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외전 3. 황녀 납치 사건 (4)
숨을 죽이고 있다 보니 나무 밑에서 오가는 대화 내용이 들렸다.
“그만 됐으니 일단 물러가라!”
“그래도 이건 치워야……. 마님께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됐으니까! …내일 해도 된다.”
나뭇가지와 나뭇잎, 그리고 주위에 있는 풀들로 시야가 가려져 있었지만, 그들의 움직임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하녀들을 내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만 봐도 바로 알 것 같았다. 저자는 내 납치와 관련된 인물이다. 그래 봐야 하수인일 확률이 높지만.
그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움직이죠.”
“…아직 사람들이 있는데요?”
밑에는 아직 사람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지금 움직이다가 소리라도 나면 그대로 들킬 것이 뻔했다.
“하녀들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움직여야 합니다.”
나는 그의 의도를 바로 이해했다. 그의 말대로 차라리 하녀들 때문에 아직 조심하고 있는 지금 움직여야 했다.
그가 앞으로 가야 할 이동 경로를 설명해 줬다.
“여기서 바로 담을 넘을 겁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쭉 가면, 하인들이 쓰는 출입문이 있습니다.”
“거기로 나가는 건가요?”
“아뇨, 그 출입문에서 오십 걸음 정도 가면 땅 밑으로 난 작은 구덩이가 있습니다. 거기로 통과할 겁니다.”
“…?”
“따라오시죠.”
그가 말한 담장에 나뭇가지가 걸쳐져 있었다. 물론 나뭇가지가 흔들려서 그대로 이동할 수는 없었다.
먼저 그가 가볍게 뛰어서 담장 위에 착지했다. 발이 닿는 순간 작은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었다. 나는 최대한 나무 중심에서부터 조심히 움직였다. 한 발 조심히 움직일 때였다.
바스스-. 생각보다 나뭇가지가 약했는지, 발밑에 있는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나뭇잎이 떨어졌다. 내가 놀라서 굳자 허공에 머물고 있던 내 팔을 그가 잡아끌었다.
“조심해요.”
그 말이 바람 소리보다 더 순식간에 내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뭐야, 나무가 갑자기 왜 이래?”
“잠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조용히 해 봐.”
담장 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나무 밑에서 호위들이 나무를 올려다보는 게 보였다. 다행이었다. 그들이 나뭇가지에서 흩어지는 나뭇잎에 집중하는 동안 우리는 담장 아래로 무사히 내려왔다.
여기서부터는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부딪힐지 몰랐다. 달리는 내내 그의 말대로 갇혀 있는 동안 체력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이 도움이 됐다. 그의 말대로 하인들이 사용하는 문이라서 그런지,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를 따라 쉬지 않고 이동했다. 그가 말한 나가는 길이란, 말 그대로 작은 땅굴이었다. 사람 몸이 겨우 통과할 것 같은 크기였는데, 저택 밖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원래는 하인들이 물건을 몰래 빼돌릴 때 사용하는 곳이죠. 무조건 이곳으로 통과해야 합니다.”
여길 지나가려면 몸을 납작 엎드려서 땅굴로 기어들어 가야 했다. 아마도 내가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뭐해요. 빨리 안 가고.”
나는 거침없이 땅굴로 몸을 집어넣었다. 말이 땅굴이지, 그리 깊지 않았다. 우리는 저택 밖으로 빠져나왔다.
“저기 있다!”
하지만 저택 앞을 이미 지키고 있었는지, 우리는 저택을 나오자마자 발각되었다.
“잠깐…저기 저 사람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을 보고 하는 말 같았다.
“뭐합니까? 어서 가야 합니다.”
“…네.”
더 이상 그들의 말을 신경 쓸 수 없었다. 이 남자가 누구든 중요하지 않았다. 우선 여기서 도망쳐야 했다.
“잡아!”
“달려요!”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가는 곳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우리를 쫓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래도 겨우 벗어났다. 얼마나 멀리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다행인 건, 내가 생각보다 잘 버텼다는 거였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서 골목 어귀에 몸을 숨겼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황궁이 보일 것이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돌아갈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
“제가 황궁 앞까지는 같이 못 갑니다. 그러니 황궁까지 갔을 때는…….”
“이제 됐어요.”
그의 말을 더 들을 필요 없었다. 갑자기 바뀐 내 태도에 그가 당황한 게 보였다.
“네? 그게 무슨.”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게요.”
그가 다급하게 말렸다.
“위험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야 했다. 아니, 그러기로 이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확고하게 부정했다.
“아직 황궁까지는 갈 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아직 우리를 쫓고 있을 텐데……. 절대 안 됩니다.”
그는 잡고 있는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디까지 같이 갈 수 있나요?”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그는 절대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켜 줄 수 없다.
“황궁 앞까지는 못 간다면서요. 그러면 지금 헤어지나 그때 헤어지거나 어차피 똑같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겠습니다.”
내가 먼저 돌아섰을 때였다. 그가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황궁까지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니 같이 가시죠.”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헤레이스 영식.”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헤레이스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되면 그대의 신분이 드러날 텐데…정말 괜찮나요? 공작가가 나를 납치했다는 사실 역시 그대로 드러날 거예요. 모두 감당할 수 있나요?”
헤레이스가 움찔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죠.”
헤레이스가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나 혼자 보내는 것이 불안한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나를 잡고 있던 헤레이스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렇다. 헤레이스는 나를 납치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또한, 나를 납치한 것은 그의 아버지이자 제국의 공작이었다.
헤레이스가 물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로서는 내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았는지 궁금한 것 같았다.
“날 황궁으로 데려다 주려고 했잖아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헤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내가 어디로 데려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먼저 황궁으로 향하는 길목인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는 황궁까지는 같이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황궁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
“나를 도와주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나를 도와준다는 것은 내가 납치당하는 과정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는 분명 그 창고에서 내 존재를 처음 알았으니까.
“내가 있는 곳을 아무렇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
그러면서 매일 밤마다 나를 찾아왔다. 내가 갇혀 있던 곳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헤레이스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헤레이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도망칠 때 확실히 알았어요. 내가 그동안 어디에 갇혀 있었는지.”
그건 단순한 우연이었다. 황궁을 나와 올리비아와 함께 외출했을 때 공작가 앞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올리비아가 스쳐 지나가듯이 얘기해 주었다. 여기가 공작가라고.
그리고 헤레이스를 따라 도망칠 때 알아차렸다. 내가 갇혀 있던 곳은 어느 외진 곳이나 별장이 아니라, 공작가였다는 것을. 공작가와 그곳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나를 도와주는 눈앞의 남자를 연결하니, 답은 간단했다.
충격을 받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헤레이스를 두고 나는 먼저 골목을 벗어났다.
얼마나 갔을까. 나 혼자 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헤레이스가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무섭지 않았다.
타닥. 타닥. 탁. 탁.
타닥. 타닥. 탁. 탁.
그는 숨길 생각도 없는지 내 발걸음과 똑같은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도와준 거……. 고마워요.”
당연히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뒤에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이제는 정말……. 그만 와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황궁이었다.
타닥. 타닥. 탁. 탁. 이제 내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헤레이스가 따라오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전력을 다해서 달렸다. 그렇게 뛰다 보니 어느새 황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도감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그들이 나를 발견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를 납치하는 무리수는 두지 않을 테니까.
“저 사람 누구야…?”
“어디.”
“저기 봐 봐.”
문지기들이 나를 멀리서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황궁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을 가리는 검은 형체가 튀어나왔다.
설마, 이대로 끝나는 건가.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분명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더는 쫓아오지 않는 걸 확인했었는데.
“어서 가세요.”
눈앞에는 헤레이스가 있었다. 그가 나를 덮친 사람을 막고 있었다. 그가 다시 한번 재촉했다.
“어서 가세요…!”
내가 움직이지 않자 나를 신경 쓰느라 정신이 분산된 그가 뒤로 밀려났다.
“윽…….”
헤레이스 옆구리에 피가 나고 있었다. 괴한에 맞서 겨우 버티면서 헤레이스가 소리를 질렀다.
“가라니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있는 게 더 방해였다. 나는 황궁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황궁으로 달려가려고 돌아서는 순간, 나는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그 순간 사라졌다. 하지만 분명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얼굴은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사라졌지만, 나는 그곳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를 찾으러 온 건가? 그럴 리 없었다. 그의 눈빛은 나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 자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당장 내게 달려왔을 것이다. 그는 다른 의미로 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도망친 나를 쫓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