들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저기……. 숨을 크게 들이마시세요. 그리고 천천히 내뱉어 봐요.”
“하아…하악……. 하아……흐…….”
그가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 게 들리는데,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오로지 미칠 것 같았다. 이러다 납치한 사람들한테 죽기 전에 여기서 숨을 쉬지 못해서 죽을 것 같았다. 숨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하악……하아…하아……하…하윽…….”
그때였다. 남자가 숨을 크게 들이쉬다가 다시 내쉬었다. 일부러 내게 들으라는 듯이.
“…후우-. 하아-. 후우-. 하아-.”
옆에서 끈질기게 숨을 규칙적으로 들이켰다가 내뱉으니, 나 역시 어느새 그 소리를 따라 호흡을 하게 됐다.
“…후우-. 하아-. 후우-. 하아-.”
“……후-우…하아…후우-. 하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그가 물었다. 내 숨소리는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이제 괜찮은가요?”
“하아…하아…….”
“조금 더 같이 있어 드리고 싶지만, 슬슬 날이 밝고 있어서요.”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날이 밝으면 사람들 눈에 띌 것이다. 그가 정확히 이곳에서 어떤 신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 있었던 것이 발각되면 분명 봉변을 당할 것이다.
간절히 바랐다. 저 사람이 나를 납치한 사람들이 보낸 미끼가 아니기를. 그 사람이 나를 이곳에서 꺼내 줄 사람이기를.
* * *
헤레이스가 그곳까지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저택 내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헤레이스는 확신했다.
지금의 황제는 유한 인물이었다. 고집이 강하지도, 강한 황권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귀족들에게 현 황제는 생각보다 휘두르기 쉬운 존재였다.
그렇게 유지되고 있던 황가와 귀족들 간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황태자인 루이스가 그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황태자가 전쟁에서 승리해 세력을 키우고 힘이 생기자, 귀족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현 황제와는 다른 성격의 황태자였다. 그는 누가 봐도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었다.
그런 황태자의 존재에 가장 큰 위기감을 느낀 사람이 바로 헤레이스의 아버지, 공작이었다. 공작을 중심으로 귀족들 간에 지금의 황태자가 황제가 되게 놔둬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공작은 자꾸 무리수를 두려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