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외전 3. 황녀 납치 사건 (3)
귀족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에 대한 경계는 당연한 일이었다. 헤레이스 역시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했었다. 하지만 조금씩 거친 방법을 쓰는 공작의 행동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헤레이스는 공작의 행동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근 헤레이스와 그의 아버지인 공작 사이에 다툼이 빈번해졌다.
‘그런다고 해서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은데.’
헤레이스는 현실적으로 공작의 계획이 적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공작이 잠잠했다. 그래서 헤레이스는 직감했다. 계속 반발하는 자신 몰래 분명 아버지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고. 그리고 그게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그것만은 아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게다가 최근에 제국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 이 저택 안에 느껴지는 위화감도 분명 그 영향일 것이다. 갑자기 집안을 지키는 경비가 많아졌다.
그래서 헤레이스는 저택 안을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수색했다. 그러다 그곳까지 가게 됐다.
처음에는 고민했다. 과연 그곳에 있었던 여자의 정체가 무엇일까. 하지만 어렵지 않게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지금 현재 제국을 발칵 뒤집은 사건은 하나였다.
황녀 납치 사건. 헤레이스가 그토록 아니기를 바랐던 사건에 공작은 그저 연루된 것뿐이 아니었다. 공작가에 그녀가 있다는 것은, 곧 공작이 사건의 주모자 중 핵심인물이라는 것이었다.
황녀 납치 사건으로 인해 황태자 루이스는 분노로 눈이 뒤집혀서 제국 내 의심되는 곳은 들쑤시고 다녔다. 그런데도 황녀가 납치당한 장소의 실마리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황태자의 분노는 강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황궁 사람들을 비롯해 제국의 귀족, 백성들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잘못 걸리면 이유를 불문하고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공작가에 버젓이 황녀를 두다니.”
무모한 건지, 자신만만한 건지. 헤레이스는 짐작할 수 없었다. 이대로 여기에서 발각된다면 공작가는 빼도 박도 하지 못한다. 그대로 멸문이었다.
하지만 헤레이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공작가는 철저하게 그의 아버지, 공작에 의해 움직였다. 그가 아버지에게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헤레이스가 보기에 아버지의 행동은 너무나 무모했다. 황녀를 납치하다니. 이 일이 발각될 경우, 공작가는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함부로 황녀를 풀어주거나 그가 직접 움직였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헤레이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매일 밤 그녀를 찾아가는 것뿐이었다.
헤레이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밤도둑처럼 몰래 움직였다. 그녀에게 별다른 변화가 없는지. 아직은 이곳에서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상태는 이미 심각했다.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황궁 안에서 완벽에 가까운 보호를 받으며 살아온 그녀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곳에 끌려와 갇혀 있는데 멀쩡한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헤레이스는 황녀에게 속삭였다.
“조금만 참으세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테니. 당장은 무리지만, 이곳을 안전하게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너무 늦지 않게 찾을 것이다. 그래야 그녀도, 공작가도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전에…….’
헤레이스는 문 너머에 있는 그녀가 마치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얼마나 궁지에 몰려 있는지 느껴졌다.
‘준비가 되어야겠지.’
헤레이스는 우선 그녀의 증상에 대해 은밀히 알아보았다. 그리고 폐소공포증인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 사방이 갇힌 곳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하면 생기는 증상이라고 한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헤레이스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웠다. 황녀가 그곳에 갇힌 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서 그녀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그녀가 괴로워하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여기서 좀 더 지체되면 그녀의 상태가 얼마나 더 나빠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녀를 구하기에는 헤레이스 역시 망설여졌다. 마음만큼은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구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녀의 상태를 살피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황궁에서 하고 있는 조사가 어디까지 진척되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들의 추적이 공작가까지 뻗어도 문제였고, 그렇지 않아도 문제였다.
황태자가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조사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미 이곳에 황녀인 그녀가 잡혀 있었던 시간이 짧지 않았다. 헤레이스가 보기에는 곧 이곳이 발각될 것 같았다.
그전에 그녀를 구해서 황가로 돌려보내야 했다. 황태자가 먼저 알아차린다면, 그가 황녀를 구하기 전에 아버지인 공작에 의해 그녀의 목숨이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 * *
어느 날부터 그 남자는 나를 찾아올 때 음식을 가져왔다. 매일 사료처럼 먹던 차갑고 딱딱한 음식이 아니었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음식이나 과일을 가져왔다. 이곳에 와서 처음 접하는 음식다운 음식이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가 찾아오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내 상태 역시 조금씩 좋아졌다. 따뜻한 음식 때문이었는지, 목소리뿐이라도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 때문이었는지. 조금씩 이 안에서도 온전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남자가 질문했다.
“거기서 그럼 뭐하고 계십니까?”
뭐하냐니. 붙잡혀 왔는데, 뭘 할 수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묶여 있는데 뭘 할 수 있나요?”
내 말에 그 남자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피식. 웃음소리가 언뜻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손발은 이미 풀지 않았나요. 그쵸? 풀었잖아요.”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다. 내가 몸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시 묶일 것 같았다. 아니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해질 것 같았다. 나는 잔뜩 경계한 채 무슨 말을 꺼낼지 골랐다.
그때, 그가 이상한 말을 했다.
“몸을 좀 만들어 두세요.”
몸을 만들어 두라니.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 두세요.”
그 말이 마치 나를 구해 줄 테니 준비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갖혀 있는 동안 운동이란 것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말 이후부터 뭐든 잘 먹고 틈틈이 운동을 시작했다.
* * *
아무래도 공작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움직이다 보니 제약이 너무 많았다. 조용히 공작가에 들어와서 그녀를 데리고 황궁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해야 할까, 생각했을 때였다.
뚜렷한 해답은 찾지 못한 채 헤레이스가 오늘도 그곳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검은 복면을 한 사람이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별거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헤레이스는 집무실 옆에서 숨어서 기다렸다.
잠시 후에 집무실에 들어갔던 검은 복면의 남자가 나왔다. 그리고 공작가를 지키던 호위들을 불러 모았다.
‘어째 못 보던 얼굴인데.’
검은 복면의 주위로 몰려온 호위들은 헤레이스에게도 낯선 인물들이었다. 물론 그가 저택의 호위들을 모두 알 리는 없었다. 하지만 저 중에 단 한 사람도 익숙한 얼굴이 안 보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호위로 위장한 거군.’
그녀를 납치한 후에 감시하기 위해서 공작가의 호위 행세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검은 복면과 호위들 사이에 은밀하게 대화가 오고 갔다.
“오늘 밤에 처리하기로 했다.”
“이대로 말입니까.”
“그래. 어떤 놈이 입을 잘못 놀릴 것 같다. 어차피 살려 보낼 게 아니었으니, 상관없지.”
“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화가 뜻하는 내용은 명확했다. 그들이 지칭하는 것은 모두 그녀였다.
“해가 뜨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한다.”
검은 복면의 말과 함께 모두가 흩어졌다. 티 나지 않게 이동하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는 몸을 숨긴 채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갑자기 이렇게 된 거지?’
더 이상 헤레이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대로 그녀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무리수를 써서라도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그녀를 빼내야 했다.
* * *
나는 평소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에는 내 숨소리가 지나치게 잘 들렸다. 그만큼 고요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과연 지금 이 상황이 내게 안 좋은 상황인 걸까?
문이 덜컹거리며 흔들리더니, 갑자기 굉음을 일으키며 부서졌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사람은 그동안 나를 찾아왔던 남자였다. 남자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왠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다급한 얼굴로 나를 끌어당겼다.
“어서 나오세요!”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눈만 끔뻑거렸다. 남자가 다시 한번 나를 재촉했다.
“지금 나가야 합니다.”
얼마 후 문을 부술 때의 충격 때문에 생긴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공작가를 지키던 호위들뿐만 아니라 사정을 잘 모르는 하녀들까지 몰려들었다는 것이었다.
하녀들이 어리둥절해 하며 주위를 살폈다.
“어머, 이게 무슨 난리에요?”
“쓰지도 않는 창고에서 갑자기 왜 이런 일이.”
호위들 역시 주위를 살폈지만, 하녀들과는 달리 그들은 정확히 찾는 대상이 따로 있었다.
“칫…….”
인파 속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나와 그는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저택을 바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보다 이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나무에 올라 숨어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지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