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외전 3. 황녀 납치 사건 (5)
‘아…….’
황궁에 들어서기 전에 나는 깨달았다. 어째서 이때까지 아무도 나를 찾지 못했는지. 황궁 안에서 나를 납치하는 게 가능했는지.
‘그랬구나…….’
그래서 보름 동안 나를 찾아낸 사람이 없었구나. 어쩐지 모든 것이 이해됐다.
“화, 황녀 전하…!!!”
“황녀 전하시다!!”
“괜찮으십니까?”
“전하께서 쓰러지셨다! 어서 문을 열어라!”
문이 열리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황궁 앞에서 도착하자마자 결국 쓰러졌다.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정신을 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병사들이 나를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공범이 그쪽이었다니.’
황궁으로 돌아온 순간, 나를 납치한 두 공모자를 알게 되었다. 공작가와……. 그 사람.
나를 납치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순간,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 * *
눈을 깜박거렸다. 어지럽다. 몸이 무겁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밀이 걱정스레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정신 드세요?”
순간 지금 무슨 상황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 떠올랐다. 지난 시간 동안 있었던 일, 내가 마지막에 쓰러진 것까지.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황궁 안 내 침실이었다.
내가 의식을 차리자마자 루이스가 찾아왔다. 내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납치범에 대해서 계속 물었다.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니. 어떤 놈인지 못 본 거냐.”
“……기억나지 않아요.”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는 루이스에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기억나지 않는 거 맞니?”
“…….”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루이스가 재촉했다. 그 역시 분명 의심하고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네. 기억나지 않아요.”
그것이 나를 구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또한, 내가 봐 버리고만 또 다른 공범 때문이기도 했다. 설사 내가 죽을 뻔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루이스에게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러니 나는 절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언제부터인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기 시작했다. 갇혀 있는 동안에도 헤레이스 덕분에 악화되지 않았던 폐소 공포증이 황궁으로 돌아온 후부터 심해졌다.
내가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루이스는 더더욱 나를 납치한 사람들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9장. 진실 (1)
내 고백에 순간 사람들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다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충격을 받은 듯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루이스가 정적을 깨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런가.”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전부 기억하고 있다면…이제 더는 봐줄 필요가 없겠군.”
맹수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이사벨을 노려보았다. 나는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며 조마조마하게 루이스를 지켜보았다.
검을 쥔 루이스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간신히 참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터지기 일보 직전일지도. 내가 루이스의 작은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루이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일린. 그럼 너……. 전부 기억하는 것이냐.”
전부 기억하냐니. 그게 무슨 뜻이지?
과거에 내가 납치를 당했었던 일련의 과정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내가 털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굳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왜지.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게 더 있었나?
“!!!”
“황궁 앞에서 너를 죽이려고 한 놈. 기억하는구나.”
루이스의 얼굴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다. 그리고 온몸에서 엄청난 살의가 흘러나왔다. 루이스는 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살려 두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을 여기 있는 사람 중 모르는 자가 없었다. 이러다가 회귀 전에 벌어졌던 사건과 같은 일이 또다시 반복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상황은 점점 심각하게 치달아 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루이스가 그들을 어떻게 처분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명분은 루이스에게 있었다. 그들은 황가의 이름에 먹칠을 했고, 제국의 황녀와 외교적으로 중요한 외국의 황태자를 엮어 더러운 스캔들을 만들어 유포했다. 이미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의 신분이었다. 루이스의 처분이 과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누구도 그 자체에 대해 비난할 수는 없었다.
‘안 돼. 말려야 해.’
여기서 말리지 못하면 정말로 과거의 악몽이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절대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루이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등, 강인한 어깨. 듬직하지만, 때론 무서운 것 역시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루이스의 앞으로 가기 위해서.
결국, 나는 루이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폐하.”
“뭐지.”
갑자기 자신의 앞을 가로막자 루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실 나도 긴장됐다. 하지만 각오한 말을 해야 했다.
“저는 이번 일의 당사자입니다.”
루이스는 정말 화가 났을 때 오히려 조용해지는 편이었다. 차갑게 가라앉아서 싸늘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루이스가 나긋하게 물었다.
“그래서.”
루이스가 이런 모습일 때는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당연히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내 손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그러는 거지?”
“그게 무엇이든요. 일이 커지는 것도, 피를 보는 것도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루이스가 가만히 나를 노려보았다. 탐탁지 않은 것이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루이스를 불렀다.
“폐하.”
루이스의 기세가 너무 사나워서 나조차도 몸이 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모두 잘 끝나지 않았습니까. 안 됩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루이스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스캔들에 두 사람이 엄청난 욕을 봤는데도 일단 범인을 찾았으니 잘 끝났군. 알고 보니 그 범인 중 한 명이 네 시어머니라는 작자이지만, 그대로 이렇게 붙잡았으니 잘된 거겠지.”
“…….”
“이번 일로 자칫했으면 너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그런 일 없이 모두 잡았으니 잘 끝났어!”
루이스는 화를 내고 있었다. 말을 이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루이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너는 이 상황에서도 잘 끝났다는 말이 나오는구나.”
결국,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 역시 나를 걱정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나 역시 루이스를 걱정하기 때문에 말리는 것이었다.
회귀 전에 루이스가 ‘피의 축제’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숙청을 이어 나갔을 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언제 싸늘한 주검이 될지 몰라 공포에 질렸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사람의 피를 뒤집어쓴 루이스 역시 한동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라버니를 또 그렇게 만들 수는 없어.’
또다시 루이스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언제 반역이 일어날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루이스가 과거에 황권을 강하게 세울 때 보였던 폭군의 모습을 사람들이 다시 떠올리게 해서는 안 됐다.
그러니 나도 물러날 수 없었다. 나는 루이스의 앞을 가로막은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저는 원하지 않아요.”
루이스가 체념한 듯이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다행이다. 그의 목소리에서도 흉흉하던 기색이 많이 빠져나갔다.
그때였다. 루이스의 낮지만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루이스는 자리에 남아 있는 자들을 흘깃 바라보며 싸늘한 음성을 날렸다.
“하지만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루이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모두들 움찔하며 숨을 죽였다.
루이스는 그대로 돌아섰다. 한시도 여기 더 있고 싶지 않다는 듯, 루이스가 그대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에일린, 너. 황궁으로 와.”
“…네.”
루이스는 내 대답을 듣더니 곧바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나는 루이스의 뒤를 쫓아가는 시종장을 불렀다.
“시종장, 폐하를 잘 지켜보세요.”
“네, 걱정 마세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걱정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확인하듯 말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목숨을 걸고 막으세요.”
“…네.”
시종장이 결연하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루이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쫓아가기 시작했다.
루이스가 참지 못하고 무슨 일을 벌이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게 무엇이든 루이스를 지켜야 한다. 그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결국엔 나 때문이니까.
* * *
루이스가 눈치챈 것은 내가 황궁 앞에서 쓰러지기 직전 보았던 존재의 정체였다. 루이스는 그 존재까지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헤레이스의 도움으로 황궁 앞까지 왔을 때, 멀리서 나를 노리던 존재가 있었다. 그는 활시위를 당겨서 나를 향해 조준하고 있었다. 순간이었지만, 나와 분명히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나는 황궁 앞에서 곧 정신을 잃었고 쓰러졌다. 덕분에 나는 그 화살에 맞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노리던 존재. 그 존재가 무엇인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분명하게 알아차렸다. 그는 황가에서도 비밀스러운 존재였고. 그렇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복색을 하고 있었다. 다만, 나는 그 존재와 그들의 특징 역시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멀리 있고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도 그 존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황제의 비밀 호위대. 하지만, 실상은 황제의 비밀스러운 명령을 수행하는 집단이었다. 결코 세상에는 드러낼 수 없어서 비밀리에 처리해야 할 사람이나 일들을 목숨을 걸고 수행하는 이들.
‘어째서 저자가…….’